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4화 > 1864. 이터널 에덴
“나 박사!”
다시 한번 나채영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내 얼굴은 굳어졌다. 나채영이 당했나? 아니,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사이렌이 울리고 무전기가 먹통이 된 것이다. 어쩌면 그 이전에 무전기가 먹통이 됐거나.
‘일이 잘 풀리는가 싶었는데… 결국 걸렸나.’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사이렌 소리를 요란스럽게 퍼뜨렸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천장을 노려봤다. 카메라는 정확히 날 향해 있었다.
바로 도망칠까 하다가 옆 기계에 꽂혀 있는 칩이 보였다. 칩은 여전히 노란색으로 점멸을 반복하고 있다.
‘1분이면 된다고 했던가.’
1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었다. 사실 지금 움직여도 늦었다. 사이렌을 울린 순간부터 놈들은 이미 날 죽이거나, 생포할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복도 쪽이 소란스럽다. 안 봐도 뻔하다. 아직 남아 있는 연구원들이 헐레벌떡 도망치고 있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아니야. 내가 어그로를 끌어야 나채영이 안전해. 최대한 시선을 끌어야 해.’
그러니 거만하게 앉아서 카메라를 쳐다봤다. 물론 내 얼굴이나 표정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난 복면을 쓰고 있으니까.
-어디 소속이지?
사이렌 소리가 사라지고 대뜸 중년 남자 목소리가 내게 물었다.
카메라를 향해 중지를 세워줬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아니지. 국가 기관이 개입했다고 하기엔 너무 무식한 방법이군.
30초 정도 남았나?
머릿속으로 계획을 짠다.
‘날 막는 놈들은 모조리 죽인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아, 답은 알고 있다. 플레이어겠지. 이 세상이 게임이라며 나타난 미친놈들! 플레이어들은 각자 클래스를 가진다지? 넌 보나 마나 에스퍼겠지. 그렇지? 그게 아니고선 이 상황이 말이 안 되지. 전투 AI를 얻어서 다른 국가에 팔려는 목적이었겠지. 하지만 그렇겐 안 될 거다. 우리 연구소의 수호자이자, 최정예 특수부대원들이 네게 가고 있으니까!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꽤 길었다.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솔직히 별생각 없었다.
‘그래도 말투는 좀 짜증 나는군. 도망치는 김에 통제실에 들려서 죽여버릴까.’
-항복해라.
그게 본론이었다.
나채영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내가 놈이었다면 동료인 나채영을 언급했을 것이다. 그게 더 압박을 줄 수 있으니까. 다시 말해 그녀는 아직 걸리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최소한의 대우는 해주겠다고 약속하마. 이 세상에 300명 밖에 없는 플레이어는 연구 가치가 높지. 특히 에스퍼. 그 초능력의 원인만 알아낼 수만 있다면 인류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노랗게 점멸하던 빛은 파란색으로 변했다.
1분은 훨씬 이전에 지났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카메라에 칼을 휘둘렀다. 카메라가 부서져 땅으로 떨어졌다.
-후회할 거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끝까지 무시하며 기계에 꽂았던 칩을 뽑아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남은 건 이 연구소를 벗어나는 것.
‘…느껴진다. 문밖에 8명. 총기로 무장한 병사들이겠지.’
최정예 특수부대 병사 8명으로 날 막겠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겨우 그 정도로 날 막을 수 있을 리가.
파지직.
칼에서 시퍼런 전류가 반짝거렸다가 사라졌다. 나는 문으로 손을 뻗었다.
***
이변을 감지한 나채영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무전기가 순식간에 먹통이 되었다. 갑자기 이럴 리는 없었다.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다행히 노트북에 떠 있는 화면들은 멀쩡했다. 감시 카메라 해킹도 들켰을 것이다. 그러나 연결은 끊기지 않았다.
‘역으로 해킹하려는 건가?’
