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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1858화 (1,638/2,000)

< 1858화 > 1858. 이터널 에덴

“…….”

그곳에 있던 모두가 침묵했다.

가장 놀란 건 나채영과 오성상이었고, 구태희는 놀랄지언정 냉정히 상황을 파악했다.

‘안 보였다.’

처음 칼로 지한무의 목을 찌를 땐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보지 못했다. 두 번째 목을 벨 때는 칼이 너무 빨라서 보지 못했다.

아무리 좋은 칼이라도 사람의 목을 베는 일에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하물며 제압되지 않은 상대를 단번에 참수한다? 검술에 통달한 달인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구태희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채영은 아이러니하게도 지한무가 죽자마자 몸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물론 여전히 심장은 뛰고, 팔다리는 덜덜 떨렸으나 최소한 아까보다 숨쉬기 편해졌다.

그리고 지한무의 머리가 발치에 닿는 순간, 플레이어만 볼 수 있는 정보가 나타났다.

「개체명: 지한무

잠재력: ★★★

각성 능력: 위압.

특성: 우직함, 전사.」

‘조기 각성자!’

잠재력은 3성. 특성인 우직함과 전사는 상위 특성이었다. 특히 전사는 최상위 특성 중 하나였다. 게임에서는 이 특성을 가진 NPC는 열렬히 환영받는다. 현질을 해서라도 갖고 싶은 NPC다.

‘능력은 위압. …아마 우리가 들어왔을 때부터 위압을 사용한 거겠지.’

일종의 정신계 능력이다.

‘…너무 안일했어. 조기 각성자가 이쪽에만 있을 리 없잖아.’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할 때, 성유진은 바닥에 떨어진 지한무의 머리를 발로 찼다. 축구공처럼 튀어 나간 머리통은 오성상에게 향했다. 오성상이 기겁하며 옆으로 피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뭐 하는 짓이긴. 협상판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판을 짜려고 하잖아. 보면 모르냐? 대가리가 텅텅 비었군.”

“보스! 이 새끼를 죽이게 허락해주십시오!”

가만히 앉아 있던 구태희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저벅저벅.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사방에서 다가오며 협상 테이블을 포위한다.

“그러니 내가 말하지 않았소. 나 박사는 둘째치고 저 새끼는 일찌감치 죽여야 한다니까.”

나타난 건 고산파의 보스인 정고산이었다. 짧은 수염의 중년 남자인 그는 위협적으로 도끼를 흔들었다. 그를 비롯한 60명의 고사판 조폭들은 성유진을 향해 살의를 내비쳤다.

고산파는 행동 대장을 비롯한 조직원을 잃었다. 그 수만 30명이 넘었다. 당장 그 범인인 성유진을 죽이지 않는다면 체면이 서지 않고,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다.

“귀수(鬼手). 나 박사는 약속대로 그 쪽에게 넘기겠소. 대신 그 새끼는 우리가 죽이겠소. 저 새끼는 우리 애들이랑 그쪽 부하를 죽였소. 이대로 내버려 두면 우리가 뭐가 되겠소?”

“…마음대로 해라. 단, 나 박사는 건들지 마라.”

“받은 게 있으니 그 정도 분별은 하겠소. 가자, 얘들아. 저 씹새끼를 토막 낼 시간이 왔다!”

나채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대는 17명도 아닌 60명이 넘었다. 아무리 성유진이라 하더라도 감당하기 힘든 숫자다. 나채영이 다급히 입을 열려고 했다. 태왕으로 들어가겠다고. 대신 성유진을 살려달라고. 성유진의 실력을 봤으니 살려줄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성유진이 그녀의 앞에 손을 내밀어 제지했다. 칼잡이의 손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고운 손이었다. 나채영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좆밥들은 꼭 수만 많으면 된다고 생각한다니까. 좆밥은 아무리 많아도 좆밥인데 말이야.”

“미친 새끼라 그런지 상황 판단도 안 되나? 곱게 뒈질 생각은 하지 마라. 네 가족까지 찾아내 모조리 죽여버린 뒤에 너도 토막 내서 돼지 먹이로 던져주마!”

농축된 살기를 내뱉은 고산파의 보스, 정고산은 이어 주머니에서 붉은 알약을 꺼냈다. 비스터 I 이다.

“저 미친 새끼도 각성자다. 우리가 많다고 방심하지 마라.”

“예. 형님!”

