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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1875화 (1,655/2,000)

< 1875화 > 1875. 이터널 에덴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양수빈에게 다가갔다. 겁에 질린 얼굴로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근육 괴물이 떨어져 자신을 노리려 했으니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괴물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한 나와 달리 그녀는 평범한 의사니까.

“괜찮아?”

“아, 네. 괜찮아요. 그 괴물도 변종인가요?”

“그래.”

“…변종이 많은가요? 오늘만 해도 두 번이나 보네요.”

“그렇게까지 많은 건 아니야. 오늘은 D 바이러스가 퍼진 첫날이니까. 2번이나 변종을 만난 건 운이 안 좋았다고 할 수밖에.”

“…좀비처럼 변종도 생물을 잡아먹으면서 진화하나요?”

고개를 끄덕인다.

“진화의 원인은 D 바이러스니까.”

“그럼 변종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검 강해지겠군요.”

“그렇지. 그리고 인간도 마찬가지야. 진화는 좀비만의 전유물이 된 게 아니니까.”

각성자가 좀비에게 물리면 바로 변종 좀비가 될 확률이 높다. 근육 괴물은 아마 신체 강화 종류의 각성자였을 것이다.

“…구해줘서 고마워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잡아 먹혔을 거예요.”

“기껏 전폭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는데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잖아.”

그녀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봤다. 나는 한껏 젠체하며 폼이나 잡았다. 5분 정도 지나자 경호원 8명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중 2명은 들것에 옮겨지고 있었다.

박해길은 내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수빈이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 그래.”

박해길의 정중하고 진정성 어린 인사를 받아봤자 아무 감흥 없었다.

양수빈은 환자들의 동태부터 확인했다. 의식불명인 환자부터 확인한다. 머리를 자세히 바라보고는 큰 문제는 없다고 말한다. 정밀 검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글쎄. 성악초등학교에 최신 의료기기 같은 건 없었다. 양다리 골절된 놈에겐 진통제를 먹이고 부목을 덧댔다. 수술까지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나는 앞장서서 움직였다. 박해길이 내 옆으로 다가온다.

“아까 괴물을 상대할 때 보여주신 움직임과 힘…. 혹시 초능력자입니까?”

“초능력자라고 하면 믿을 거냐?”

“좀비와 괴물이 있는데 초능력자를 못 믿겠습니까?”

“맞아. 초능력자다. 보통 각성자라고 하지.”

“어떻게 하면 각성자가 될 수 있습니까?”

“될놈될?”

어떻게 각성자가 되는지 나도 모른다. 그 원인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D 바이러스? 원인 중 하나이긴 하나 정확히 밝혀진 건 없었다. 각성자는 희귀하다. D 바이러스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지금도 각성자는 쉽게 볼 수 없다. 그리고 좀비 사태가 있기 전에 각성한 조기 각성자는 더욱 희귀하고.

“…혹시 오늘 각성하신 겁니까?”

“아니. 한 달 전쯤에 각성했지. 그렇게 능력을 갖고 싶나?”

“힘을 갖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힘이 중요한 시대가 온 것 같으니까요.”

“정 그렇게 각성자가 되고 싶다면 좀비라도 먹어 보던가. 어쩌면 모르지 진화해서 각성하게 될지.”

인간은 좀비와 다르다. 인간이 아무리 좀비를 먹더라도 진화할 확률은 낮다. 애초에 진화란 건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외가 있다면 플레이어. 그중에서도 로드와 바이오닉스다.

로드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이를 강제로 각성시킬 수 있다. 대가는 바로 그 충성이다.

바이오닉스는 유전자 조작, 강화 등으로 인간을 진화시킬 수 있었다. 원하는 방향으로 진화시키기 위해선 어마어마하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을 박해길에게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 정도로 친하지도 않고 귀찮았다.

박해길을 본다. 진심으로 좀비를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강해지는 것에 집착하는 스타일인가?’

박해길의 첫인상은 건장하고 선해 보였다. 하지만 사람은 한 꺼풀 까봐야 본질이 보이는 법이라고 하지 않나. 박해길이 정말로 선한지, 위선자일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 쪽에서 일하기로 했으니 미리 말해두지. 사람을 죽여야 할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죽여라. 망설이지 말고.”

“…제가 한심해 보였나 보군요. 죽여야 할 때는 죽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전장에서 사람을 죽여본 적도 있습니다.”

“그 경험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멍청한 짓은 하지 마.”

한 번 올 때 좀비들을 죽이면서 와서 그런지 돌아갈 땐 좀비들의 수가 적었다. 덕분이 돌아가는 길은 편했다.

‘끝까지 편했으면 좋겠군.’

생각이 끝나자마자였다.

“살려주세요!!”

어두운 골목길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남자 목소리였기에 별로 시큰둥한 얼굴로 골목길을 쳐다봤다. 중형견 크기의 곤충 3마리에게 물어뜯기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가 우리를 향해 손을 뻗는다.

“저, 저건?!”

박해길이 깜짝 놀랐다. 그는 바로 허리 벨트에 걸어둔 삼단봉을 뽑아 들었다.

“벌레군.”

벌레가 진화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D 바이러스가 퍼지고 벌레가 진화했다고 하기엔 너무 빨랐다. D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부터 진화를 거듭해 왔을 것이다.

“그렇게 느긋하게 말해도 됩니까? 저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살려줘요! 제발 살려줘요!! 아아악!”

나는 팔짱을 꼈다. 구해줘야 할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겠다. 남자의 팔다리는 이미 빨갛게 피로 물들어 있었고, 구해줘도 응급처치까지 해줘야 할 판이다.

