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0화 > 1860. 이터널 에덴
다음날.
태왕의 보스인 구태희는 오후 시간이 되어 본사에 출근했다. 원래 있던 강남 본사가 아니었다. 곧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게 된다는 걸 알게 된 후로 긴급히 본사를 용산으로 옮겼다. 강남에 있는 본사는 좀비떼를 막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구태희는 비어있는 사무실을 확인하고 습관적으로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고요히 흐르는 한강이 보인다. 그녀는 높은 것에서 한강을 보는 걸 좋아했다. 이 광경은 자신이 치열하게 살아온, 승리의 업적이었으니까.
“한강뷰라니…. 정말 성공하셨군요, 사장님.”
깔끔한, 흠잡을 곳이 없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구태희가 고개를 돌렸다. 한 여자가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의 여인이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바른 자세로 앉아 있다. 그야말로 교본과도 같은 자세다. 그녀의 손은 섬섬옥수였다. 피부는 투명할 정도로 깨끗했다.
“…안기부의 4차장님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실 줄이야.”
“한강뷰 사무실이 누추하다뇨. 혹시 기만인가요?”
나긋한 목소리로 묻는다. 구태희는 오히려 경계했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본사의 보안은 최고등급이다. 아무리 너라도 쉽게 들어올 수 없다. 아니, 아까까지만 해도 이 사무실에는 나밖에 없었다. …설마 능력을 각성한 거냐?”
“역시 눈치가 빠르시네요. 네. 능력을 각성했습니다. 운이 좋았죠.”
“…….”
“무슨 능력인지 궁금하지 않으시나요?”
“말해 줄 생각도 없지 않나.”
“국가 기밀이라서요.”
구태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상대하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그 빌어먹을 하회탈은 뭐지?”
“조기 각성자 문제로 안동에 내려갔다가 막 올라온 참이죠. 이건 기념품입니다. 드릴까요?”
이연희가 하회탈을 내린다. 드러난 건 청초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언제봐도 처녀 귀신 같은 낯짝이군.”
“제 얼굴을 보고 그렇게 부르는 건 태희 씨뿐이에요. 제가 처녀이긴 해도 귀신은 아닌데 말이죠.”
“아, 그래. 처녀 귀신에게 너무했군. 이제 슬슬 용건이나 말해주고 꺼져주면 안 되나?”
“오늘 서울로 올라오니 강서구의 주인이 바뀌었더군요.”
“어젯밤에 약간의 항쟁이 있었지. 강서구는 걱정마라.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일반인은 건들지 않을 테니.”
“당연한 걸 특별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제가 궁금한 건 태왕과 동맹인 고산파를 왜 지금 처리했냐는 거죠. 둘 사이는 나쁘지 않았잖아요? 갑자기 공격한 이유가 뭔가요?”
“할만해서 공격했다. 게다가 최근 고산파가 도를 넘기 시작했으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군요.”
“…이상한데. 고작 그딴 걸 묻겠다고 날 만나러 왔다? 그 정도 정보는 안기부가 당연히 알고 있지 않나?”
“안기부는 유레없을 정도로 바빠요. 그날이 오면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대비해야 하고, 각성자와 플레이어를 확보한 일본도 주시해야 하죠. 그나마 중국은 폭동이 일어날 것같으니 편하긴 한데… 러시아가 변수죠. 미국과 유럽 쪽도 무시해선 안 되고요. 정말이지 몸이 10개면 좋겠다니까요.”
몸이 10개. 오성상을 암시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내뱉은 말인가?
‘상대는 이연희다. 플레이어인 오성상를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커. 문제는 오성상이 죽었다는 건데….’
나채영과 성유진에 관해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기껏 끈을 만들어놨는데 고스란히 이연희에게 넘길까 보냐.
‘이년이 직접 안동으로 내려가서 일을 처리할 정도면 안기부가 바쁜 건 사실일 터다. 그러니 적당히 연막 치면 숨길 수 있다.’
우선 이 대화주제부터 넘기기로 했다. 구태희는 하나밖에 없는 눈을 날카롭게 치뜨며 이연희에게 질문했다.
“…한국을 비롯한 각국의 정상들은 곧 일어날 좀비 사태를 알고 있다. 근데 왜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 거지? 각국 정상 사이에 어떤 협약이 오간 거냐?”
“국가 기밀이에요. 하지만 태희 씨는 이미 짐작하고 있을 테니 말해도 상관없겠죠. 권력자는 책임을 싫어해요.”