그녀는 오늘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다. 지금 그녀가 쓰고 있는 노트북도 준비한 것 중 하나다. 방화벽은 쉽게 못 뚫을 것이고, 설령 노트북을 해킹하더라도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전무할 것이다.
‘아니야. 여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거야.’
3층과 5층에 있는 괴물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2층 중앙 통제실의 연구원들은 하나같이 바쁘게 돌아다닌다. 무장한 병사 8명은 성유진이 있는 지하 4층으로 뛰어가고 있다.
‘성유진. 이 녀석은 뭐 하고 있는 거야?’
기가 차게도 성유진은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이변을 눈치챘는데도 불구하고 초조한 기색은 전혀 없다. 오히려 지켜보고 있는 나채영이 더 초조하고 불안했다.
‘…지금이라도 나 혼자 도망칠까?’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 그녀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지웠다. 이 미친 계획을 제안하고 실행하게 된 것은 자신이었다. 성유진은 거부할 수 있음에도 단 한 번도 하지 말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서로의 시간을 쓰기로 거래했으니까? 성유진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에겐 자신 정도는 아무렇게나 죽일 수 있는 무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성유진은 자신을 배려해준 것이다.
나채영은 중앙 통제실 화면을 집중해서 쳐다봤다. 아까부터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성유진을 발견해서만은 아니다. 다른 뭔가가 있다.
‘……성유진이 죽인 사람 중에서 중요 인물이 있었다거나?’
아니, 중요한 건 지금 그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저쪽에 마냥 유리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유진의 힘은 며칠 전에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라면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나채영은 무전기를 손에 꽉 쥐며 모니터를 바라봤다. 자신이 연구소로 들어가는 것은 미친 짓이다. 성유진을 돕더라도 여기서 도와야 했다.
‘저번처럼 보여줘, 넌 미친놈이잖아.’
***
“후회할 거다.”
한국 전쟁 무기 연구소장 정현수는 새까만 모니터를 노려보며 마이크에 씹어뱉듯이 말했다.
“소장님! 지상 3층 윤 박사의 개인 사무실에서 시체를 확인했습니다!”
“몽키들이 발광합니다! 윤 박사의 정신 제어 능력이 해제됐습니다!”
“브레인디바우가 울부짖습니다! 난동을 부리기 일보 직전입니다!”
통제실의 연구원들이 하나같이 난리 치며 정현수에게 보고했다.
생물 병기 연구는 조기 각성자인 윤 박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윤 박사는 지성이 떨어지는 동물들을 지배하는 능력이 있었고, 그 능력 덕분에 아주 편하게 생물 병기를 연구할 수 있었다. 윤 박사가 죽으면서 그 능력도 풀렸는지 생물 병기들이 날뛰고 있다.
특히 5층의 괴물, 브레인디바우가 또 난동을 부릴 조짐을 보이는 건 매우 좋지 않았다. 병사들은 침입자를 상대하느라 브레인디바우를 제압할 시간이 없다.
“마취가스 살포해.”
“마취가스 살포합니다!”
정현수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완전 무장한 8명의 최정에 병사들이 소총을 문에 겨누고 있다. 문이 열리고 복면을 쓴 침입자가 나오자마자 병사들은 방아쇠를 당겼다. 허나 총알은 침입자의 몸에 닿지 못했다. 총알이 막히거나, 옆으로 비켜나간 것이다. 초능력자를 상대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병사들이 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침입자의 일반적인 칼춤이 시작됐다.
좁은 통로라 8명의 병사는 수적 우위를 살리지 못했다. 침입자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병사부터 썰려 나갔다.
15초. 괴물도 제압하는 최정예 병사들이 전멸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그들이 무력하게 학살당한 이유는 하나였다. 상대방에게 총알이 통하지 않음.
“…방어막 능력자일까요?”
“일단 능력을 가진 건 확실합니다.”
“아까 보니 전기가 반짝인 것 같았는데… 전기 능력자가 아니겠습니까?”
“전기만으로 보호막 같은 걸 만들 수 있을 리가.”
