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6화 > 1866. 이터널 에덴
“머리.”
히죽 웃은 괴물이 몸을 수축하더니 로켓처럼 날아온다. 무협지처럼 말하자면 궁신탄영이다.
나는 급히 옆으로 굴려 괴물의 공격을 피하며 복도를 달렸다. 복도라고 해서 일자로 쭉 이어진 건 아니다. 조금 달려가니 길이 나뉘어졌다. 나는 코너를 돌았다.
‘찾았다.’
대형 엘리베이터의 문.
파지직!
전류를 검기로 변화시켜 엘리베이터의 문을 베어냈다. 엘리베이터는 지하 4층에 머물러 있었고, 위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벽을 박차면서 올라가면 되겠군. 잡을 곳은 많으니 어렵지 않을 것 같고.’
쾅!
뒤에서 괴물이 날아온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바닥을 박차며 벽에 달라붙었다. 괴물도 망설임 없이 내 뒤를 따라 점프했다. 그 몸에 돋은 수백 개의 촉수가 벽에 달라붙어 괴물의 육중한 몸을 지탱했다.
나는 2층으로 들어갔다.
-이 자식 설마…!
연구소장이 경악한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2층 복도를 내달린다. 목표는 통제실이다. 다른 곳에 비해 유독 두꺼운 벽으로 감싸인 곳. 그곳이 통제실일 것이다.
탕탕탕탕탕!
벽에서 튀어나온 총구가 불을 내뿜는다. 쏟아지는 탄환을 전부 피하지 못했다. 힘을 아껴야 했기에 전자기벽도 사용하지 않았다.
‘몇 발 정도는 맞아도 돼.’
총알이 어깨를 때린다. 총알은 관통하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나채영이 만들어 준 옷 덕분이다. 충격까지 전부 막아주는 것도 아니고 옷의 내구 문제도 있었지만, 몇 발은 아무렇지 않게 버틸 수 있다.
콰아아아앙!
“머리이!!”
괴물은 내 예상대로 따라온다.
-통제실을 감싼 철벽의 두께는 10cm가 넘는다! 너의 그 칼로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믿는 거냐?!
힘들겠지.
비스터 I를 복용하고 공격에 집중한다면 가능할 것 같지만, 지금 내 뒤에는 쫓아오는 괴물이 있었다. 집중할 시간이 없다.
-여긴 안전하다! 그리고 넌 브레인디바우에게 뇌를 먹혀 죽을 거다! 오히려 잘됐군, 브레인디바우가 플레이어의 뇌를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잘 됐다고 하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떨리고 있었다.
나는 통제실 앞에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거대한 애벌레 괴물이 수백 개의 촉수를 지느러미처럼 움직이며 달려온다. 괴물이 지나온 복도 통로는 형광등을 비롯해 여러 가지로 엉망진창이었다. 벽의 일부는 부서져 있었다.
“머리!!”
괴물이 몸을 수축한다. 그거다. 로켓 돌진. 나는 괴물이 날아오는 것을 보자마자 옆으로 뛰어 피했다.
콰아아아앙!
통제실 철벽과 괴물이 부딪힌다. 통제실 철벽이 흔들렸다. 철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하, 하하하하! 그래! 아무리 브레인디바우라 하더라도 이 철벽은 못 뚫지!
연구소장이 웃는다.
‘안심하기엔 이를 텐데.’
괴물놈의 촉수가 꾸물거린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쾅! 콰아아앙! 쾅! 쾅!
괴물은 뒤로 물러나더니 다시 철벽에 들이받기를 반복했다. 근처에 내가 있는 것도 잊어먹은 듯했다.
‘저놈의 시야에선 통제실 안에 있는 수십 명이 더 먹음직스럽다는 거겠지.’
철벽은 흔들리고 있다. 흔들린다는 것 자체가 불안하다는 증거였다.
-제, 젠장! 마취 가스 살포! 마취 가스를 뿌려!!
-2층엔 마취 가스 살포기가 없습니다!
-뚜, 뚫릴 것 같습니다!
-우린 모두 죽을 거야!
-엄마, 엄마 보고 싶어….
