< 1857화 > 1857. 이터널 에덴
D-23.
테크놀로지스트인 나채영은 두 가지의 기본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분해기 제작. 기존의 물건을 분해해서 자원을 얻을 수 있는 분해기를 제작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제작. 제작할 물건을 정확히 알고 이해하고 있으면 자원을 소모해 물건을 제작할 수 있다. 나채영은 이 제작 스킬로 총기를 만들었다. 자원 소모가 크고, 총기의 부품 하나, 하나를 이해하고 만들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장점으로는 자원만 충분하다면 뭐든지 만들 수 있다는 거다. 그게 설령 희귀한 광물로 된 물건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내가 사용할 티타늄으로 된 칼을 만들고 있었다. 제작 스킬을 이용해 강철을 티타늄으로 바꾸는 것이다. 강철 자원이 10배 이상 소모되긴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칼의 구조는 복잡하지 않아서 나채영이 티타늄을 이해하고, 자원만 충분하면 쉽게 만들 수 있지.’
나채영은 이틀 만에 티타늄 금속을 이해했다. 문제가 된 것은 자원이었다. 칼 한 자루 만드는데 생각보다 많은 자원이 소모됐다.
어쨌든 완성은 됐다. 내 취향대로 곡도가 아닌 쭉 뻗은 직도. 나는 칼을 휘둘러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좀 가볍긴 한데 단단해서 좋네. 좋아. 티타늄으로 만들었으니 칼의 이름은 티타니아다.”
“너무 험하게 쓰지 마. 아무리 티타늄으로 만든 칼이라도 칼날은 닳을 수밖에 없어.”
“그때는 나 박사가 수리해주면 되잖아.”
“내가 만들었으니 수리할 수는 있어. 추가 자원이 필요하겠지만.”
“자원 말이야. 대량으로 얻는 방법은 없어?”
“특수 광산 하나를 통째로 지배하거나, 자원 변환기를 이용해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이 있긴 한데…. 둘 다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가장 효율적인 건 분해기 뿐이야. 분해기를 업그레이드하면 효율이 오를 거야.”
“분해기를 업그레이드할 자원이 없잖아.”
“그러니까 문제지.”
나채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자원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게 테크놀로지스와 바이오닉스의 최대한의 단점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해야 할 일도 산더미처럼 많았다. 성악초등학교를 요새화시키는 작업도 시작해야 한다.
나는 티타늄 칼을 들고 슬쩍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운동은 귀찮고 힘들어서 하기 싫지만, 작업하는 것보다는 낫다.
‘강해지려면 육체 단련을 꾸준히 해야 해. …정말이지 귀찮아 죽겠네.’
아무도 없는 강당에서 티타늄 칼을 휘두르며 뇌천류를 수련했다. 오늘 밤에 태왕의 보스와 만나러 간다. 전투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벼릴 필요가 있었다.
***
나채영은 하얀 가운을 입고 트럭 조수석에 앉았다. 그녀는 쿵쿵 뛰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태왕의 보스의 행동을 예측했다. 태왕의 보스가 원하는 것은 자신, 정확하게는 테크놀로지스트의 능력이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협조가 필요하니 협상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손해를 보겠지만… 어쩔 수 없다. 불리한 건 자신이니까.
운전석에 앉은 성유진은 트럭의 시동을 걸면서 나채영에게 물었다.
“가운을 입고 가게? 밖에 나갈 때는 항상 가운을 벗더니?”
“…일종의 징크스야. 이걸 입으면 집중력이 올라가거든.”
트럭이 학교 뒷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아간다. 나채영은 협상을 원하는 모양이지만, 성유진의 직감으로는 잘될 것 같지 않았다. 성유진은 머릿속으로 전투를 시뮬레이션했다.
나채영을 지키면서 싸워야 한다. 적들을 섬멸하는 것보다 도망치는 걸 우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무장이 권총 1개, 티타늄 칼. 혹시 몰라 트럭 뒤쪽에 준비해둔 소총 2개.’
유감스럽게도 폭탄 종류는 없었다. 나채영이 아직 연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류탄이라도 있으면 도움이 될 테지만… 없는 걸 어떻게 할 수 없다.
인천 폐공사장 쪽으로 향한다. 주변의 인기척이 확 사라졌다. 불빛도 별로 없어서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범죄가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의 동네다.
