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5화 > 1865. 이터널 에덴
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것은 피투성이의 참혹한 현장이었다. 나는 피비린내에 눈살을 찌푸렸다. 피비린내 자체는 익숙한 냄새였다. 그러나 익숙하다고 해서 그게 좋은 냄새라는 뜻은 아니었다.
머리 없는 동물의 사체가 있었다. 나는 그게 긴팔원숭이의 시체임을 알았다. 머리통이 없긴 하지만 이름 그대로 털북숭이 몸에 최대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긴팔이 있었으니까.
‘괴물은… 저기 있군.’
이 방의 끝에 괴물이 누워 있었다. 나는 괴물을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위험해서 이런 지하에 처박아 뒀나 싶었는데,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애벌레였다. 물론 그 크기가 좀 크긴 했다. 높이만 3m에 무게는 최소 1톤은 나갈 것 같으니까. 몸체는 새하얗고 머리 부분에는 사람 얼굴이 붙어있다.
‘뭐, 좆같이 생기긴 했군.’
애벌레 자체가 징그러운데 그 크기가 수천, 수만 배다. 게다가 사람 머리는 창백하고 홀쭉한 중년 남성의 것이다. 당연히 보기에 좋지 않았다.
‘너무 커.’
덩치가 너무 컸다. 여기 방도 크니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요한 건 괴물을 문밖으로 데려갈 수 없다는 거다. 놈의 덩치가 문보다 컸다.
‘밖으로 데려가는 건 불가능하겠군.’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냥 여기를 나가면 된다. 근데 놈을 보고 난 기분이 나빠졌다. 계획했던 일도 틀어졌다. 화풀이는 할 생각이다.
‘애벌레. 커다란 살덩이. 이 정도는 칼질 한 번이면 충분하지.’
그렇다고 가까이 가고 싶지는 않다. 애벌레의 피가 몸에 튀기라도 하면 기분이 더 더러워질 테니까.
파지지직!
칼날을 타고 전류가 흐른다. 칼을 치켜들어 괴물을 노려보며 휘두른다. 기력이 쭉 빠져나가는 것과 함께 번개를 휘감은 검기가 괴물에게 날아간다.
뇌천류(雷天流) 뇌섬(雷閃).
검기는 그대로 애벌레의 머리를 가르고 몸 안으로 파고들다가 사라졌다.
‘…사라졌다고?’
비록 지금 내 상태가 현실의 능력치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된다고 해도 검기는 검기다. 살덩어리 정도는 단번에 베어내고도 남는다.
‘괴물은 괴물이라는 건가. 그래도 머리를 포함해 몸의 3분의 1 이상 베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치명상이다.’
칼자루를 쥔 손에서 힘을 뺀 순간이었다. 괴물의 몸에서 철철 흘러나오던 피가 돌연 멈춘다. 머리를 포함해 갈라진 부위가 빠른 속도로 합쳐지고 원래의 형태로 돌아온다.
-하하! 고작 그 정도로 브레인디바우를 죽일 수 있을 것 같나?!
스피커에선 날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허나 거기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나는 긴장하며 괴물을 쳐다봤다.
“므, 으으으.”
어느새 몸을 완전히 회복한 괴물 애벌레가 꿈틀거린다. 괴물의 매끈한 살덩어리에서 촉수가 우수수 일어났다. 족히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촉수의 두께는 3cm 정도였고, 길이는 15cm로 보였다. 징그러워 보여도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머, 머어리이이….”
괴물의 머리가 입을 열며 목소리를 내뱉는다. 저건 가짜다. 진짜 머리가 아니다. 아까 검기가 머리를 반으로 갈랐을 때 머리 쪽에 뇌가 없었다.
“배고파아아아아!”
괴물이 움직인다. 저 온몸에 돋아난 촉수들은 거체를 움직이기 위한 다리였다. 촉수들이 지느러미처럼 움직이더니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성인이 달리는 것보다 조금 더 빠르다.
나는 칼을 움켜쥐고 뒤로 돌아 문밖으로 나갔다.
‘멍청하게 싸울 필요는 없지.’
