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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1869화 (1,649/2,000)

< 1869화 > 1869. 이터널 에덴

샤워하고 나온 나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대충 만지며 나채영이 있는 연구실로 향했다. 하얀 가운을 입은 그녀는 의자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슬쩍 모니터를 봤다. 기계 설계도 같은 걸 보고 있었다.

“무슨 설계도야?”

“전투 인공지능 설계도. 우리가 얻은 건 소프트웨어니까. 이건 그 하드웨어 설계도야.”

“슈퍼컴퓨터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공학 쪽으로는 잘 몰라도 인공지능은 기본적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연산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안다.

“내가 테크놀로지스트인거 잊었어? 여기 설계도가 있고, 태왕에게서 받은 자원까지 있는데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어. 그날이 오기 전까지 전투 AI를 활용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비는 만들 수 있을 거야.”

“테크놀로지스트가 능력을 사용해 만들려면 만드는 물건을 이해해야 한다며. 아무리 자료가 있다지만 그렇게 빨리 이해할 수 있는 거야?”

“그 점은 내가 테크놀로지스트라 그렇다고 밖에 말할 수 없겠네. 일종의 초능력이라고 할까? 기계를 연구할 때는 머리가 확 좋아지는 느낌이야.”

그리 말한 나채영은 드디어 모니터에서 시선을 뗐다. 의자를 살짝 돌려 나를 쳐다본다. 그녀는 대번에 눈을 찌푸렸다.

“…왜 벗고 있는 거야?”

“답답해서. 그리고 어차피 조금 있다가 침대에 갈 테니까. 침대에 가서는… 알지?”

히죽하고 웃었다. 나채영은 은근한 내 시선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저 한숨을 작게 내쉴 뿐이다.

“방금 전까지 다 죽어가던 주제에…. 그 짓은 꼭 해야 해?”

“섹스는 내 삶의 의미지. 그리고 몸은 이미 완전히 회복했어. 오늘 느낀 건데 예전보다 회복 속도가 더 빨라졌어.”

“이상한 일은 아니야. 개인 차이는 있지만, 각성자는 능력을 쓰면 쓸수록 강해지니까. 네 능력도 강해진 거겠지.”

“나 박사. 회복이 어느 정도의 능력이라고 생각해?”

“네 능력인 회복은 나도 잘 몰라. 처음 보는 능력이니까.”

“나 박사는 플레이어잖아.”

“플레이어라고 해서 이터널 에덴에 대해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야. 그 게임은 지나칠 정도로 방대했으니까.”

“회복이 계속 성장하면 불사신이 될 수 있을까?”

“비슷하게는 될 수 있어. 하지만 완전한 불사신이 되는 건 불가능해.”

“왜?”

“능력은 노 코스트가 아니야. 능력을 쓰면 정신적 피로와 육체적 피로. 둘 다 쌓이니까. 어느 한쪽이 바닥나면… 능력은 발동하지 않을 거야.”

“뇌전을 쓰면 체력이 확 빠지는 그 느낌을 말하는 건가. 정신적 피로는… 음. 육체적 피로를 말하는 거 아닌가?”

“절대정신이 그쪽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네. 하지만 절대적인 건 없어. 회복만 믿고 몸을 막 굴렸다간 큰일 날 거야. 회복이 안 될 때가 올 테니까.”

“회복은 그 체력도 회복시켜 주는 것 같던데?”

“…정신 피로가 쌓인다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정신적 피로를 느낀 적 없다니까.”

“……그게 정말이라면 네 회복은 정말 영구기관처럼 발동되는 걸지도 몰라. 그래도 죽고 난 뒤에 능력이 발동된다는 보장은 없어. 이상한 짓 하지 마.”

“아니, 죽은 뒤에도 발동될 거야. 비스터 I의 부작용. 잊었어? 그때 조폭놈들을 죽인 뒤에 나는 온몸의 혈관이 터져서 죽었어.”

“의식이 끊겼어?”

“아니, 의식이 끊긴 느낌은 아니었어.”

“그럼 죽음이란 걸 어떻게 확신하는 거야? 죽음이 아닐지도 모르잖아.”

“죽었으니까 알지.”

“…….”