“신체 능력도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었습니다. 최소 2개 이상의 능력을 가진 각성자군요. 연구할 가치가 있습니다.”
“씨발, 연구?! 지금 이 상황에서 그딴 말이 나옵니까?!”
정현수는 주변 소리를 무시하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침입자는 플레이어다. 클래스는 에스퍼. 초능력을 저렇게 잘 다룬다면 에스퍼말곤 없었다. 거기에 에스퍼니까 연구소를 습격할 미친 생각까지 하는 거다.
“보안 시스템 작동시켜.”
정현수가 말했다. 연구원들이 일제히 정현수를 바라봤다.
“소장님! 2소대가 헬기를 타고 지원 온답니다! 도착 예정 시간은 5분 뒤! 굳이 보안 시스템을 작동시켜야겠습니까?!”
“침입자가 여기 통제실로 올라올 수 있다. 1소대가 15초 만에 전멸했다. 놈이 올라오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지 않나? 놈에게 죽는 것보다 통제실에 갇히는 편이 더 좋다.”
“…아직 통제실에 들어오지 못한 연구원들이 20명 정도 있습니다. 보안시스템을 지금 가동하면 그들이 죽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놈이 통제실로 들어와 우리를 죽이는 건 둘째 치고, 전투 AI 자료를 빼앗기는 건 반드시 막아야 한다.”
“빌어먹을.”
보안시스템이 작동된다. 아직 실험단계에 불과한 전투 AI가 연구소 내의 모든 병기들을 제어하여 침입자를 배제할 것이다. 아직 실험단계인지라 적아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그 위력은 이미 검증되었다.
‘플레이어는 귀중한 연구 대상이다. 생포했으면 좋겠군.’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기대해본다.
이변이 일어났다. 원래라면 3층으로 올라와야 할 침입자는 도리어 5층으로 내려갔다. 이 연구소에서 유일하게 보안시스템이 없는 곳이다.
‘플레이어라면 지하 5층에 뭐가 있는지 모를 리 없다. 전투 AI 자료를 훔치러 온 게 그 증거. 대체 무슨 꿍꿍이지?’
***
병사 8명을 썰어 죽인 나는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곧장 3층을 지나 2층 통제실로 들어가 건방진 소리를 지껄인 놈들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계단을 보니 머리가 냉정해졌다. 통제실에서 멋대로 지껄인 놈은 마음에 안 들지만, 지금 중요한 건 생존이었다.
‘어떻게 연구소를 빠져나간다고 하자. 하지만 그 뒤는? 지원 병력을 불렀을 테니 군대가 추격하겠지? 이 일대에 아무것도 없어. 군대가 본격적으로 투입되면 도망치기도 어려워. 하물며 나채영도 챙겨야 하니까.’
그러니 나와 나채영이 쉽게 도망칠 방법이 필요하다. 마침 그 방법이 아래층에 있었다. 나 이상으로 어그로를 끌어줄 놈이.
‘뭐 하는 놈인지 궁금했는데 한 번 낯짝이나 봐야겠군.’
나는 지하 5층으로 걸어갔다.
-무슨 속셈이냐?!
스피커를 통해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아까처럼 카메라에 중지를 세우고 아래로 내려갔다.
5층의 철문은 그 어떤 것보다 크고 단단했다. 카드키를 댔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흐흐. 멍청하긴. 카드키만으로는 열 수 없다. 통제실의 인증이 없는 한 그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좀 닥치면 안 되나.”
말해봤자 어차피 못 들을 것이다. 내 입은 복면에 가려져 있어 입모양도 볼 수 없고, 여긴 스피커밖에 없으니까.
나는 손을 뻗어 철문의 잠금장치를 잡았다.
파지지지지직!
뇌전을 일으킨다. 컴퓨터처럼 복잡한 기계면 모를까. 문 잠금처럼 간단한 구조라면 뇌전을 이용해 문을 열 수 있다.
철컥!
5층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