놈의 장점이자 단점은 저 체격에 있다.
쾅!
미친 소 같은 돌진은 철문에 막혔다.
여긴 저 괴물을 연구하고 실험하기 위한 곳이다. 그러기 위해선 괴물을 가둬둘 우리가 필요하다. 살찐 괴물은 이 우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머어어리이이이이!”
문에 막힌 괴물의 머리가 입을 열었다. 딱 봐도 지능이 떨어져 있다.
‘이런 괴물이 뭐가 무섭다는 건지. 나채영도 너무 과장했어.’
괴물이 괴성을 지른다. 철문을 벗어나기 위해 힘을 주는 모양이지만, 살덩어리가 철문을 넘어서는 일은 없었다. 철문은 들썩이지도 않았다. 괴물이 내게 촉수를 뻗는다. 고작해야 15cm. 내 몸에 닿기에는 짧았다.
그리고 나는 1m가 넘는 칼을 들고 있다. 거리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크크크.”
나만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 난 이런 걸 매우 좋아한다.
칼을 휘둘렀다.
휘두를 때마다 괴물의 피가 튀었다. 촉수를 자르고, 살덩이를 가르며 혈관을 끊어낸다.
괴물은 죽지 않았다. 재생했다. 상관하지 않고 베었다.
“크크!”
“아, 아아아아아…!”
괴물이 고통에 신음했다.
-그만! 그만! 그렇게 자극을 줘선 안 된다!!
스피커의 목소리는 절규하듯 말했다. 목소리에 담긴 초조함과 불안함을 숨기지 못했다. 놈이 이 일을 싫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놈이 싫어하고 있다면 나는 아주 잘하고 있다는 거다.
-이 머저리가! 브레인디바우를 흥분시키지 말란 말이다!! 제기랄!
무시하고 칼을 휘둘렀다.
난도질했다. 괴물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물론 지긋지긋하게도 재생하고 있긴 한데 그 속도가 느려졌다. 무한히 재생하는 게 아니다. 괴물은 완전한 불사신이 아니다.
-그만둬라!!!
연구소장의 절규를 무시하고 괴물의 몸에 칼을 깊숙이 찔러넣는다. 그대로 칼을 내리그어 벤다.
“…….”
뒤로 물러났다.
손맛이 변했다. 아까처럼 쉽게 베어지지 않았다.
칼날을 확인한다. 조금 날이 상하긴 했어도 이 정도면 멀쩡했다. 괴물을 향해 칼을 한 번 더 휘둘렀다.
아까보다 더 단단해졌다. 지금도 단단해지고 있었다.
괴물이 살짝 뒤로 빠지더니 다시 철문을 향해 들이받았다.
“머어어리이이이이!!”
쾅!
지금까지 멀쩡했던 철문이 흔들렸다.
쾅! 쾅! 콰앙!
충격이 점점 커진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거리를 벌렸다. 여차할 땐 바로 계단 위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아 씨. 좆밥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나는 주머니를 만졌다. 전투 AI 핵과 데이터칩, 그리고 작은 알약 수십 개가 느껴진다. 비스터 I이다. 거처에 있는 싸그리 다 챙겨왔다. 혹시 모르면 쓰기 위해서.
‘끝장을 볼 필요는 없겠지.’
콰아앙!
철문이 무너진다.
“머리이이이이이!!”
괴물이 내게 돌진한다. 나는 계단 위로 달렸다. 지하 4층을 지나 3층으로 올라간다. 괴물이 내 뒤를 뒤쫓았다. 아까보다 더 빨라진 것 같았다.
‘내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잡혔겠지.’
3층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려던 나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위로 올라가는 공간이 막혔기 때문이다. 벽이 나타나 그대로 막아버린 것이다.
끼이이이익.
벽이 열리더니 동그란 관이 튀어나왔다. 총구라고 하기엔 구멍이 너무 컸다.
-마취 가스 살포 시작해!!
관을 통해 하얀 가스가 뭉게뭉게 나온다. 나는 바로 호흡을 멈추고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콰앙! 쾅! 쾅! 뒤에서 괴물이 내게 오고 있다. 계단은 막혀 있다. 어쩔 수 없이 3층으로 들어갔다.
