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3화 > 1883. 이터널 에덴
거미줄 고치에 갇혀 있던 여자는 천연 미인이었다. 깨끗한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 치장은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인간 자체가 아름답다는 걸 말하는 듯한 외모다.
독수리가 그려진 야구 점퍼와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낡은 검은색 티셔츠는 낡았는데 가슴은 커다란 산처럼 솟아 있었다. F컵이 확실했다. 허리는 잘록했다.
풍만한 가슴 부위에는 구멍이 있었다. 괴물 거미에게 심장이 꿰뚫려 죽은 것 같다. 엉덩이는 크고 탄탄했는데 청 핫팬츠를 입어서 허벅지와 종아리를 노출했다. 그에 약간 이상함을 느꼈다.
‘핫팬츠를 입었다고? 좀비가 돌아다니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는 무더운 여름이긴 했다. 하지만 바깥에는 좀비가 돌아다닌다. 좀비에게 살짝 물리기만 해도 마찬가지로 좀비가 되어버리는 세상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최대한 몸을 감쌌다. 노출을 줄이고 두껍게 입었다. 나무 목판을 몸에 감싸는 놈들도 흔하지 않았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좀비에게 물리더라도 괜찮은 두꺼운 옷을 만드는 방법이 널리 퍼져 있었다. 종이를 겹쳐서 몸을 보호하는 방법도 있었다. 더워 죽는 게 좀비에게 물려 죽는 것보다 나으니까.
‘오른쪽 종아리에 물린 상처가 있군. 좀비에게도 물린 건가?’
좀비에게 물렸다고 해서 바로 좀비가 되는 건 아니다. 사람의 상태에 따라 뇌사하는 시간이 달라진다. 잘 버티면 12시간 이상. 상태가 심각하면 1분 만에 좀비가 되는 경우도 있다.
운동화가 눈에 들어온다. 주황색의 운동화. 운동화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물건을 보는 눈은 있다.
‘비싼 거군.’
최소 70만 원 이상할 것같아 보이는 운동화였다.
나는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안타까움에 탄식을 내뱉었다. 창백한 피부에는 생기가 없다. 가까이 가면 부패한 냄새가 났다. 거미줄 고치에 있었던 덕분인지 몰라도 구더기 같은 작은 벌레는 꼬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까.
‘이런 미녀를 여기에 버려둘 순 없지. 양지바른 곳에 묻어줘야겠어.’
학교 뒤편에 무덤을 만들자. 마침 보안팀 몇 명이 죽었으니, 무덤을 만들어 약간이나마 민심을 확보하는 거다.
‘크, 설계 지렸고.’
근처에 있는 거미줄로 미녀의 몸을 감쌌다. 안에 시체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모르도록.
‘대놓고 시체를 가져가면 이상한 소문이 나겠지. 내가 죽은 시체를 범한다던가. 내가 시체에 흥분하는 네크로… 네크로… 네크로맨서 인줄 알겠지.’
거미줄로 그 몸을 꼼꼼하게 감싸고 등에 멨다. 묵직했다. 돌아가는 길은 약간 피곤할 것 같다.
‘전투 드론도 챙겨야겠지. 2대는 개박살 났던 것 같던데.’
전투 드론을 보고 한숨 쉴 나채영의 모습이 그려진다. 분명 그럴 것이다. 내기해도 좋았다.
나는 나머지 거미줄도 챙겨서 보안팀에게 줬다. 챙기라는 뜻이었다.
“여왕 거미의 거미줄. 우리도 챙길 수 있나?”
“알아서 챙겨가. 충분히 많으니까.”
구태희의 물음에 대충 대답했다. 어차피 답을 알고서 물어보는 거다. 구태희의 부하들도 이미 챙기고 있었으니까. 구태희는 비교적 멀쩡한 괴물 거미의 시체까지 챙기기 시작했다.
“거미 시체는 왜? 가져가서 국 끓여 먹게?”
“…정부 쪽에 넘길 생각이다.”
구태희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복용한 비스터 II의 부작용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나는 회복 덕분에 아무렇지 않았지만.
