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8화 > 1878. 이터널 에덴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성유진은 계약서에 지장을 찍자마자 움직이기로 했다. 물론 혼자 움직이지 않았다. 보안팀 30명 전원을 데리고 갔다. 이참에 보안팀을 시험할 생각이었다. 도움이 전혀 안 된다고 판단하면 싹 다 물갈이할 것이다.
별생각 없이 보안팀을 전부 데려간 것은 아니다. 보안팀이 없어도 성악초등학교의 담장은 높기에 좀비가 침입할 수 없다.
게다가 성악초등학교 주위에는 좀비가 별로 없었다. 몇 시간 자리를 비우더라도 아무 문제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성악초등학교 내부의 질서는 이미 잡혀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성유진의 착각이자, 오산이었다.
현 성악초등학교로 대피한 200명의 사람 중에는 성악초등학교의 질서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불만이 있어도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성유진이 있으니까. 그리고 총기로 무장한 보안팀이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보안팀이 없다. 좀비 수백 명을 썰었던 성유진도 없었다.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했다. 대표적으로 이름만 대도 알만한 기업의 마케팅 부서 부장이었던 유동학이었다.
그는 모든 게 불만이었다.
운동장에 널리고 쌓인 컨테니어박스에서 생활하는 것도, 식당에서 제공되는 맛 없는 기본 식사도, 보안팀이 거들먹거리는 꼬락서니도, 무거운 물건을 옮기기만 할 뿐인 단순노동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평소 자신이 무시했던 기술자들이 이곳에서 우대받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심지어 학교 건물 뒤편에 만들어 놓은 임시 거처에서 지낸다. 마찬가지로 컨테이너로 만든 건물인데 운동장에 널린 것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유동학은 항상 기회를 봤다. 정치든, 뇌물이든, 협박이든 올라가기 위해선 뭐든지 할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 했다.
그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마찬가지로 성악초등학교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자들을 모았다. 모두 D 바이러스가 터지기 전에는 나름 떵떵거리며 살던 자들이었다. 자신처럼 기업의 부장이나 과장, 건물주, 폰팔이 등등.
“성유진과 보안팀이 밖으로 나갔습니다. 듣자 하니 몇 시간 뒤에 돌아온다고 합니다. 이건 기회입니다. 이참에 저희가 성악초등학교를 운영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놈이 얼마나 개판으로 이곳을 운영하는지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성악초등학교는 많은 사람을 위해 운영되어야 합니다. 차별 없이 말이지요.”
“유동학 씨 말이 맞습니다. 차별이 너무 심합니다. 특히 성유진 그놈은 주먹질도 아무렇지 않게 합니다. 저번에 제 아들이 컴퓨터 게임 좀 하고 싶다고 본관에 들어갔는데 성유진에게 얻어터졌습니다. 애 팔이 부러졌다고요 팔이.”
“금지 구역에 멋대로 들어간 건 좀 그렇긴 해도 처사가 너무 심하군요. 아무리 지금 법이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다고는 해도… 쯧.”
“라면 한 봉지 먹으려면 사흘을 일해야 합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내 밑에서 일하던 박성식이라고 압니까? 그놈은 처자식들과 함께 매일 스테이크를 썰고 있답니다. 글쎄 저한테 와서 자랑하더니까요? 사회에서 내 눈치만 보던 놈이….”
컨테이너 하나를 점령한 그들은 하나같이 불만을 토해냈다. 시간이 점점 흐른다. 그러나 유동학은 그들을 말리지 않고 부추겼다. 그래야 불만이 점점 쌓일 테니까.
그리고 누군가가 유동학이 원하는 질문을 던졌다.
“유동학 씨. 아까 기회라고 하셨잖습니까. 뭘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여기 성악초등학교의 주인은 성유진입니다. 그놈이 없을 때 관리하는 건 그놈의 여자인 나채영 박사입니다. 총을 만든 것도 그 여자의 실력이라지요.”
“혹시 그 여자를 죽이자는…?”
“어이쿠! 큰일 날 소리를! 잡아서 설득해야지요. 그래야 우리에게도 무기를 만들어주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순순히 우리를 따르겠습니까?”
“뭐, 조금 겁박해도 괜찮겠지요. 중요한 건 모두를 위해서가 아닙니까. 일단 붙잡아 놓고 천천히 설득하면 됩니다.”
