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7화 > 1867. 이터널 에덴
뇌천류(雷天流) 비뢰신(飛雷神).
몸 전체를 가속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괴물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와 비뢰신 특유의 자유로운 움직임이다.
발목에 힘을 주어 위로 점프했다. 파직. 불똥처럼 튄 전류가 내 몸을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끌어준다. 괴물의 돌진은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아니, 아슬아슬하게 보일 뿐이다. 나는 여유로웠다. 몸이 내 뜻대로 움직이는데 아슬아슬할 이유가 없었다.
피하는 동시에 칼날을 아래로 내린다. 괴물이 지나가며 자연스럽게 칼날이 괴물의 몰을 베었다. 칼날에 묻어 있던 푸른 불꽃이 괴물의 몸에 옮겨붙는다.
“아아아아아아악!”
괴물이 고통으로 가득한 비명을 질렀다. 칼로 몸을 벴을 때도 지르지 않던 비명이었다. 괴물은 등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등을 땅바닥에 비비적거렸다. 애벌레 꿈틀거리는 모양새였다. 효과는 있었다. 불이 꺼졌으니까.
“요, 요, 요요요용서 못해.”
“뇌를 먹어서 그런가? 사람 말을 아까보다 더 능숙하게 하는군.”
문득 팔이 5m까지 늘어나던 긴팔원숭이들이 생각났다. 그것들은 실험용인 동시에 괴물의 먹이가 아닐까 싶다. 뇌를 먹고 지능이 발달한다면 인간의 뇌를 줄 순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다른 고기를 먹는 놈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좋나.’
놈이 불을 껐다면 다시 지펴주면 된다.
“주, 주우우거어어!”
괴물이 몸을 수축한 뒤 날아왔다. 준비동작이 너무 컸다. 뭘 할지 뻔히 보였다.
뇌천류(雷天流) 비뢰신(飛雷神).
아까처럼 비뢰신을 사용하며 뛰었다. 칼날을 아래로 내린다. 가속이 붙은 놈은 칼날을 피할 수 없다.
괴물의 몸에 돋아 있는 촉수가 움직였다. 30cm에서 50cm로 늘어난 촉수들이 칼날을 억지로 붙잡아 당긴다. 촉수는 이어 내 양팔과 양다리를 휘감았다. 나는 괴물에게 붙잡혀 앞으로 나아갔다. 괴물의 속도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한 번 당한 거에 두 번 당하지 않겠다?’
괴물 새끼 주제에 나름 머리를 썼다. 하지만 그래봤자다. 오히려 놈과의 거리가 좁혀졌기에 내 입장에선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먹,는,다…!”
“어림도 없지. 방전.”
몸에서 뇌전이 터졌다. 뇌전은 괴물에게 흘려들어 가 푸른 불꽃을 일으켰다. 괴물의 몸은 순식간에 불타기 시작했다. 내 칼과 팔다리를 붙잡았던 촉수는 바스러져 사라졌다. 나는 불을 끄려고 지랄발광하는 괴물에게 칼을 휘둘렀다.
칼은 괴물의 몸에 파고들려다가 멈췄다.
무언가가 칼날을 잡았다. 근육이다. 놈의 몸속에 있는 근육들이 급격히 수축하며 내 칼을 붙잡은 것이다.
‘다 죽어가는 놈이 그게 가능하다고? 촉수는 불에 닿자마자 사라졌잖아.’
급히 칼을 빼내려고 했으나, 괴물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게 몸통을 박았다. 나는 뒤로 돌아가 연구소 벽에 부딪혔다. 그것도 하필이면 머리가 부딪쳐 목뼈가 나간 것 같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발.’
목뼈, 즉 경추가 망가졌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일종의 전신마비다.
‘하필이면.’
내겐 회복이 있다. 시간만 있다면 경추든 신경이든 회복할 수 있다. 시간만 있다면.
“머, 머리이이이!”
괴물이 나를 쳐다보며 히죽 웃는다.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보고 이겼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놈은 바닥을 몇 번 굴러 몸에 붙은 푸른 불을 끄고는 내게 다가왔다.