-제기랄. 총 들어! 지원군이 곧 온다!
-저 상태에 브레인디바우에게 총알이 통할 리가…. 여기 유언이나 남기시죠. 그게 더 생산적일 테죠.
지지지직!
귀에 끼워둔 무전기에 반응이 왔다. 나는 무전기를 누르면서 조용히 말했다.
“나 박사?”
-뭘 멀뚱히 보고 있는 거야! 당장 거기서 나와! 헬기가 오고 있어! 지원 병력이야! 빨리 탈출해야 해!
다급한 나채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계단 쪽으로 내달렸다. 엘리베이터 보다 그게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3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막혔으나 위로 올라가는 계단은 막히지 않았다. 총구가 튀어나와 날 방해했으나, 무사히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사, 살려줘…!
-머리이이이!!
스피커를 통해 비명이 울린다. 통제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불 보듯 뻔했다.
-1층으로 나오지 마! 지금 연구소 바로 앞에 병사들이 집결했어! 3층으로 가서 건물 뒤쪽 창문으로 뛰어! 거기선 안 보일 거야!
나채영의 말대로 3층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뇌천류(雷天流) 허도(虛道). 연구소로 침입할 때처럼 허도를 밟으며 철책을 뛰어넘어 바닥에 착지했다. 나채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정말 그 상황에서 살아 돌아올 줄이야. 그 괴물을 풀어준 게 신의 한 수였어. …연구원들은 모두 죽겠지만.”
“자, 인공지능 핵이랑 데이터칩 받아. 챙길 건 다 챙겼으니까.”
“데이터칩은 필요 없지만… 고마워. 일은 어떻게든 잘 풀렸어. 이대로 도망가기만 하면 돼. 다행히 괴물이 날뛰고 있으니 우리 쪽으로는 신경 쓰지 못할 거야.”
나채영의 노트북을 힐끗 쳐다봤다. 화면 여러 개가 있었다. 카메라 해킹은 아직 유효한 모양이다. 그중에 하나, 통제실을 비춘 것도 있었다. 괴물은 그사이에 진화했는지 30cm로 길어진 촉수로 연구원의 머리를 으깨고 뇌만 꺼내 씹어먹고 있다.
두두두두두두두!
헬기 소리가 시끄럽다. 바닥에 착지한 것도 아니고, 자리를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지원온 병사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다.
“괴물이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그게 더 제압하기 편할 테니까. 좁은 곳에서 싸우면 불리하다고 생각한 거야.”
“이 괴물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있어?”
“미안하지만, 처음 보는 괴물이야.”
“처음 보는 괴물?”
“내가 알기로 이런 괴물은 이터널 에덴에 존재하지 않아.”
“뇌를 좋아해서 그런지 브레인디바우라고 부르던데. 약점 같은 건 없어?”
“……브레인디바우?”
나채영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알고 있어?”
“…가장 성가신 괴물이야. 브레인디바우는 인면을 한 거대 나비 괴물인데, 정신 파동을 내뿜는 능력이 있어.”
“거대 나비라…. 지금은 애벌레의 형태이니 우화하기 전이라고 봐야겠군. 정신 파동을 맞으면 어떻게 돼?”
“심약한 사람은 바로 미쳐버리고, 평범한 사람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미쳐버려. 더 최악인 건 광범위라는 거야. 브레인디바우가 도시에 나타난다면… 아무 대비도 되어 있지 않은 도시는 하루도 안 돼서 무너질 거야.”
콰아아아앙!
익숙한 폭음이 들렸다. 나는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통제실에서 인간의 뇌를 먹던 괴물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탕!
총성이 울린다. 괴물이 지상으로 올라온 게 확실했다. 나채영은 노트북을 빠르게 챙겼다.
“가자. 브레인디바우는 군인들이 해결할 거야. 내가 알고 있는 브레인디바우보다 훨씬 약하니까. 지금이라면 군인들이 처리하겠지.”
“아니, 못할걸. 연구소는 정신계 각성자를 통해 그 괴물을 통제했었어. 근데 내가 죽여버렸지. 그리고 괴물은 지금도 정신 파동을 내뿜고 있어.”