“성유진이 돌아오면 어쩝니까? 일주일 전에 놈이 수백 마리의 좀비를 베는 걸 떠올리면 지금도 다리가….”
후들후들. 중년 남자는 사정없이 다리를 흔들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놀랍게도 과장이 아니었다.
“놈도 인간입니다. 여기서 총에 맞으면 죽어요. 여기서 군대 안 갔다 오신 분 있습니까? 무기고에서 총만 손에 넣으면 됩니다. 그 후에 저희가 성악초등학교를 관리하면 됩니다. 보안팀이 돌아오더라도 총으로 응전하면 됩니다. 초등학교에 담이 얼마나 높은지 아시지 않습니까. 유리한 건 우립니다.”
“…우리끼리 할 수 있겠습니까? 수가 좀 적은 것 같은데.”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야죠. 본관 2층에 있는 무기고만 털면 됩니다. 무기고만.”
“거기가 그렇게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닐 텐데….”
“아까 말한 박성식이란 기술자를 잡아서 무기고를 열게 하죠. 분명 장비가 있을 겁니다. 무기고에서 총만 손에 넣으면 나 박사라는 여자도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 수감실에 갇힌 자들도 아십니까?”
“그 문제아들 말입니까?”
성악초등학교에서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면 보안팀에게 잡혀 수감실로 이송된다. 간단히 말해 수감실은 벌 받는 곳이었다. 도를 넘는 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맨몸으로 성악초등학교 밖으로 추방된다.
“그놈들을 설득합시다. 불만이 많을 겁니다. 그렇게 사람이 모이면… 우리에게 동조하는 자들이 늘어날 겁니다. 이 생활에 누가 만족하겠습니까?”
사람이 모이면 된다. 사람은 모일수록 강력해진다. 그게 상식이다. 성유진 같은 초인은 상식 밖의 존재고. 그리고 현재 그 상식 밖의 존재는 이곳에 없다.
모두가 눈을 빛냈다. 구체적인 계획이 오가고 행동을 실시했다. 우선 박성식을 비롯한 기술자들을 붙잡기로 했다. 곧 점심시간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1층 급식실에서 음식을 배급받고, 기술자들을 포함해 우대받는 자들은 2층 식당에서 식사한다. 2층으로 올라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유동학은 사람을 나눴다. 한쪽은 기술자들, 다른 한쪽은 수감실을 노리는 것.
그들은 사람들을 포섭했다. 포섭된 사람까지 합해 총 60명이 넘었다. 나머지는 일부러 포섭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정으로 평등을 원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기술자들을 포위하고 구속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반란 세력 쪽에 사람이 많았고, 기술자들은 습격에 대해 전혀 몰랐으니까.
“우리에게 협력하십시오. 이 초등학교는 차별 없이 운영되어야 합니다. 설마 지금 상황이 제대로 된 상황이라고 보십니까?”
“은혜도 모르는 새끼들. 사실 너희들이 좀 불쌍하긴 했는데… 이젠 아니야. 인간은 풀어주면 본성을 드러낸다고 하던 성유진 님의 말이 맞았어.”
유동학은 눈살을 찌푸렸다. 붙잡은 기술자는 총 6명이다. 전원이 적대적이다. 협력할 기색이 전혀 없었다.
“폭력적으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서 여러분 같은 기술자들이 중요한 건 누구보다 알고 있으니까요. 저희와 함께하시죠. 여러분도 차별 없이 대우해드리겠습니다.”
“손에 쥔 몽둥이부터 놓고 말하시지? 니들은 그냥 권력을 원할 뿐이잖아. 여기선 돈도 통하지 않고, 사회에서 쌓은 경력도 통하지 않으니 죽을 맛이겠지. 성유진 님이 오면 니들 전부 죽을 거다. 내가 그분 성격 아는데, 진짜 장난 아니거든. 아, 어쩌면 죽지도 못할 수도 있겠네. 수감실 아래에 특수 수감실 있는 거 아나? 거긴 진짜 지옥이야. 내가 너라면 그냥 여길 떠났다. 처음부터 그딴 짓도 안 했겠지만.”
“…아주 단단히 세뇌된 모양이군요.”
유동학은 짜증이 났다. 별것도 아닌 놈이 자신을 동정하는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그는 몽둥이로 기술자들을 팼다. 허나 기술자들은 고집불통이었다. 협력하겠다고 말하는 놈이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이 죽기 전에 몽둥이질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죽일 순 없었다. 폭력을 쓴 것도 선을 약간 넘은 거다. 죽이게 되면 명분이 붕괴한다. 그리고 기술자들은 이후에도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띠링!