박해길의 동료들을 쳐다본다. 얼어붙어 있는 동료들은 주춤거리고 있다. 벌레에게 겁을 먹은 것이다. 특수부대 출신 경호원이라고 해도 그들의 손에는 총 대신 삼단봉이 있었다. 그것만으로 목숨을 걸고 싶진 않겠지.

“무시해.”

내가 말했다. 곤충들은 어두운 골목길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우리를 보고서도 붙잡은 남자에게 집중한다. 남자의 힘이 점점 빠진다. 벌레들은 남자를 끌고 맨홀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수구 쪽에 똬리를 틀었나? 그 정도로 큰 하수구는 아닐 텐데. 지하를 파서 다른 구멍을 뚫은 걸지도 모르겠군.’

곧 내가 지배할 서울 지하에 이딴 벌레 새끼들이 있다는 건 무척 불쾌한 일이었다. 마음 같아선 싹 쓸어버리고 싶지만….

‘벌레놈들의 규모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어. 괜히 혼자 설쳤다가 좆될 수 있어.’

모든 일을 나 혼자 처리할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박해길이 벌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삼단봉으로 벌레의 머리를 후려친다. 벌레의 머리 정중앙에 제대로 들어갔다. 벌레 머리가 부서지고 반투명한 녹색 점액질이 튀어나와 바닥을 더럽힌다.

키에에에엑!

벌레들이 박해길에게 달려들었다. 박해길이 삼단봉을 붕붕 휘둘렀으나 아래쪽으로 기어들어 오는 벌레에게 틈을 허락했다. 벌레가 박해길의 오른손을 씹었다. 피가 터지고 박해길이 피가 터진다.

“해길아!”

“사장님!”

“젠장!!”

경호원들이 달려들었다. 마찬가지로 삼단봉을 든 그들은 벌레들을 향해 삼단봉을 난타한다.

나는 그 광경을 서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내 말은 아예 들은 척도 안 하는군.”

“미, 미안해요. 해길이가 불의를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해서….”

“그런 것 같네.”

박해길. 그냥 지금 죽여버릴까? 아니다. 양수빈의 시선이 바로 뒤에 있다. 죽이려면 은밀하게 죽여야 한다. 기왕이면 자연스럽게 사고에 의해서.

“좋게 대우해주고 싶어도, 대우해줄 수 없을 것 같네. 너도 이해하지?”

“그… 해길이를 죽이거나 하시는 건 아니죠?”

“안 죽여. 대신 딱 거기까지야. 그래도 널 봐서 한 번은 봐줄게. 집 지키는 개로 쓰다가 쓸모없어진다면 내보낼 거다. 난 많이 양보한 거야. 설마 불만이라고 하진 않겠지?”

“제가 나중에 해길이랑 이야기해 볼게요. 더는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

실망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뒤늦게나마 달려간 경호원들이 벌레를 모두 죽이고 박해길과 결국 의식을 잃은 남자를 구했다. 박해길은 오른손이 작살 났고, 남자는 팔다리가 엉망진창이었다. 특히 다리 쪽이 심하다.

양수빈은 의도적으로 남자를 못 본 척하며 박해길에게 먼저 다가가 상처를 살폈다. 그 행동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난 됐어. 좀 아프긴 해도 심하진 않아. 이 사람부터 봐줘.”

경호원들은 혼절한 남자를 땅바닥에 반듯하게 눕혔다. 상처를 본 양수빈은 곧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출혈이 너무 심해. 쇼크가 온 것 같아. 지금 당장 수혈해야하지만….”

“…….”

지금 여기서 수혈을? 수혈도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냥 하는 게 아니다. 의료 장비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남자의 혈액형이 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양수빈은 되는대로 지혈을 시작했다. 그녀의 손과 옷이 피투성이가 되어간다. 그녀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설령 여기서 수술한다고 해도 하반신은… 아.”

그녀가 탄식하며 지혈을 멈췄다. 남자가 죽은 것이다. 전원이 침묵한 틈에 한숨 소리가 들렸다. 박해길이었다. 그는 양수빈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수빈아. 치료해줄 수 있을까?”

“…읍급처치는 할 수 있어. 붕대랑 약도 있으니까. 진통제도 줄게. 그래도 돌아가서 다시 한번 상처를 봐야겠어.”

박해길이 응급처치를 받는 동안 경호원들을 바라봤다. 박해길을 구하기 위해 뛰어간 경호원들. 모두가 박해길 같을까?

‘적어도 저 3명은 아니군.’

불만스럽게 박해길을 보는 3명. 의식불명의 1명은 모르겠고, 다른 2명은 박해길을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양다리를 골절한 1명은 멍하니 시체를 보고 있다.

곧 응급처치가 끝나고 양수빈이 일어났다. 그녀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저기… 그 괴물 벌레들에게 물려도 감염되나요?”

“그 괴물들이 좀비면 몰라도, 좀비가 아니니까 감염되진 않을 거야.”

“하아. 다행이다.”

“다른 병에 걸릴지도 모르지만.”

“네?”

“괴물 벌레잖아. 다른 바이러스가 있을지 어떻게 알아?”

“…그, 대처법은 없나요?”

“나야 모르지. 난 의사가 아니니까.”

나는 그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걸까. 주택에서 구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나는 그들을 구했다. 벌레들에게 당하는 남자처럼 다친 것도 아니고 사지 멀쩡한 자들이었다. 게다가 전투력도 별 볼 일 없어서 말썽도 일으킬 것 같지 않은 일반인들.

‘나채영이 사람을 구해오라 하긴 했으니까. 편한 생활을 위해선 노동력이 필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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