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6화 > 1876. 이터널 에덴
성악초등학교에 들어온 박해길은 본관 1층 의료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의료기계는 없고 책상과 약품, 간이침대만 달랑 놓여 있는 간단한 의료실이었다.
벌레에게 씹힌 오른손은 여기저기 찢겼다. 제대로 돈 치료를 받긴 했으나 최소 한 달은 오른손을 제대로 사용하기 힘들었다.
한 달.
길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나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지금 상황에선 한 달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 남자의 말대로 무시했더라면….’
오른손이 다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벌레에게 물어뜯긴 남자는 결국 끌려가 벌레의 먹이가 되겠지만, 그를 구했어도 과다출혈로 죽지 않았던가. 결국, 무의미한 짓이었다. 잃은 것은 그의 손과 인간으로서 그를 구하려고 했었다는 자기만족뿐이다. 아니, 그 자기만족도 없었다.
‘그 남자가 바로 나서주었더라면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 남자는 나서지 않았다. 차갑고 무심한 눈으로 괴물 벌레에게 물어뜯기고 끌려가는 남자를 구경했을 뿐이다.
‘그 강력함 힘이 왜 그런 남자에게 있는 거지?’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었더라면 더 잘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의미 있게. 보다 도움이 되도록.
박해길은 멀쩡한 왼 주먹을 꽉 쥐었다. 청승맞게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다.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드르륵.
문이 열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양수빈이 들어왔다. 양수빈은 피곤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봤다. 씻고 왔는지 몸에서 비누 향이 났다.
“수빈아. 샤워하고 왔어?”
“응. 더워서 그런지 땀으로 축축해서.”
“웬일이야? 샤워는 항상 밤에 하지 않았어? 그게 가장 효율적이라면서.”
“……지금은 그때가 아니잖아. 오른손은 어때?”
“진통제 효과가 좋은가 봐. 전혀 아프지 않아.”
“꽤 강한 진통제를 썼으니까.”
잠깐의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박해길은 조심스럽게 침묵을 깨뜨렸다.
“…유진 씨랑 대화한다고 하지 않았어? 유진 씨는 뭐래?”
“다행히 PS 경호랑 계약하겠대. 단, 돈은 지급할 수 없어. 대신 일하는 만큼 식량이나 간식 등을 준대. 그 외에도 일을 잘하면 보상으로 특권을 준다고 했던가. 문제는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거야.”
“마지막 기회라. 이것도 다 네 덕분이겠지. 여기엔 의사가 필요하니까.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거기서 죽었을지도 몰라. 그 근육 괴물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놈이었으니까. 고마워, 수빈아. 진심으로.”
“진심으로 고마우면 내 부탁을 들어줘.”
“부탁?”
“더는 오지랖을 부리지 말아줘. 네 오지랖의 도움을 받은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려니 불안해 죽겠어. 군대에서 전역하게 된 것도 그 오지랖 때문이잖아. 이번에도 그 오지랖 때문에 오른손을 영영 잃을 뻔했고. 이름도 모를 타인이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 행동했으면 해. 지금 세계가 어떤지는 너도 알지? 오지랖은 전혀 도움이 안 돼.”
“…….”
“대답해줘.”
“……내게 유진 씨처럼 힘이 있었다면 네가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을 텐데.”
“해길아!”
“네 말이 맞아. 내 주제에 오지랖은 만용이었고 사치였어. 그게 항상 내 인생을 망쳤지.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거야. 약속해.”
“고마워, 해길아.”
양수빈은 박해길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박해길은 작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마주 끌어안다가 멈칫했다.
목덜미에 남아 있는 빨간 점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7월 31일. 여름이 한창일 때다. 모기에게 물리는 일은 흔했다. 지금도 방심하면 모기가 날아오지 않는가.
‘…죽어가는 시체를 목격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남자가 내게 한 번 더 기회를 준다고?’
뭔가 이상하다. 성유진을 알게 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 성격은 워낙 특이하고 직설적이라 행동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와 계약하기로 했으면서도 명령을 어겼는데 봐준다? 왜? 무력이 아쉬워서? 근육 괴물과 싸워서 이길 정도의 강자가?
“…….”
아니다. 아닐 것이다. 그에겐 의사가 절실히 필요할 뿐이다. 그뿐일 것이다.
박해길은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불안 속에서도 시간은 흘렀다.
***
이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PS 경호는 성악초등학교 보안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건장한 남성들이 추가되었고 지금은 30명가량이 되어 3팀으로 나뉘었다.
박해길은 1팀 소속의 보안팀장이었다.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PS 경호 소속의 경호원들은 모두 나뉘어 각 팀에서 한자리를 꿰찼다. 보안팀의 실세라고 할까.
성악초등학교 소속의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급료를 받지 않는다. 대신 작업을 한 만큼 음식 혹은 생필품을 보상으로 받는다. 보안팀은 거기서 특권을 받는다. 시설 일부는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 남들이 작업할 때 가만히 서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는 점. 좀비는 기본적으로 멍청해서 위험한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무기를 지금 받은 거지.’
총. 그것도 소총과 방탄복 등을 받았다. 총을 어디서 구했는가 싶었는데, 연구팀장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연군팀장 나채영 박사는 박해길도 2~3번밖에 본 적 없었다. 그녀는 성유진과 함께 본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안팀장이라 하더라도 본관에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본관에는 허락받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알게 모르게 직위가 나눠지고 있어.’
특수한 기술을 가진 자들은 본관에 들어가 생활할 수 있었다. 저번에 들어온 40데 남자는 처자식들과 함께 본관에서 부유하게 생활한다. 그의 직업은 기계 수리공이었다. 공장 기계를 주로 수리하던 사람.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운동장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생활한다. 박해길도 컨테이너 박스 중 하나에 들어가 생활했다. 보안팀장이란 직함 덕분에 혼자서 박스 하나를 사용할 수 있었다.