‘출입구는 하나가 아니야.’
계단을 통해 슈퍼컴퓨터나 기계를 옮기진 않았을 것이다. 다른 출입구가 존재한다. 나와 나채영이 모르는 출입구가. 그 길을 찾아야 했다.
‘정 안되면 계단 쪽 벽을 없애야겠지.’
3층으로 들어서자 짐승 특유의 노린내가 코를 찔렀다.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니 긴팔원숭이들이 있었다. 우리 같은 곳에 갇혀 있었는데 죄다 뻗어 있었다.
벽 곳곳에서 구멍이 튀어나왔다. 가스관이 아닌 총구다. 총구는 나를 겨누고 탄환을 쏟아낸다. 이미 감각이 예민해져 있는 나는 총구가 보이자마자 몸을 움직여 피했다. 총알은 일직선으로 뻗어가기에 총구를 보고 피하는 것이다.
-이런 제길! 마취 가스가 안 통하잖아! 어떻게 된 거야?!
-통했습니다! 브레인디바우의 움직임이 둔해졌습니다! 흥분한 상태라 완전히 먹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점점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내성이 생기고 있습니다!
-흥미롭군.
-지금 흥미로워할 때냐?! 지원은? 지원은 어떻게 됐지?
-지원은 오고 있습니다! 약 100초 뒤에 도착합니다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그, 그거 내꺼야! 아, 아아아악! 머리이이이이!
-미친! 브레인디바우의 정신 파동이다! 정신 파동 중화기를 가동해! 설마 여기까지 정신 파동이 닿을 줄은….
-출력 올렸습니다!
-잠깐! 저 침입자는 왜 정신 파동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겁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스피커를 통해 혼란스러운 통제실의 분위기가 절절히 느껴졌다. 저놈들도 당황하고 있었다.
3층 복도를 뛰던 나는 괴물의 기척이 멈춘 것을 느끼고 다리를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괴물이 입을 쩍 벌리더니 원숭이의 머리를 씹어먹고 있었다.
“머리! 머리! 머리이이!”
원숭이의 머리를 먹으며 기뻐하고 있었다.
-몽키들의 뇌를 먹고 있습니다!
-막아야 한다! 보안시스템은 뭐 하는 거냐?!
-총알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우끽…?”
마취 가스에 당해 뻗어 있던 긴팔원숭이들이 눈을 뜬다. 원숭이들의 눈동자는 멍청했다.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몽키는 왜 일어나는 거지? 최소 반나절은 뻗어 있어야 하지 않나?
-브레인디바우의 정신 파동입니다! 정신 파동이 몽키들의 뇌를 자극해서 깨운 게 확실합니다!
-뇌를 자극한다고 마취 성분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나!
-뇌는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몽키들의 뇌가 정신 파동에 의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습니다! 연구해야 합니다!
-연구 타령은 나중… 몽키들이 우리를 부수고 탈출한다! 마취 가스 살포해!
-이미 살포 중이고 아마 소용없을 겁니다. 몽키들의 신체 능력이 올라갔군. 뇌 자극에 의한 진화라고 봐야 할까요.
“우끽!”
“우끼끼끽!
원숭이들이 우리를 부수고 탈출한다. 놈들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이 순식간에 5m가량 늘어난다.
‘평범한 긴팔원숭이는 아니라 이거군.’
물론 고작 이 따위에 당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뻗어오는 원숭이의 양손을 칼로 썰었다. 손목이 잘린 원숭이의 팔이 아래로 축 늘어진다.
”우끽! 우끼끼끽!“
원숭이들이 발광하며 일제히 내게 달려들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앙!
애벌레 괴물놈이 로켓처럼 날아와 원숭이들을 짓뭉갠다. 괴물은 터진 원숭이 시체 중에서 뇌 부분만 낼름 삼켰다.
”우끼이이익!“
원숭이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괴물은 원숭이들을 보다가 나를 바라봤다. 그 몸에 달린 인면이 히죽 웃는다.
”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