조폭들은 일제히 주머니에서 비스터 I을 꺼내 삼켰다. 미리 준비해둔 것이다. 성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실실 웃었다.

“병신들이. 니들만 도핑할 줄 아나? 약은 나도 잘 먹어.”

성유진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었다가 빼냈다. 그의 손에 비스터 I이 한 움큼 들어 있었다.

비스터 I은 만능 전투자극제가 아니다. 부작용이 있다. 한 번에 대량으로 먹으면 약효과 끝났을 때 혈관이 터진다.

‘회복이 알아서 하겠지.’

와그작, 와그작.

그의 입안에서 수십 개의 비스터 I가 부서진다. 그 광기 넘치는 모습에 일순간 전원이 압도되었다.

“미친 새끼….”

성유진은 앞으로 걸었다. 조폭들은 모두 권총을 가졌다. 도탄의 위험도 있으니 나채영의 옆에 있는 건 안 좋았다.

“쏴!!”

정고산의 명령이 떨어졌다. 조폭들이 일제히 성유진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뇌천류(雷天流) 전자기막(電磁氣幕).

총알은 성유진의 몸에 닿지 못했다. 파직거리는 전자기막에 막혀 위나 아래로 비껴갔다. 그것도 아니면 딱 멈추더니 그대로 떨어졌다.

성유진이 그들을 향해 뛰었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5m를 넘었다. 약물은 그에게 초인적인 힘과 체력을 안겨주었다. 그는 모여있는 조폭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한 번 휘두르니 조폭의 몸이 반으로 갈라진다. 이어서 의미 없는 칼질로 조폭의 몸을 토막 냈다. 그것은 여유에서 나오는 잔혹성이었다.

“총 쏘지 마! 아군이 맞는다! 어차피 저 새끼에겐 총알 안 통한다! 연장 들어!!”

망치, 회칼, 빠루, 철사를 휘감은 방망이 등등 보기에도 살벌한 무기들을 꺼내 들었다. 약에 의해 두려움 대신 흥분을 갖춘 조폭들은 거침없이 성유진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흉악한 연장들이 성유진의 몸에 닿는 일은 없었다.

“느리다고 병신들아.”

뇌천류의 전류가 그의 전신을 타고 흐르며 그의 시간을 가속시킨다. [가속]을 사용했을 때처럼 극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조폭들의 움직임 정도는 훤히 보였다.

반대로 조폭들은 성유진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어쩌다 운이 좋아 기회를 포착하더라도 기술이란 격차가 존재했다.

성유진은 단순 무식하게 칼을 휘두르지만, 그가 겪은 막대한 전투 경험이 무의식에 쌓여있었으니까. 굳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몸이 멋대로 최적의 검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하하하하하하!”

성유진은 웃으며 돌아다녔다. 한 놈을 베면 저 끝에 있는 놈에게 달려가 베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아까 죽인 놈 옆에 있던 놈의 몸을 베어 죽였다. 비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게 재밌으니까.

“이 미친…”

정고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약을 먹었는데도 두려움이 느껴졌다.

60명이 넘던 조폭들은 어느새 그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있었다. 바닥에는 토막 난 시체가 가득했다. 온전한 시체를 찾기 힘들었다. 괴물이 사람의 시체 위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오냐, 씨발. 누가 먼저 뒈지는지 한 번 해보자!”

정고산은 품 안에서 비스터 I를 꺼냈다. 10개가 넘는 알약을 그대로 입안에 집어넣었다.

근육 전체에 초인적인 힘이 깃든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힘에 대한 만족감이 차지한다.

‘이런 느낌이었나. 저 새끼가 날뛰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 힘이란 그냥 기분 좋다!’

동체 시력도 늘어났는지 성유진의 움직임이 보였다.

정고산은 부하 5명과 함께 성유진에게 뛰었다. 5명은 제물이다. 부하들이 몸 바쳐 빈틈을 만들면 자신이 손도끼로 놈을 죽인다. 놈을 죽이기 위한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뭐가 각성자냐! 난 고산파의 정고산이다! 죽여주마!!!”

선이 번쩍였다.

푸른 선.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과도 같은 그 선이 조폭 5명과 정고산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어?”

정고산의 시야가 점점 아래로 미끄러진다. 쿵. 육중한 뭔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정고산의 눈에 보인 것은 바닥 위에 우뚝 서 있는 하체 6개였다.

죽었다.

모두가 죽었다.

정고산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성유진이 다가와 그 머리를 밟아 터트렸다.