“비스터 II를 만든 바이오닉스가 정부 쪽에 있다고 했나?”
“그래.”
“볼일도 끝났으니 여기서 헤어지면 되겠네.”
나는 박해길에게 눈짓했다. 박해길이 보안팀원들을 수습한다. 전투 드론, 여왕 거미의 거미줄, 보안팀원 시체 등을 챙기고 움직인다.
‘물론 갈치검도 챙겨야지.’
***
자전거를 타고 성악초등학교로 귀환했다. 해가 저물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악초등학교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몇 시간 전에 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 눈치를 봤다.
‘마음에 드는군.’
당분간은 조용할 것이다. 폭동을 들먹이면서 여러 가지 일을 강제로 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
“알아서 쉬어라. 아, 근무는 빼먹지 말고. 폭동이 난건 알고 있지? 니들이 쉬면 또 폭동이 일어날지도 몰라. 그때는 나만 좆 되는 게 아니라 너희도 좆 되는 거야.”
폭동이란 말에 바짝 긴장한 보안팀을 두고 본관으로 향하려는데 박해길이 나를 불렀다.
“유진 씨. 전사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학교 뒤편에 무덤이나 만들어둬. 가족이 화장을 원하면 그렇게 하고.”
“가족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는 겁니까?”
내가 왜 그딴 걸 지급해야 하지? 눈살을 확 찌푸리려다가 멈칫했다. 보안팀. 내가 공식적으로 특권을 약속한 놈들이다. 이 새끼들까지 폭동을 일으키면 골치가 아파진다.
“돈과 생필품을 챙겨주지. 이에 관해서는 따로 보고서 작성해서 올려.”
“…유진 씨. 이건 개인적인 질문입니다만, 진화 혈청을 어떻게 하실 겁니까?”
구태희와 한 대화를 일부 엿들은 모양이다. 대놓고 말했으니 딱히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몰라. 귀한 거니까 일단 갖고 있어야지.”
“…절반의 확률로 죽을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진화 혈청을 투여받고 싶나?”
“예. 저로 실험을 하신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나는 박해길을 쳐다봤다. 그냥 지껄인 말은 아닐 것이다. 박해길은 이미 각오를 끝마쳤다. 솔직히 말해 꽤 끌렸다. 50% 확률이긴 해도 거슬리는 박해길을 간단히 처리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진화에 성공하더라도 어떻게 진화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위험할 것 같으면 그때 가서 죽여버려도 늦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그냥 줄 수는 없다.
“보안팀이나 제대로 쓸만하게 훈련시켜. 아까 보니 영 실망스럽더라. 구태희의 부하들 봤지? 그 정도는 아니어도 비명은 지르지 않도록 쓸만하게 만들어 놔. 그럼 보상으로 진화 혈청을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훈련장이 필요합니다. 뒤쪽 공터를 써도 되겠습니까?”
“그러든가.”
의욕에 불타는 박해길을 뒤로하고 이번에야말로 본관으로 향했다. 별관 수감실에 갇혀 있는 반란자 놈들을 쥐어패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짐은 내려놓고 샤워부터 했다. 시원한 물줄기로 찝찝함을 흘려보내고 나채영에게 갔다.
박살 난 전투 드론을 본 나채영은 역시나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녀가 하는 일은 꽤 많으니까. 무기 개발, 전투 AI 연구 및 업데이트, 거점 강화까지.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유감스럽게도 난 도와줄 수 없었다. 이런 쪽 일은 전혀 모르니까.
“이게 여왕 거미의 거미줄이야? 많이도 가져왔네.”
“많으면 좋잖아.”
나채영은 거미줄을 보고 작게 감탄했다. 그녀는 거미줄을 이리저리 만지며 확인했다. 거칠게 잡아당겨도 거미줄은 찢어지지 않았다.
“부드러워. 하지만 약하진 않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섬유보다 질겨.”
“유리 조각으로도 쉽게 끊어지던데?”
“그건 네가 이상한 거야.”
나채영이 반쯤 확신하듯 말했다. 그녀는 책상 서랍에서 공구용 칼을 꺼내더니 그대로 거미줄을 끊으려고 했다. 거미줄은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 봤다. 뭐가 문제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러 가지가 눈에 보인다.