나채영이 이상하다는 듯 날 쳐다봤다.

이건 뭐라 설명하기도 힘들었다. 나는 이미 몇 번이나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완전 회복을 통해 되살아났다. 그러니 죽음을 겪는 건 익숙했다.

“무식하게 능력을 계속 쓴다고 해서 유의미한 성장을 하는 건 힘들 거야. 특히 너는 특성으로 둔재를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둔재로 보여?”

“…아니. 네 전투 능력은 천재를 넘어서서 괴물 수준이야.”

“나 박사. 둔재라는 건 말이야. 새로운 걸 배우기 힘들다는 특성이지?”

“맞아.”

“배우는 건 힘들어도 이미 알고 있는 걸 사용하는 건 문제 없다는 거잖아.”

“……이해할 수 없는 건 그거야. 너의 검술, 번개를 사용하는 능력, 고통을 견디는 법까지…. 그런 것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글쎄.”

나채영은 나를 빤히 보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결국 내가 말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연구실 밖으로 나가서 대충 던져뒀던 칼을 가져와 나채영에게 건넸다.

“날 좀 세워줘.”

나채영은 칼집에서 칼을 꺼냈다가 멈칫했다. 나도 놀랐다. 회색에 가까웠던 티타늄의 도신이 하얀색으로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색칠이라도 한 거야?”

“그럴 장난칠 시간이 없었다는 건 나 박사가 제일 잘 알잖아.”

“금속이 변질된 거네.”

나채영이 칼집에서 칼을 전부 뽑았다. 칼자루를 제외하고 도신 전부가 새하얗게 변했다.

“금속이 변질도 되는 거야?”

“이터널 에덴에서도 가끔 일어나는 일이야. 아주 가끔씩 진화 생물의 피나 살에 금속이 닿으면 변이를 일으켜. 어떤 특별함을 가진 금속인지는 연구해봐야겠지만.”

“그 괴물을 죽여서 그런가.”

“단순히 브레인디바우를 칼로 죽였다고 금속이 변하진 않아. 다른 요인이 있을 거야. 브레인디바우를 죽일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자세히 말해줘.”

숨길 것도 없었다. 나는 막대한 전기를 칼에 담아 휘둘렀다는 걸 말했다.

“연구소를 반으로 가른 그 공격이구나. 칼에 전기를 약간 담아봐. 너무 강하게는 말고.”

나채영이 말했다. 평소 깊게 가라앉아있던 눈동자는 웬일인지 반짝 빛나고 있었다.

칼을 받아 미약하게 뇌전을 일으킨다.

파직.

뇌광을 번쩍인 작은 뇌전은 그대로 새하얀 칼에 스며들었다. 순간적으로 칼이 은색으로 빛났다가 사라졌다.

‘너무 약했나?’

파지직!

손에서 일어난 뇌전 줄기는 그대로 칼로 스며들었다. 나는 뇌전이 끌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뇌전을 머금은 칼날은 은색으로 빛났다. 뇌전을 공급하지 않았는데도 계속 은색으로 변하고 있다. 변화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칼날이 한순간에 날카로워졌다.

“잠깐만. 전기 공급을 멈춰봐.”

“이미 멈췄어. 이거 배터리처럼 축전된 상태야. 그리고 이것 봐봐. 칼날을 멋대로 날카롭게 만들었어.”

“…축전? 그럼 전기를 뺄 수는 있고?”

“해볼게.”

칼에 들어간 전기를 뺀다. 어렵지 않았다. 칼이 전기를 끌어당기는 힘은 아주 미약했으니까. 거의 없는 수준이라 보면 된다. 전기가 빠져나가자 은색으로 빛나던 칼은 다시 하얀색으로 돌아왔다. 칼날은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오. 자동 칼날 수복 기능인가!”

킬킬 웃었다. 원인 따윈 모르지만 마음에 드는 기능이었다. 칼을 휘두를 때마다 칼날이 나가버리는 만큼 귀찮고 짜증 나는 순간은 없으니까.

“…이 금속은 겨우 그런 게 아니야. 형상이 복구되는 것도 가진 능력 중 하나겠지. 강도는? 칼의 강도는 어느 정도야?”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흥분한 것이다.