“3분 정도인가. 뭐, 나쁘지 않군.”

성유진은 획 고개를 돌렸다. 아직 죽여야 할 놈이 있었다. 눈이 마주친 오성상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 이 괴물 새끼가…!”

성유진이 움직인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직감한 오성상은 능력을 사용했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10개로 늘어났다. 본체와 완전히 똑같은 분신을 만드는 능력이 최대로 발휘된다.

“죽여버려!!”

9체의 분신이 품에서 칼을 꺼내 일제히 성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총알이 안 통하는 건 방금 봐서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분신들은 조폭들보다 훨씬 강하고 빨랐다.

“아까 말 안 했나? 좆밥은 아무리 있어도 좆밥이라고.”

뇌천류(雷天流) 뇌광(雷光).

사방에서 일제히 좁혀오는 분신을 한 번의 휘두름에 전부 베어내고, 앞으로 나아가 오성상의 목을 잡고 복부에 칼을 쑤셔 넣는다.

“사, 살려… 끄아아아아악!”

칼자루를 잡고 비틀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오성상이 비명을 내지른다.

성유진은 칼을 빼내고 오성상을 바닥에 내던졌다. 일부러 끝장을 내지 않았다. 어차피 몇 분 내로 죽을 테니까.

“…….”

태왕의 보스는 여전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성유진은 구태희에게 다가가다가 눈과 코, 귀, 입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

“…….”

싸늘한 침묵. 구태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나채영의 눈동자는 미친 듯이 흔들렸다. 나채영은 일어나고 싶었으나, 일어날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저런 괴물을 키우고 있었나. 솔직히 말하지. 가슴이 서늘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거의 1년 만이다. 나 박사, 난 당신에게 기회를 줬고, 그 기회를 걷어찬 건 당신이다. 뭐, 앞으로 말만 잘 듣는다면 끔찍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도록.”

“어, 어떻게 침착할 수 있는 거야? 당신 부하까지 죽었는데!”

“부하? 아, 그 신입들? 에스퍼랑 조기 각성자라 데려왔을 뿐이다. 내가 믿는 놈들은 지금 정부의 눈을 가린다고 바빠서 말이야. 60명을 혼자서 썰어버리는 괴물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이렇게 오지 않았을 거다. 자, 슬슬….”

의자의 팔걸이를 잡고 몸을 일으키려던 구태희가 얼어붙었다. 바닥에 쓰러진 성유진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스터 I을 수십 알 처먹었다. 온몸의 혈관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아. 분명 뇌의 혈관도 터졌을 텐데…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일어난 성유진은 몸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웃었다.

“협상을 해볼까. 아까와는 좀 달라지겠만 말이야.”

그는 나채영에게 다가갔다. 나채영의 허리를 잡아 일으키고는 그대로 나채영의 의자에 앉았다.

“뭐, 뭐 하는 거야?!”

“한 시간. 지금 쓸 거거든.”

성유진은 그대로 나채영을 자기 허벅지 위에 앉혔고 끌어당겼다. 그녀의 하얀 가운이 새빨갛게 물들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읏….”

성유진의 손은 나채영의 상의 안으로 들어가 브래지어를 잡아당겨 아래로 내리고는 유방을 꽉 움켜쥐었다. 나채영이 눈을 찌푸리며 노려봤으나 성유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채영은 당황했다. 아까부터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차갑게만 느껴졌던 심장이 열기를 되찾고 머리가 도리어 냉정해진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역시 채영이 냄새랑 가슴이 최고야.”

“…너, 몸은 괜찮은 거야?”

“보면 몰라? 완벽하지.”

성유진이 웃으며 나채영에게 입을 맞췄다.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폭풍처럼 거친 키스였다. 나채영은 저항할 수 없었다. 성유진이 시간을 사용한 이상, 지금부터 1시간 동안 자신은 그의 여자였으니까.

혀가 뒤엉키는 것도 잠시, 곧 그들은 입을 뗐다. 입술 사이로 미련을 놓지 못한 타액이 쭉 늘어지다가 끊겼다.

달콤한 혀와 타액을 맛본 성유진은 흥분을 털어내듯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맞은 편에 안장 있는 구태희를 쳐다본다.

“그 뭐였더라. 지배자의 그릇? 그게 나한테 있나?”

“…….”

“똑똑하네. 평가질을 했으면 죽여버렸을 거다.”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근데 왜 내 말을 씹는 거냐?”

성유진이 칼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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