“손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잖아. 그리고 손목을 좀 더 기울이는 편이 좋아. 나라면 거기가 아니라 조금 더 윗부분을 베겠어.”
“…난 네 특성이 둔재라는 게 믿기지 않아.”
나채영이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놀랐다. 재능 없는 내가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 것에. 하지만 한편으로 납득했다. 현실을 비롯한 창작물 세계에서 얼마나 칼을 휘둘렀던가. 세월만 따지면 수십 년은 될 것이다. 남들을 쉽게 경험할 수 없는 목숨을 건 전투도 리스크 없이 경험했던 나다. 그것들은 전부 내게 쌓여 있었다.
감회가 새롭게 느껴질 때였다. 나채영은 가위를 가져와 거미줄을 자르고 있었다. 그리고 꼭꼭 감싸여 있던 여자의 시체를 발견한다.
“…….”
나채영이 굳었다. 그녀의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내게 향한다.
“…이젠 시체까지 범할 생각이야? 색정광이 상식을 넘어서는 특성이긴 했지만….”
“오해하지 마.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려고 가져왔으니까. 네가 있는데 왜 시체를 범하겠어? 널 범하면 되는데!”
“알았으니 조용히 해. 말이 길어질수록 너만 추해질 뿐이야. 시체나 좀 옆으로 치워줘. 내 힘으로 하기엔 힘드니까.”
그녀의 말대로 시체를 옆으로 치운다.
어떻게 이 여자를 묻을까. 그냥 묻으면 벌레 같은 것들이 뜯어먹을지도 모른다. 역시 관에 넣어야 한다. 강철관? 아니면 석관?
‘강철관으로 하면 나채영이 쓸데없는 곳에 자원을 낭비한다고 뭐라 할 것 같은데….’
죽은 그녀의 시체를 빤히 쳐다봤다.
나채영 급의 미녀다. 이 정도 수준의 미녀는 절대로 흔하게 볼 수 없었다.
‘아깝군.’
D 바이러스는 미남미녀를 가리지 않는다. 미녀 중에는 좀비가 된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미녀라서 많은 고충을 갖게 되겠지. 모든 미녀들을 내가 구하고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관에 묻을 때는 묻더라도 가슴이나 한번 만져볼까.’
풍만하게 솟은 가슴을 만진다. 딱딱했다. 그리고 서늘했다. 나는 살아있는 젖가슴을 떠올렸다. 따뜻한 체온에 손가락이 푹 박히는 부드러움 속 형태를 유지하는 탄력까지.
‘나채영의 가슴이나 만져야겠어.’
시체의 가슴에서 손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체력이 쭈욱 빠져나간다. 일어서 있던 내가 나도 모르게 균형을 잃고 비틀거릴 정도로.
“……!”
당황한 내가 손에 쥐고 있던 가슴을 꽉 쥐었다. 부드럽다. 그리고 뛰는 심장이 느껴진다. 깜짝 놀란 내가 시체를 쳐다봤다. 창백한 그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회복 능력이 발동했나…?!’
회복을 타인에게 사용할 시도는 해보지 않았다. 아니, 생각도 못 했다. 회복은 일종의 패시브 같은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패시브만이 아니라면?
‘타인에게도 회복을 쓸 수 있다고? 근데 이 여자는 죽었잖아.’
아니지. 나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적 있지 않았나.
회복(回復).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 유희 생활 어플에서 회복은 최상위 각성 능력이라고 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데 최상위 능력이 아닐 리 없다.
“하하. 이걸 이제야 깨닫다니…. 아니,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인가.”
완전 회복의 완벽한 상위호환이었다. 문제는 한 번 쓰고 나니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힘들다는 거였다. 이건 오늘 하루는 수련은 때려치우고 푹 쉬어야 할 것 같다.
‘이젠 죽은 미녀도 다 살려서 내가 따먹는다!’
두근두근…. 두근…….
힘차게 뛰던 시체의 심장은 다시 미약해지더니 멈췄다.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