“…잠깐 조사해봤는데 이 동네에서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해. 경찰은 범죄조직 간의 항쟁이었다고 발표했지만, 사람들은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하더라. 듣기로는 괴물이 있다던가.”
“흔히 있는 괴담인가.”
“괴담이 아니야. 일종의 징조야. 그 징조는 2000년, 첫 번째 운석, 시작의 붉은 운석이 떨어지고 난 뒤부터 꾸준히 있어 왔어.”
“그것도 게임, 이터널 에덴의 설정이야?”
“맞아. 이후에 운석은 계속….”
계속 이어질 것 같던 대화는 나채영이 입을 꾹 다무는 것으로 끝났다. 그녀의 시선에 약속한 폐공사장 건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두컴컴해야 할 폐공사장에는 빛이 몇 개 보인다. 또한 그 주위 길목에는 자동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충 봐도 10개가 넘는다. 최소 50명 이상의 조폭이 주위에 있다고 봐야 했다.
성유진은 트럭의 속도를 줄이며 나채영에게 물었다.
“괜찮아?”
“…문제없어.”
트럭을 멈춰 세운다. 퇴로를 가정하면 트럭을 버리는 쪽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트럭의 앞으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어제 우리에게 초대장을 가져왔던 남자, 오성상이었다.
“오셨군요. 보스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안내할 테니 따라오십시오.”
성유진은 눈동자를 굴렸다. 다른 조폭들은 보이지 않는다.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기감을 퍼뜨리듯이 미세 전류를 퍼뜨려볼까? 가능할 것 같은데…. 아니지. 그냥 힘을 아껴야겠다. 어차피 숨어 있는 게 확실하니까. 협상이 파투 날 때까지는 기습해오지 않겠지.’
공사장은 짓다 말았다. 벽이 있긴 했으나 조잡했다. 그마저도 절반 이상이 벽이 없었다. 뼈대가 되는 철근들이 굵고 단단해서 어지간해선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5층으로 올라갔다. 가장 높은 층은 아니었으나,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선선했다.
5층의 중앙.
푹신해 보이는 검은색 소파 의자에 앉아 있는 정장 여자와 그 옆에 서 있는 덩치 큰 남자가 보인다. 여자의 앞엔 탁자가 놓여 있었고, 똑같은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2m에 달하는 키를 가진 남자는 인상을 확 찌푸리고 있었다. 상체 벌크업을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상체와 하체의 밸런스가 고릴라와 비슷했다. 머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스포츠머리다.
성유진은 나채영과 함께 걸어가면서 태왕의 보스를 주시했다. 가르마를 탄 볼륨 있는 흑갈색 단발머리의 여자다. 나이는 겉모습만 봤을 땐 30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기본적으로 미인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흉이 많았다. 오른쪽 입이 볼까지 찢어져 있고 목에는 화상 자국이 있다. 왼쪽 뺨에는 칼자국이 길쭉하게 그어져 있었는데 왼쪽 눈에는 검은색 안대를 찼다. 뺨과 함께 눈까지 베인 것이다.
그녀는 왼손으로 담배를 피고 있었다. 성유진은 냄새를 통해 그게 대마초 궐련임을 알았다. 그녀의 왼손은 얼굴 이상으로 살벌했다. 온갖 흉터가 있었고, 유독 빨간 화상 흉터가 심했다. 왼쪽 새끼손가락은 없었다. 잘린 건지, 자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수라장을 해쳐나온 여자라는 거다.
“나 박사. 얼굴 한 번 보기 힘들군. 앉도록.”
“…이런 곳에서 보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내가 여기를 좋아해서.”
나채영이 의자에 앉았다. 성유진은 바로 옆에 섰다. 오성상은 보스의 오른편에 섰다. 앞으로 있을 일이 기대된다는 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태왕의 구태희다. 나채영 박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 아래로 들어와라. 테크놀로지스트의 힘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아래로 들어갈 생각은 없어. 착취당하는 삶은 내 인생 계획에 없어.”
“착취가 아니다. 네가 일하는 대로 챙길 건 챙겨주마. 재물이면 재물, 권력이면 권력. 어느 것 하나 아쉽지 않게 지불해 주지.”
“그것들이 내가 원하는 거라고 생각해?”
“뭘 원하는 거지?”