“어? 그거야 나도 모르지. 기본은 티타늄이었으니 티타늄 정도 아니야?”

“실험해봐야겠네. 금속의 강도 이상으로 더 중요한 건 축전 양과 축전 속도야. 금속 그 자체가 배터리 역할을 할 수 있다면… 혁명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도움이 될 거야. 칼 이리 줘. 지금부터 연구해야겠으니까.”

“…칼은 내 무기인데.”

“연구해서 이해하면 양산할 수 있어.”

“전부 연구하기까지 얼마나 걸리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칼은 복잡한 기계가 아니라 금속을 얇게 늘리고 날카롭게 만든 물건이잖아. 그 구조만 보면 길거리에 널린 돌멩이랑 마찬가지야.”

“칼 하나에 들어가는 기술을 얕보는… 아, 맞다. 나 박사는 테크놀로지스트지.”

그녀에겐 칼을 만들기 위해 금속을 녹이고 두들기는 과정은 필요 없다. 자원으로 금속을 만들고, 능력으로 금속의 형태를 정할 수 있으니까. 칼은 그녀의 말대로 금속을 얇게 늘리고 날카롭게 만든 것에 불과했다. 나는 그녀가 칼을 만든 과정을 직접 봤었다. 능력을 사용한 손으로 금속을 쭉 늘렸을 뿐인데 칼이 만들어졌다.

“바로 연구를 시작해야겠어.”

“…도와줄까?”

딱히 할 것도 없었다. 바로 잠자리에 들기에는 아직 저녁 시간대도 아니었으니까.

“도와줘. 네가 도와주면 더 빨리 연구 결과를 낼 수 있을 거야.”

나는 손에 쥔 칼을 쳐다봤다.

티타늄 칼은 새로운 칼로 변했다. 그러니 티타니아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게 옳겠지.

“넌 이제 갈치검이다.”

“…뭐?”

“은색으로 빛나는 게 꼭 갈치처럼 생겼잖아. 갈치검. 음. 마음에 드는군.”

칼이니 도라고 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갈치검이 더 어조가 찰졌다.

“아, 맞다. 금속도 처음 본 사람이 이름을 붙인다지? 그럼 내가 붙여야겠네?”

“…설마.”

“이 금속은 이제 갈치늄이다.”

“그놈의 갈치….”

나채영은 머리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붙잡았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갈치늄은 어마어마한 놈이었다. 강도는 티타늄과 비슷했고, 축전량은 같은 크기의 배터리보다 약 12배 이상 더 많았다. 따로 가공을 한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나채영의 말로는 갈치늄을 가공해 제대로 된 배터리로 만들면 그 효율은 최소 2배 이상은 오를 것이라고 한다.

“이건 어마어마한 금속이야.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가 배터리 문제였는데… 지금 그 문제가 성큼 진보했어. 한 계단? 아니, 이 금속만으로 배터리계는 최소 3계단 이상 진보한 거야.”

“대단하군, 갈치늄.”

“그놈의 갈치 좀 어떻게 하면 안 될까?”

“이미 갈치늄으로 정했어. 근데 그렇게 대단한 기술이면 숨겨야 하지 않아?”

“당장은 우리가 독점할 수 있겠지만… 어려울 거야. 나는 이….”

“갈치늄.”

“…그래. 갈치늄을 적극 사용할 생각이니까. 테크놀로지스트의 손에 들어가는 그들도 연구하고 바로 갈치늄을 만들어내겠지. 그러니 거래용으로도 쓸 생각이 있어.”

“누구와 거래하는데?”

“기업. 아니면 정부. 물론 당장 그러겠다는 말은 아니야. 그리고 난 의견을 말한 것뿐이야. 내 의견을 선택하는 건 너야.”

“나?”

“네가 여기 성악초등학교의 리더잖아. 세력의 재산은 최종적으로 리더인 네가 결정하는 거야. 이 갈치늄은 네 것이니까.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만약, 그런 기회가 오면 정부 쪽이랑 거래하자.”

“왜? 값은 기업이 더 쳐줄지도 몰라.”

“기업의 한계는 내가 잘 알거든. 기왕 친해질 거면 정부와 친해지는 게 더 나아.”

“알았어.”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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