또다시 폭음이 들렸다. 이번엔 하늘 쪽에서 들렸다. 헬기가 추락하고 있었다. 괴물이 궁신탄영으로 로켓처럼 날아가 헬기에 몸통을 박은 것이다. 안 봐도 뻔했다.
나채영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까부터 두통이 느껴졌어. 스트레스가 아니라 정신 파동이 원인이었구나.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도망 안 가?”
“지금 도망가면 서울이 망할 수도 있어. 한국엔 각성자도 별로 없잖아. 한국이 저놈 하나 때문에 망할 수 있어.”
“…네가 나설 필요는 없어. 군대가 어떻게든 할 거야. 미사일이라도 쏴대면 아무리 저 괴물이라도 버티지 못해.”
“미사일은 쉽게 못 쏴. 그리고 괴물이 한자리에만 계속 있는 것도 아니고. 근처에 도시가 있는 건 너도 알잖아?”
“왜 그렇게 까지 하는 거야?”
나채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몇십, 몇백 명이 죽는 건 나도 상관없다. 하지만 그게 도시 단위가 되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리고 여기에서 서울도 가깝다.
“한국이 망하면 곤란해.”
“…한국이 망하면 외국으로 가면 돼. 가까운 일본도 선진국이야. 아니, 애초에 한국이 망하면 왜 곤란한 거야?”
“난 한국의 왕이 될 거니까.”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묻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부터 계획했던 일이었다. [뱀파이어 형사]처럼 기업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멀쩡한 세계에서 한국의 왕이 될 수는 없다. 민중은 당연히 날 반기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세계가 혼란으로 가득한, 인류 멸망이 다가온 [이터널 에덴] 세계는 다르다. 실제로 원작 [이터널 에덴]은 한 국가의 지배자가 되는 것도 가능하니까.
“…지금 내 시간인 거 잊었어? 넌 내 말을 따라야 해.”
“서울이 망하면 너도 곤란하잖아. 외국으로 나가고 싶었다면 애초부터 한국을 선택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나채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의 한숨이었다.
“…알았어. 내가 뭘 하면 돼?”
“저 괴물의 약점.”
“화상이야. 브레인디바우는 화상을 입으면 재생력이 약해져. 그 약해진 상태에서 완전히 죽여버려야 해.”
“불이 정답이었나.”
“윽, 아악! 그만!”
갑자기 나채영이 머리를 붙잡으며 주저앉았다. 나는 혀를 찼다. 괴물의 정신 파동이 강해졌다.
‘아까보다 성장 했다. 이대로 두고 떠나면 감당하지 못할 수준까지 성장하겠지? 역시 지금 죽여야겠군.’
괴로워하는 나채영을 챙기는 대신 복면을 슬쩍 들어 입을 드러냈다. 주머니에서 비스터 I을 전부 꺼내 입 안에 넣었다. 아그작, 아그작. 몇 번 씹으니 힘이 치솟는다.
‘저번에 먹었을 때 비하면 효과가 떨어졌어. 나채영의 말대로 내성이 생긴 건가? 이건 너무 빠른데.’
약을 대량으로 먹어서? 회복 능력 때문에? 원인이 뭐든 지금 생각할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칼을 오른손에 움켜쥐고 괴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괴물은 추락한 헬기 잔해에서 조종사를 꺼내 촉수로 모가지를 따고 있었다.그러다 나를 보고 히죽 웃는다.
“머리이!”
“네가 불을 그렇게 좋아한다며?”
파지지직!
푸른색 뇌전이 칼날을 감쌌다. 이윽고 칼날이 불타기 시작했다.
뇌전이 12레벨이 되면서 뇌전에 특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됐다. 지금 나는 뇌전에 불타는 특성을 부여했다. 정확하게는 뇌전이 지나간 자리에 푸른 불꽃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 칼날을 휘감은 불꽃과 뇌전이었다.
괴물은 몸을 수축하더니 로켓처럼 날아왔다.
나는 발에 힘을 주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뇌천류(雷天流) 비뢰신(飛雷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