‘전신을 태웠는데도 화력이 부족했나? 젠장. 회복이 느려.’
왼손 검지가 움직였다. 그걸 시작으로 엄지와 중지도 움직인다. 확실히 회복되곤 있으나 느렸다. 괴물이 다가온다. 이대로는 괴물이 내 뇌를 음미할 것이다.
‘…몸이 마비됐다고 해서 뇌전을 쓰지 못하는 건 아니지.’
낙뢰를 떨어뜨릴까? 아니, 그건 효율이 별로다. 한 번 쓰고 나면 지쳐버릴 것이다. 낙뢰 한방으로 괴물을 죽일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작전은 폐기다.
‘아. 그 방법이 있었군.’
파지직.
전류가 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전류의 번쩍임은 보이지 않았다. 전류는 내 안을 달리고 있으니까.
‘비뢰신은 결국 뇌전으로 신체를 가속하고, 끌고, 밀고하는 거야. 그러니 뇌전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할 이유는 없지.’
그러고 보니 다큐 프로그램에서 인간의 몸을 움직이는 건 전기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생체전기라고 하던가?
파지지지직!
뇌전이 전신을 내달린다. 나는 뇌가 아닌 의지로서 뇌전에 명령했다.
‘내 몸을 움직이는 신경이 돼라.’
뇌전은 내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몸이 움직인다. 원격으로 몸을 움직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었으나, 지금 그 감각을 느낄 시간은 없었다. 바로 몸을 옆으로 던졌다.
콰앙!
내가 있던 곳을 괴물이 들이받았다. 콘크리트 벽과 천장 일부가 무너져 괴물을 뒤덮었다.
“키에에에엑!”
운이 좋았다. 저 쏟아진 벽들이 잠시나마 괴물을 잡아 둘 거다.
-잠깐!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거야?!
무전기로부터 나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쉽게도 지금의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뇌전으로 입과 혀, 성대를 섬세하게 조작하기엔 숙련도가 부족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에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었다.
‘지금 내 힘으로는 저 괴물을 죽이지 못한다.’
괴물은 내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아니, 강해졌다고 보는 게 맞다. 보스 몬스터는 보스 몬스터였다.
‘내 힘이 부족하다면, 다른 힘을 이용하면 되지.’
이 연구소는 지하와 지상으로 나뉘어져 있다. 지상은 숙소고 지하가 연구 및 실험실을 위한 곳이다.
지하 5층은 괴물의 거처, 지하 4층은 전투 인공지능 연구, 지하 3층은 괴물 긴팔원숭이, 지하 2층은 통제실. 그렇다면 지하 1층에는 뭘 위한 곳일까?
‘당연히 연구 설비를 위한 곳이지. 이 연구소의 존재는 기밀 중 기밀. 외부와 차단되어 있을 테고… 따로 발전기도 설치해 놨겠지.’
1층 복도를 뛰어다니며 방을 확인하던 나는 곧 발전실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발전기를 감싸고 있는 손으로 잡아 뜯어냈다.
‘공장 수준의 발전기군.’
콰아앙!
괴물이 내 뒤를 쫓아 발전실로 들어왔다. 괴물의 육체는 화상을 입고 있었는데 점점 재생되고 있는 게 보였다.
“머…리…!”
괴물이 나를 보고 히죽 웃는다. 더는 도망가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도망갈 생각도 없었다.
발전기에 손을 뻗는다. 딱딱한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뇌, 뇌를 먹어, 먹어 주마!”
괴물이 촉수를 꿈틀대며 다가온다.
“먹을 수 있으면 먹어 보던가. 전기구이는 서비스다.”
발전기의 전기를 강제로 끌어낸다.
파지지지직!
과부하된 발전기가 엄청난 소음을 내며 전기를 토해냈다. 나는 그 전류를 모조리 제어해 바닥에 흘려보냈다. 전류가 흐르는 방향은 괴물이었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악!”
대량의 전류에 지져진 괴물이 비명을 내지른다. 그러면서도 내게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나를 죽이면 이 전류가 멈춘다는 걸 아는 것이다.