“국민들도 결국 알게 될 거다. 정부가 이미 이 사태를 알고 있었음을. 그리고 책임을 물으려 하겠지.”
“태희 씨는 누군가가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고 말하면 믿을 건가요?”
“…….”
“국가가 그 말을 믿어야 하나요? 국민들에게 내일 세상이 멸망하니 남은 시간을 즐기라고 해야 하나요? 한국은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어요. 아, 재미없는 말이었죠? 태희 씨는 한국인이 아니니까요.”
“…난 한국인이다. 한국 국적도 가지고 있다.”
“겉으로는 그렇죠. 하지만 일본인의 피가 섞여 있잖아요? 태희 씨는 명예 한국인이에요.”
“미친년.”
구태희는 피로가 몰려오는 걸 느꼈다. 자기가 정상인이라고 생각하는 미친년을 상대하는 건 싸우는 것보다 훨씬 피곤했다.
“그런데 가슴의 상처는 어떻게 된 건가요?”
“……무슨 소리지?”
“가슴에 베인 상처가 있으시네요. 최근에 난 상처 같은데… 대마초에 찌든 폐를 확인하려고 자해하신 건 아닐 테니… 싸웠나요?”
“어떻게 알았지? 그게 네 능력인가?”
구태희는 시선을 내려 입고 있는 옷을 확인했다. 평소처럼 정장을 입고 그 위에 재킷을 걸쳤다. 겉으로 봐서는 당연히 상처 같은 건 안 보인다.
“그 귀수가 상처를 입었다라… 상처를 입힌 자가 누군지 정말 궁금하네요”
“정고산을 처리할 때 잠깐 방심했을 뿐이다.”
“정고산 따위가 말이죠.”
“…비스터 I 의 관해서도 할 말이 있다. 그거 한 번에 수십 개를 먹으면 어떻게 되지?”
노골적인 주제 돌리기였다. 이연희는 알면서도 당해줬다.
“순간적으로 초월적인 힘을 얻겠죠. 개인 차이는 있겠지만… 1분 정도는 초인이 될 거예요. 그 후에는 온몸의 혈관이 펑 하고 터질 테지만요.”
“꼭 직접 본 것처럼 확신하고 있군. 실험이라도 했나?”
“글쎄요. 저는 그저 보고받아서 본 것뿐이라서요.”
이연희는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이윽고 이연희는 책상 위에 서류 뭉치를 올렸다. 구태희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구태희가 서류 뭉치를 들었다. 총 13장. 그 한 장, 한 장에는 10명이 넘는 이름과 그들의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다.
대부분 한국인인 척하는 외국인이었다. 북한 간첩, 중국 공작원, 일본 요원, 미국 정보꾼, 출신 미상의 킬러, 한국 매국노 등등.
“다음 주에 처리하세요.”
“…대가는?”
“고산파 일은 눈감아 드리죠. 부족하면 알아서 챙기세요.”
구태희는 한 번 더 서류를 살피고 다시 책상에 올렸다. 이연희에게 질문을 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는 텅 비어있었다.
“빌어먹을 년이….”
도발을 위해 일부러 욕설을 내뱉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사무실 문은 닫혀 있다. 열린 흔적이 없었다. 창문도 마찬가지. 완벽한 밀실이었다. 애초에 빠져나가는 기척이 있었다면 자신이 못 알아차릴 리가 없다.
“귀신 같은 년. 꼭 지 같은 능력을 각성했군.”
세 번째. 서류를 살핀다. 여기에 적혀 있는 놈들 대부분 국가와 관련된 놈들이다. 이놈들을 모두 처리하면 후폭풍이 올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처리를 명령한다? 토사구팽을 할 생각인가?
‘다음 주에 처리하라고 했다. 이번 좀비 사태를 핑계로 정리하려는 모양이군.’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좀비 바이러스가 발병하면 다른 국가들도 이런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어떤 의미로 첩자들을 솎아내기엔 최적인 타이밍이라 할 수 있었다.
***
D-13.
전쟁 연구소 습격 전날이었다.
그동안 특별한 일은 딱히 없었다. 태왕의 보스인 구태희는 약속을 지켰다. 돈과 식량을 주고 사람까지 보내 성악초등학교를 수리하고 개조해줬다. 뭐, 어디까지 기본적인 뼈대만 그렇다. 성악초등학교는 결국 나채영의 테크놀로지스트 능력으로 천천히 요새화가 진행될 테니까.