‘여긴 별세계다. 한국이면서도 한국이 아닌 곳.’
박해길은 초등학교 정면 입구로 향했다. 운동장 옆, 족구장에서 족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바깥은 좀비로 인해 엉망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여긴 특별한 곳이었다.
“오셨습니까? 그럼 수고하십시오.”
보안 3 팀장이 그에게 인사했다.
“수고했다.”
인수인계 없이 교대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의 부하였던 보안 3 팀장은 깔보는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는 지나쳤다. 그때 벌레에게 당한 오른손 때문이다. 오른손잡이였던 박해길에겐 치명적이다.
이제 모니터로 밖을 감시하면서 가끔 순찰을 돌며 시간을 보내면 된다. 박해길은 보안 1 팀원들과 상무적인 인사를 주고받은 박해길은 팀장 자리에 앉았다. 그 옆에 앉은 팀원은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동영상 사이트에 들어갔다.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 하려던 박해길은 곧 눈을 치떴다. 동영상 속에는 한 남자가 장도리를 휘두르며 변종과 싸우고 있었다. 놀라운 건 장도리를 휘두를 때마다 번개가 튄다는 것이었다. 마치 성유진이 칼을 휘두를 때마다 전격이 튀는 것처럼.
“…저건 누구지?”
“뇌제(雷帝) 반호성이요. 모르십니까? 대전의 수호자 반호성. 뉴스에도 몇 번 나왔습니다. 사실 뇌제라기보다는 대전 토르라고 더 많이 불립니다.”
“대단한가 보군. 대전은 서울보다 상황이 낫나?”
“아뇨. 그건 아닙니다. 좀비는 여전히 돌아다니고, 최근에는 전라북도 익산이 변종이랑 좀비 때문에 끝장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영상 무편집본을 보면 진짜 장난 아닙니다. 무슨 좀비가 개미 떼처럼 바글거리더니……. 아, 거기 근처에 있는 군부대도 D 바이러스 때문에 망했다고 합니다.”
“영상만 보면 변종을 쉽게 죽이던데.”
“혼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잘 보면 무장한 병력들이 좀비들을 막고 있습니다. 대전 토르 이 새낀 그냥 막타만 치는 거죠. 애초에 번개도 3번밖에 안 칩니다. 조루 새끼예요. 조루 새끼.”
“유진 씨에 비하면 어때?”
“비교도 안 되죠. 이 새끼가 뇌제면 유진 님은 뇌신입니다. 제우스! 일주일 전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지 안습니까.”
일주일 전, 웬 미친 새끼가 성악초등학교로 시끄러운 바이크로 질주하며 주변 좀비 수백 마리를 끌고 입구로 돌진했다. 성악초등학교에서 여자를 성추행하다 걸려 추방당한 놈의 보복이었다. 놈은 성유진에게 목이 베여 죽었다. 그 머리는 게양대에 걸려 3일 동안 전시되어 분위기가 말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수백 마리의 좀비 떼였다. 보안팀들은 총출동해서 긴장하고 있을 때, 성유진은 혼자서 좀비 떼에게 달려들어 모조리 썰어버렸다. 1시간도 되지 않아 좀비는 전멸했다.
“…그때 유진 씨는 약을 먹었다.”
“비스터 I 말입니까? 그거 흥분제라 실질적으로 전투 능력은 오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고통이랑 두려움은 사라진다고는 하는데 써본 적이 있어야 말이죠. 비스터 II는 한 알 먹으면 전투 기계가 된다고 합니다.”
“비스터 II? 그런 것도 있나?”
“아, 이틀 전에 들어온 신입들이 말하던데요. 그거 먹으면 일반인도 일시적으로 신체 강화 각성자급의 초인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화 혈청이란 게 있는데… 그거 맞으면 진화해서 각성한다나 뭐라나.”
“그런게 존재 하다고?”
“그놈들도 소문으로만 들어서 확실하지 않습니다. 근데 왠지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거만 맞으면 저도 각성자가 돼서 유진 님이랑 온갖 미녀들이랑… 크으으! 상상만 해도 짜릿합니다!”
“…….”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성유진은 여자를 밝히기로 유명했다. 대놓고 행동하지는 않지만, 은근히 미녀를 챙긴다.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출신성분이 불명확한 미녀가 오면 절대로 돌려보내지 않으니까. 남자가 올 때는 가차 없이 내보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리고 수빈이도….’
아니다.
박해길은 고개를 저었다.
양수빈과 성유진이 만난다는 말은 없었다. 그 어디에서도 소문이 나지 않는다. 성유진은 매일 다른 여자에게 치근덕거리느라 바쁘고, 양수빈은 환자들을 진료하기 바쁘다.
“팀장님! 누가 옵니다! 이 새끼들 검은 옷을 빼입은 걸 보니 조폭 쪽 같은데요?”
박해길은 서둘러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색 옷을 빼입은 자들이 자전거 패달을 밟으며 정문 입구로 오고 있었다. 자전거. 소리에 민감하고 어지러운 도로 상황 때문에 바이크와 자동차를 사용하기 어려워진 지금 상황에서 자전거는 최고의 이동 수단이었다. 달리는 좀비들보다 자전거가 훨씬 빠르기도 하고.
그들 가장 앞에는 한 여자가 있었다.
“…태왕이군.”
경호업체를 운영해서 뒷세계에 나름 빠삭한 박해길은 여자가 태왕의 보스인 구태희인 걸 바로 알아차렸다. 구태희는 초인종을 누른 뒤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태왕의 구태희다. 성유진과 만나서 대화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