‘나는 뇌전에 특성을 부여할 수 있지. 복잡한 특성을 부여하기 힘들지만, 내가 잘하는 것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전류에 칼의 특성. 즉, 날카로움을 부여했다. 뇌전이 괴물의 살갗을 베고 가른다. 허나 깊숙이 베지 못했다. 기껏해야 피부를 베는 게 고작이다. 그래도 사방을 피투성이로 만들기엔 충분했다.
“끄으으으으!”
괴물이 조금씩 다가온다.
이 특성이란 건 뇌천류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다시 말해 뇌천류의 기술을 보다 근본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
‘회전해라.’
뇌천류(雷天流) 만뢰(卍雷).
괴물을 중심으로 뇌전이 회전한다. 칼날이 회전하는 것과 같다. 즉, 믹서기. 괴물의 몸이 실시간으로 갈려 나간다. 쓸데없이 단단한 탓에 조금씩 조금씩 피부가 갈려 나가고, 그 갈려 나간 부분은 재생하고 다시 갈려 나간다. 그게 악수로 적용했다. 괴물의 움직임은 멈췄다. 괴물은 그저 고통의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몸속으로 파고드는 뇌전, 칼날이 되어 육체를 베는 뇌전, 회전하며 갈아대는 뇌전.
“크크. 꼴 좋군. 근데 출력이 아직도 부족하군.”
나는 웃었다. 전류는 내게도 영향을 미쳤다. 혈관이 끊어지고 뇌가 불타는 것 같다. 하지만 괴로워하는 괴물을 볼 수 있으니 참을 수 있었다.
‘공명해라.’
뇌천류(雷天流) 뇌명(雷鳴).
회전하는 뇌전에 공명하는 특성이 부여된다. 뇌전은 서로 공명하며 그 크기를 키워갔다. 원래라면 사방으로 퍼져야 정상이지만 만뢰(卍雷)의 원심력 때문인지 회전하며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괴물이 있었다.
괴물의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오직 전류가 튀는 소리뿐이었다.
괴물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그저 뇌광뿐이다.
수천, 수만. 어쩌면 그 이상의 뇌전이 괴물의 몸 안팎에서 날뛰고 있다.
‘이거 꽤 괜찮은데? 뇌천류의 새로운 기술로 정해도 되겠어. 이름은 대충….’
뇌천류(雷天流) 뇌성천도(雷聲千刀).
킥킥 웃으며 회전하는 뇌전을 바라본다.
허나 그것도 잠시. 나는 곧 얼굴을 굳혔다.
‘시발. 어떻게 나가지?’
뇌성천도는 이미 내 제어 밖에 있었다. 저걸 지나치는 건 아무리 나라도 무리였다. 문제는 만뢰의 회전하는 특성이었다. 발전기의 뇌전을 끌어모으고 있다. 강제로 발전기의 전류를 끊는다면 발전기가 폭발할 수도 있었다.
‘방법은….’
저건 에너지 덩어리다. 그러니 에너지 덩어리를 소모한다.
나는 고민하다가 칼을 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천마신공의 마겁은 마기를 포함해 자신의 모든 것을 칼에 집중 시기는 기술이지. 마기란 곧 에너지. 뇌기로 하지 못하란 법은 없지.’
앞으로 걸어가며 회전하는 뇌기에 칼을 뻗었다. 캉캉캉! 회전하는 뇌전에 닿을 때마다 철이 부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뇌전이 조금씩 칼로 모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빨리.’
한 번 흐름을 타니 엄청난 속도로 뇌전이 칼로 모이기 시작했다. 칼이 사방에 있는 뇌전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뇌전을 끌어들였다. 칼날은 푸른 뇌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괴물이 있어야 할 곳. 그곳에는 심장 하나가 떨어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피를 뿜어내며 재생하려고 한다.
‘아직 살아 있는 건가? 지긋지긋한 놈이군. 뭐, 잘 됐다고 해야 하나.’
뇌천류(雷天流) 뇌겁(雷劫).
나는 괴물의 심장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거대한 참격이 심장뿐만이 아니라 연구소를 통째로 베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