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1화 > 1881. 이터널 에덴
5층까지 올라왔을 때, 보안팀이 지친 게 눈에 보였다. 층마다 괴물 거미를 6~7마리 정도 씩 처리했다는 걸 감안하면 5층까지 오면서 20마리 넘게 괴물 거미들을 사살했다.
대단한 공적은 당연히 아니었다. 내가 볼 때 이 괴물 거미들은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놈들이었다. 그런데 겨우 20마리를 잡고 헉헉거린다? 사람이 전투에 임하면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건 당연히 알고 있지만, 이놈들은 보안팀이라는 나름 전문가가 아닌가?
‘게다가 6명이 다쳤지.’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의 중상은 없었다. 나는 이 6명을 보안팀에서 해고하기로 정했다. 성악초등학교에서 추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부상자는 응급처치 후 이송한다.”
박해길이 말했다. 오른손이 병신이 되고 보안팀에서 은근히 무시 받던 그는 실전에서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었다. 나는 뒤에서 지켜만 봤다.
구태희는 내 옆으로 다가와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피우나?”
“안 펴. 여자들은 담배 냄새를 싫어하거든.”
“글쎄. 난 좋아하는 편이다만.”
“그거 담배도 아니잖아.”
겉으로는 담배처럼 보여도 담배가 아니다. 냄새로 알 수 있다. 대마초로 만든 궐련이다. 그녀에게선 마른 풀 타는 냄새가 났다.
“내가 대마초 중독이라. 이게 없으면 못 산다.”
대마초의 영향인지 구태희의 몸이 약간 느슨해졌다. 그래도 눈빛만큼은 평소처럼 날카로웠다.
“저 남자, 박해길이라고 했던가?”
“어. PS 경호 업체의 사장이었지. 특수부대 출신이긴 한데. 어디 출신인지는 몰라. 관심도 없고.”
“쓸만하군. 저런 녀석은 흔하지 않지. 하물며 지금 세상에서는 더욱더.”
“글쎄.”
박해길이 쓸만하다? 확실히 지금은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나와 의견이 다른가 보군. 이유를 들을 수 있겠나?”
“의견이야 다를 수도 있지.”
“사람 보는 눈에는 제법 자신 있다만, 가끔 실수하긴 하지. 너 정도 되는 남자가 단순히 마음에 안 든다고 평가 절하하지 않겠지. 내가 놓친 기준과 정보로 저 남자를 평가했을 터. 네 의견도 내게 도움이 될 테니 한번 말해 봐라. 정 싫다면 상관없다.”
“말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지. 저놈 오른손이 왜 작살난 줄 알아? 오지랖 때문이야. 내 명령을 무시하고 사람을 구하려다 저 지랄이 됐지.”
“…그런가. 그건 좀 어렵군.”
“그리고 지금 여기서 지휘를 잘한다고 해서 뭐해. 변종 하나 나타나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데 내 손모가지를 걸 수 있어. 지금 이 시대에서 중요한 건 지휘력 같은 게 아니야. 힘이지.”
“힘이라….”
“만약에 말이야. 내가 너를 포함한 부하들 100명이랑 맞짱뜨면 누가 이길 것 같아? 그쪽은 방검복에 돌격소총까지 무장한 상태에다가 전장도 유리한 곳이야.”
“…….”
구태희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대마초를 훅 빨아들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나와 그녀의 전투가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이어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큰일이군. 정면으로 싸워서 이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전차가 있어도 이길 것 같지가 않군.”
“정면으로라. 그럼 암살로는 가능성 있고?”
“당연하다. 너도 인간인 이상 방심은 할 테지. 음식을 먹어야 하고, 배변 활동을 할 테고, 오락을 위해 의미 없는 짓도 할 테지. 기계가 아닌 이상 사람은 언젠가 방심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다. 이렇게.”
구태희가 왼손에 작은 칼을 쥐고 내 목을 겨누었다. 손가락보다 짧은 칼이지만, 인간을 죽이기엔 충분한 길이였다.
놀랐다.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반응하지 못했다. 손을 움직일 때도 대마초를 빨기 위해 손을 움직인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녀의 말대로 난 방심 했던 것이다.
“괴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인 이상 죽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대단하네. 근데 너무 상식적이잖아.”
“…상식적?”
나는 칼을 쥔 구태희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밀어내 떨쳐내는 게 아니다. 잡아서 당긴다. 작은 칼날이 피부를 벤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칼날은 동맥과 정맥을 끊으며 파고들었다.
목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이물감.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까지. 아주 좆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눈앞에는 피투성이가 된 구태희가 경악하고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조폭 보스는 저런 표정으로 놀라는군.’
손에서 힘을 뺐다. 그녀가 다급히 작은 칼을 빼냈다.
“이런 씨발. 미친 거냐?!”
“잘 봐. 안 죽었어.”
말하기 힘든 걸 억지로 말했다. 성대 쪽에도 상처가 간 모양이다. 나는 고통이 느껴지는 상처 부위에 정신을 집중했다. 구태희이 입이 벌어졌다. 하나밖에 없는 눈은 동그랗게 커진 상태다. 그 흔들리는 눈동자에 비치는 건 빠른 속도로 아물고 있는 상처였다.
30초도 지나지 않아 상처는 말끔하게 사라졌다. 새빨간 피만이 상처를 증명할 뿐이다.
“심장을 터트리고 머리를 베면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넌 날 괴물이라고 불렀지. 괴물이 왜 괴물이겠어. 상식이 통하지 않으니 괴물이지. 앞으로는 너무 상식적으로 생각하지 마.”
“너 같은 인간이 많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만….”
“많지 않아도 있겠지. 병신들이랑 미친놈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니까.”