“……거래를 원해. 당신이 필요한 물건들을 싼값에 제공하겠어. 그게 내가 원하는 당신과의 관계야.”
“아. 그러니까 나와 대등한 관계가 되고 싶으시다? 거참, 박사라고 하더니 연구소에 박혀서 연구만 했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군. 내가 지금 말하는 게 거래나 제안으로 보이나?”
쿵.
나채영은 심장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이곳에 올 때부터 긴장한 상태였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식은땀은 흐르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뛴다. 여기까지 오면서 여러 가지 계획은 있었다. 하지만 폐공사장에 도착하고 난 순간부터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빌어먹을 심장이 너무 뛰어서 전신이 심장이 된 것 같았다.
‘차라리….’
그냥 엎드릴까?
그게 더 낫지 않을까? 태왕은 서울 최고의 조폭이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 최고의 조폭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조직에 들어가서 일하는 것. 다소 억압받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필요할 테니 안전은 보장되지 않을까.
‘…여기서 내가 끝까지 거부한다면.’
총알이 자신의 몸에 박힐 것이다. 아니, 아니. 그건 너무 관대한 상상이다. 자신은 플레이어. 사용할 데가 많다. 일부러 죽이지 않고 제압할 것이다. 그리고 끌려가서 납치되고 온갖 끔찍한 짓을 당할 수도 있었다.
‘아, 안 돼! 지금 그딴 걸 생각하면 안 돼!’
표정을.
무표정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얕보이지 않는다. 무시당하지 않는다. 표정은 어떻게든 유지할 수 있었다. 그건 그녀가 평생을 해온 일이니까. 그러나 턱을 타고 땀방울이 뚝 떨어지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박사. 오래 사는 방법을 알려줄까? 자신의 주제를, 자신의 그릇을 알면 된다. 넌 관리자가 될 자질은 있다. 허나 사람을 이끄는 리더가, 지배자가 될 그릇은 아니야. 그 어중간한 마음가짐과 지배력으로 혼란과 죽음으로 가득 찰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
나채영은 반박할 수 없었다. 구태희는 정확히 자신을 봤다. 그 판단력이 놀라울 정도다.
나채영은 어렸을 때부터 무언가 주도해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연구원이 된 것도 부모님이 재능이 있으니 한 번 해보라는 말에 선택했다. 이터널 에덴 게임도 친구가 추천해서 했다. 다른 사람을 이끄는, 가장 높은 자리에서 책임을 지는 자리가 자신에게 성향에 맞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입술로 입술을 열었다.
구태희는 대마초 궐련을 바닥에 던지며 씩 웃었다. 나채영 박사. 까다로울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 별거 아니었다. 능력을 가진 일반인이었다. 쉽게 겁을 먹는다. 하지만 능력은 있고 나름의 결단력은 있는 것 같으니 잘 관리만 한다면 간부로서 크게 쓸만하다.
테크놀로지스트를 손에 넣었으니 다음 그림을 그린다. 오성상의 말에 따르면 테크놀로지스트는 자원을 이용해 첨단 무기를 제작할 수 있다. 연구를 통해 첨단 기술을 발전할 수 있고, 자원과 기술만 충분하다면 전투기와 탱크도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의 아래로 들어오면 연구부터 시키고 최대한 빠르게 기술을 발전시킨다. 탱크만 만들 수 있게 되어도 어마어마한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야, 고릴라.”
돌연, 나채영의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성유진이 입을 열었다. 짜증이 잔뜩 담긴 시선으로 구태희 오른편에 서 있는 덩치, 지한무를 노려본다.
“아까부터 내 여자한테 뭔 개짓거리를 하는 거냐? 뒈지고 싶어 환장했냐?”
지한무는 얌전히 욕을 받을 정도로 착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인상을 쓰며 성유진에게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닥쳐라. 네놈 따위가 함부로 입을 열 곳이 아니다. 개새끼면 개새끼답-”
말은 강제로 끊겼다.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칼이 지한무의 목에 푹 박힌 것이다. 지한무가 팔다리를 움직이기도 전에 칼은 그대로 아래로 그려졌다. 피가 튀고 내장이 쏟아지며 무게 중심을 잃은 거구가 앞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칼은 지한무의 목을 베었다.
지한무의 머리는 빙글빙글 허공을 돌며 바닥에 떨어져 나채영의 발치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