스마트폰에서 메시지가 날아온다.
“여러분. 수감실에 갇혔던 사람들이 저희에게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와아아아!”
일부 수감자들은 겁에 질려서 협력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수감자들 대부분이 힘 좀 쓰는 놈들이니… 앞세우면 도움이 될 거야.’
그때였다.
천장 스피커가 켜지더니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하아. 반란이라니…. 이러면 유진의 말이 맞잖아.
여자 목소리.
나채영 박사의 것일 확실했다. 초등학교 내에 카메라가 여기저기 달려있다보니 걸린 모양이다. 유동학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으니까.
-마지막 기회를 줄게. 생필품을 약간 챙겨줄 테니 초등학교를 나가줬으면 좋겠어.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은 유명하잖아? 절이 싫다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말도 있고. 좋게 끝내자. 떠나줘.
‘웃기는 소리. 이곳에서 떠나면 좀비에게 잡아 먹힐 뿐이다.’
사실 이곳이 싫은 게 아니다. 방주와도 같은 이곳을 누가 싫어하겠는가. 그들이 싫은 건 밑바닥에서 일하는 처지다.
“저 여자는 일방적으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나가면 죽을 뿐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평등이지요! 보십시오! 소통할 생각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저 여자에게 가서 우리가 원하는 걸 알려줘야 합니다!”
힘있게 말한 유동학은 최대한 빨리 움직일 때임을 알았다. 시간을 주면 본관에 있는 자들이 총기로 무장할 것이다. 불리해지는 자신이 될 수 있었다.
“갑시다!!”
유동학이 뛰어가자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간다. 본관과 멀지 않았기에 곧 착했다. 본관 입구는 당연하다는 듯이 철제 셔터가 닫혀 있었다.
‘젠장. 창문 쪽도 철창이 있군. 철창을 자르기엔 시간과 장비가 없다. 4층과 5층 창문에는 철창이 없으니 빨리 사다리를 가져와 그리로 올라가야 하나?’
빵빵!
차 경적이 울렸다.
일할 때 쓰는 트럭이었다. 트럭 운전자는 수감자였다. 급식 문제로 주방 아줌마와 싸워서 수감실에 갇힌 중년 노인.
“비켜! 이걸로 확 뚫어버릴 테니까!”
수감 생활에 분노한 그는 그대로 입구를 들이받았다.
콰아앙! 쨍그랑!
셔터와 유리문이 박살 났다. 노인은 그대로 운전대에 머리를 처박고 기절했다.
‘미친놈.’
유동학은 살짝 질렸으나, 이건 기회였다.
“문이 열렸습니다! 갑시다!!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
사람들이 고함치며 본관을 향해 뛰었다.
-멍청이들.
스피커를 통해 나채영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직후.
두두두두두두두두.
‘헬기 소리?’
아니다. 헬기 소리라고 하기엔 소리가 앙증맞았다. 그건 드론이었다. 사람 상체 크기의 드론. 총구가 달린 전투 드론 5대가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반겼다.
-방금 유진의 대답이 들어왔어. 죽이지 말고 제압하라더라. 아무래도 너희를 그냥 죽일 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유동학을 비롯한 사람들은 나채영의 말을 들을 정신이 없었다. 전투 드론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그러나 총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총구에서 날아온 건 테이저 탄환이었다.
테이저건. 물론 평범한 테이저건은 아니었다. 갈치늄으로 개량했기에 테이저 탄환의 크기를 줄였고, 빗맞아도 평범한 인간은 기절한다.
탓탓탓탓탓!
전투 드론이 테이저를 쏘는 소리는 묘하게 중독적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를 음미하는 자들은 없었다.
“아아아아아아악!”
“씨발!!!”
“비, 비켜!!”
아비규환. 전투 드론 5대를 보는 순간 사람들은 전의를 잃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이 아무리 뛰어도 전투 드론을 떨쳐낼 수 없었다. 전투 드론은 날아다니니까.
1분이 지나자 두 발로 서 있는 인간은 없었다. 몇몇은 똥오줌까지 지렸다.
-전투 AI의 첫 실전은 성공적이네. 그나저나… 하아. 이걸 다 언제 다 수습해?
나채영의 한숨은 계속 늘어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