“이건 경고인가.”
“뭐, 그렇지. 적당히 잘 지내려고 하면 꼭 뒤통수를 치려는 놈들이 있거든. 그럴 때는 내가 가진 힘을 살짝 보여주는 거지.”
그럼 알아서 기니까.
당장 태왕이 내게 협력적으로 나오는 것도 내가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적으로 돌릴 바에야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아군으로 남는다. 그게 더 이득이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이건 내 경험에 의한 거다.
‘너무 이득만 취하려고 들면… 뱀파이어 형사 꼴이 나겠지.’
착취만 계속했다가 전 세계가 반기를 들지 않았던가. 심지어 대한민국 정부까지. 물론 세계 반란의 대가로 세계는 멸망했지만.
‘오랫동안 착취하려면 성질 좀 죽여야지.’
나는 목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각성자는 능력을 사용할수록 점점 성장한다고 들었다. 설마 넌 자해라도 하는 거냐?”
“가끔씩 하긴 해. 나 박사는 별로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긴 한데. 능력을 성장시키려면 그게 맞거든.”
상처 부위에 정신을 집중하면 더 빠르게 회복하는 것도 덕분에 알았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그런 미친 짓을 하지 않더라도 넌 이미 충분히 강할 텐데.”
“좆밥들에게 당할 수는 없잖아. 아까도 좆밥들이 폭동을 일으켰어. 그놈들은 내가 약하다고 판단한 순간 내 걸 빼앗으려 든다고. 수련은 귀찮고, 아픈 것도 싫지만 내 걸 빼앗기는 건 개좆같거든.”
“…네가 어떤 놈인지 이제 좀 알겠군.”
금세 냉정을 되찾은 구태희는 새로운 대마초 궐련을 꺼내 입에 물었다. 나는 창문에 몸을 기댔다. 아까 목을 회복하면서 체력이 꽤 소모됐다.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회복 덕분에 체력이 회복된다. 회복은 상당히 도움이 되는 능력이었다.
3분 정도가 지나고 구태희가 손을 털었다.
“휴식 시간은 이쯤이면 충분하겠지. 움직이지.”
6층으로 향했다.
6층에서는 총성이 울리지 않았다. 괴물 거미가 한 마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구석까지 샅샅이 뒤졌음에도 보이지 않았다.
“거미들이 방금까지 이곳에 있었던 건 확실합니다.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박해길이 말했다. 그의 얼굴은 심각했다.
“거미들이 갑자기 움직인 이유는 하나뿐이지. 여왕 거미가 거미들을 호출한 거다. 총력전이군.”
구태희는 혀를 차며 말했다. 이쪽이 무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총력전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괴물 거미는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강하다. 괴물 거미 일부를 고기 방패로 삼아 돌격해오면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단단히 준비하고 가야지.”
7층도 8층도 마찬가지로 비어있었다. 9층은 산란장으로 보였다. 알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새끼 거미도 있었다. 새끼 거미라고 해도 사람 머리통만 했다.
“살려두면 화근이 될 터. 새끼라고 봐주지 마라. 전부 죽여.”
구태희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들은 철퇴를 휘두르며 새끼 거미와 알들을 박살 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무전기를 켰다.
“나 박사. 보고 있지?”
-…전부 보고 있지는 못해.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뒷수습으로 바쁘니까. 반란에 가담한 자들이 너무 많아서 수감실이 부족해. 따로 구속구를 제작해야 할 정도야.
“그런 자잘한 건 아랫놈들에게 맡겨. 저 새끼 거미 필요해? 연구 대상으로.”
-괴물 거미의 부산물 중에서도 얻을 수 있는 건 있겠지. 근데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네. 나는 바이오닉스가 아니라 테크놀로지스트니까. 아까 말한 여왕 거미의 방열성이 뛰어난 거미줄처럼 특수한 소재가 아니라면 기술 연구를 하는 게 더 이득이야.
“기술 연구는 느리잖아.”
-나 혼자 하니까 그렇지. 연구자가 더 많으면 좋겠지만… 믿을 수 있는 연구 인력을 구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너도 알잖아.
“음.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지. 강제로 데려와서 일을 시켜봤자 단순노동도 아닌데 제대로 할 리 없을 테고.”
대충 공감해준 나는 곧 본론을 꺼냈다.
“전투 드론 4대. 지원 가능하지? 그 병신들도 전부 제압했잖아.”
-…여기서 거기까지 전투 드론을 날려 보내라고?
“날아오면 금방이야. 배터리도 개량해서 충분하잖아. 이쪽은 전면전을 벌여야 해. 거미 놈들이 아주 작정하고 총력전을 준비해뒀을 게 분명해. 거미 놈의 뜻대로 휘둘릴 수는 없잖아.”
-보냈어. 3분… 아니, 2분 내로 도착할 거야. 드론이 뻗으면 잔해는 반드시 챙겨. 새로 만드는 것보다 고쳐서 사용하는 게 몇 배나 더 효율이 높으니까.
“땡큐.”
2분.
우리는 조금 기다리다가 10층 계단 위로 올라갔다.
조용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긴장했다.
‘비스터 II 지금 먹을까? 전투 드론이 활약할 수도 있잖아. 자폭 드론은 통하지 않았지만, 전투 드론은 또 다르고….’
-빌딩 근처에 도착했어. 여왕 거미가 쳐다보고 있네. 어떻게 할까? 지금 당장 공격해?
“기다려.”
여왕 거미의 어그로를 끄는 편이 전투 드론이 더 효과적으로 화력을 뽐낼 수 있을 테지. 나는 앞장서서 10층 사무실 문을 발로 차며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