발전기는 원활히 돌아가고, 기숙사 내부는 감금실로 개조해 감옥으로 만들었다. 강당에는 운동 기구들이 잔뜩 들어가 있었으며 급식실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성악초등학교는 500명 정도는 무리 없이 수용 가능한 쉘터가 됐다. 물론 핵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쉘터 수준은 절대 아니지만.
‘좀비 따위는 몇십, 몇백 마리가 몰려와도 안전하지.’
나는 다시 운동에 집중했다. 지난 시간 동안 할 일이 없으면 나채영을 놀리거나 운동에 전념했다. 운동의 효과는 있었다. 적어도 처음 이 세계에 왔던 것보다 강해진 건 확실했다.
“유진. 완성됐어.”
나채영이 나를 불렀다. 그녀가 내게 건넨 것은 검은색 옷이었다. 물론 평범한 옷은 아니다. 일종의 방어구라 할 수 있었다. 나는 나채영의 바로 앞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내 몸에 익숙해진 나채영은 무표정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무겁네.”
“방탄, 방검 기능이 있는 옷이니까. 태왕이 지원해준 자원이 없었다면 기간 내로 못 만들었을 거야.”
“좋아. 방어구도 갖춰졌으니 내일 전쟁 연구소를 습격하면 되겠군.”
“그 의견을 꺼낸 내가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연구소 습격을 해야 할까? 전투용 AI 자료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당장 생존하는 건 어렵지 않아. 무엇보다 네 실력이라면 전투용 AI보다 훨씬 위니까.”
“할 수 있는 건 해야지. 이미 계획은 다 짰잖아?”
“……그래.”
“그 연구소에 뭐가 있는지 자세히 좀 말해봐.”
“나도 몰라. 게임인 이터널 에덴은 로그 라이크 요소가 있으니까. 바뀌는 것과 바뀌지 않는 것이 있어.”
“운빨좆망겜이야?”
“…틀린 말은 아니야. 게임 한 판 할 때마다 NPC나 기업 같은 게 다 달라지니까. 다만, 바뀌지 않는 게 몇 가지 있어. 대표적인 게 좀비 사태 같은 대규모 이벤트. 그리고 한국 전쟁 무기 연구소 같은 특수 장소들. 한국 전쟁 연구소에는 특수 몬스터가 필수적으로 존재해. 각성자, 실험체, 군인 등등…. 초반에는 공략하기 힘든 곳이야.”
나채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봤자 나는 전혀 쫄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기대된다. 운동만 하다 보니 여러 가지로 몸이 굳어진 느낌이라서.
“너무 걱정하지 마. 내 실력 알잖아. 여차하면 태왕 쪽에서 구매한 비스터 I을 복용하면 돼.”
“약물에 의존하는 건 안 좋아.”
“설마 내가 약물 중독자라도 될까 봐?”
“그게 아니라, 약물을 계속 복용하면 약물 내성 특성이 생길 수 있어. 보통 약물 중독 특성이 생기지만… 넌 절대정신이 있으니 중독은 논외야. 약물 내성 특성은 같은 약물을 복용할 때마다 빠르게 내성이 생기고 나중에는 특정 약물에 면역이 생겨. 그러니 중요할 때가 아니면 약물은 최대한 자제해.”
“그런 것도 있었나. 아쉽네.”
나는 아쉬움에 머리를 긁적였다. 비스터 I 수십 개를 복용하고 얻었던 초월적인 힘. 그 힘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비스터 I을 털어 넣고 싶었다. 혈관이 터진다는 부작용이 있지만, 내겐 회복이 있으니 약간의 고통만 참으면 된다.
‘약물 내성 특성이 있는 건 상정 밖이었어. 어쩔 수 없지. 채영이의 말대로 중요할 때만 약을 먹어야겠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5층으로 올라갔다. 개조된 5층은 숙소로 바뀌어 있었다. 작은 방이 따다닥 붙어 있다. 물론 내 방은 방 3개를 합친 것보다 더 컸다. 성악초등학교의 주인인 나의 특권이다.
내 방에 들어간다. 옷장과 침대가 있었다. 킹사이즈 침대 위에는 나채영이 알몸으로 앉아 있었다. 내가 말했던 대로 알몸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 기특함에 미소가 지어진다.
나채영은 나를 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평소와 다른 반응에 멈칫했다. 그녀는 이어서 내 쪽으로 몸을 돌리고 다리를 벌렸다. 토실하면서도 새하얀 허벅지가 벌어지며 음부가 노출된다. 나채영은 짙은 음모 아래의 분홍색 보지를 손가락으로 벌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은…, 네 자지로 내 보지를 따먹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