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9화 > 1889. 이터널 에덴
“끄아아아아악!”
데이비드 김이 비명을 꽥꽥 질러댔다. 약간 실망이다. CIA면 눈알 하나가 뽑혔어도 냉철함을 유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새끼 정확히 무슨 능력이야? 심각한 거야?”
“심각한 능력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하고 싶지만, 정신계 능력은 자료가 부족해서 판단하기 어려워.”
“말해 봐. 정확히 어떤 능력인데?”
나채영이 본 데이비드 김의 정보는 이러했다.
「개체명: 데이비드 김.
잠재력: ★★
각성 능력: 따뜻한 호의.
특성: 매력, 은신.」
따뜻한 호의.
나채영이 추정하기로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게 해서 호의를 건네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한다. 별거 아니다. 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신을 완전히 조종하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방금 봤듯이 나채영은 미리 정해둔 의견을 이곳에서 번복했다. 그만큼 데이비드에게 강한 호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호의를 베풀고 싶어질 정도로.
“이 씨발 새끼가 감히 내 여자를….”
짜증 나서 대가리를 한 대 더 쳤다.
특성인 매력은 상대방이 호감을 느끼기 쉬워지고, 은신은 기척을 숨기기 특화된 특성이다. 나채영의 말로는 은신 특성을 가진 자가 작정하고 숨으면 전문가도 추적하기 힘들다고 한다.
“끄윽…. 나, 나 박사님! 도와주십시오! 이, 이놈은 미쳤습니다!”
나채영이 움찔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나채영은 평소에 좀처럼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지금 노골적으로 표정을 드러냈다는 것은 살짝 멘붕한 상태라는 거다.
“짜증 나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남자를 구하고 싶어. 유진, 네 대처가 너무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어.”
“지금 이 상황에서도 수작을 부린다고? 진짜 개 쳐 돌았네.”
그 자리에서 데이비드 김의 팔다리를 부러뜨렸다. 뇌전에 의해 근육이 풀렸다고 해도 고통은 느낀다. 데이비드 김은 분쇄되는 뼈에 돼지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허용치를 뛰어넘는 고통에 기절한 것이다.
기절한 놈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채영을 바라본다.
“어때? 능력은 풀렸어?”
“…아니. 지금도 호의를 느끼는 중이야. 정신계 능력을 당해보니 알겠어. 최악이야. 머릿속 부품 하나가 고장 난 것 같아. 내 정신인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설마 이 새끼를 죽여도 능력은 계속되는 거야?”
“그건 아니야. 정신계 능력자가 죽으면 능력도 사라져. 이터널 에덴에서도 정신계 능력에 대처하는 가장 편한 방법은 정신계 능력자를 죽이는 거였어.”
“이 새끼를 이렇게 쉽게 죽일 수는 없지. 그건 너무 자비스러우니까.”
데이비드 김을 어떻게 조질까. 수십 가지의 방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러다가 문득 내 능력을 떠올렸다. 죽여도 되살릴 수 있다. 머릿속에 떠오른 수십, 수백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거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나채영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뭐야?”
“네 정신부터 회복시켜야지.”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해? 정신은 물질이 아니야. 정신계 능력에 당했다고 뇌가 망가진 것도 아니니까. 뇌를 복구한다고 해서 그렇게 잘 될 리가….”
능력은 경험이 중요하다. 내가 이 세계에서 뇌전을 잘 다룰 수 있는 것도 이미 뇌전을 그런 방식으로 다뤄봤기 때문이다. 회복도 마찬가지다.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 완전 회복으로 몇 번이나 경험하지 않았던가.
‘완전 회복은 육체만 부활하는 게 아니야. 모든 상태 이상까지 전부 회복하지.’
경험은 충분히 있었다.
나는 나채영에게 회복을 사용했다. 나채영이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눈동자는 평소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니, 평소보다 더.
“……설마 정신까지 회복시킬 줄이야. 강제로 진정제를 투여받은 느낌이야.”
“이 새끼가 불쌍해?”
나채영은 데이비드 김을 내려다봤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름의 일을 겪고 성장한 지금의 눈동자는 무감정했다.
“지금 죽이는 게 가장 깔끔해. 방금 봤잖아. 정신계 능력자는 위험해.”
안다. 그래서 내가 절대 정신을 가져온 거다. 이 세계에는 데이비드 김보다 훨씬 위험한, 사람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정신계 능력자도 존재하니까.
“…물론 절대 정신을 가진 네겐 아니겠지만.”
단순히 능력만 따지면 나는 정신계 능력자의 하드 카운터였다. 능력 자체가 아예 안 통하니까. 뭐, 능력은 쓰기 나름이라 내가 아닌 다른 놈들의 정신을 조종해 날 공격하는 방법도 있다. 지금처럼 나채영이 조종당할 수도 있다.
“정신계 능력에 대처하는 방법은?”
“있어. 바이오닉스가 만들 수 있는 약물 중에 안티스퍼라는 약물이 있어. 복용하면 일정 시간 동안 정신을 보호해줘. 정신계 능력의 저항력이 생겨서 쉽게 당하지 않아. 문제는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서 국가 지원을 받는 바이오닉스도 지금 단계에선 만들지 못할 거라는 거야.”
“재료가 뭔데?”
“특수한 변종의 시체.”
“테크놀로지스트는 어떻게 대항하는데?”
“정신계 능력을 저항하는 물질을 발견하고 연구해야지. 그게 아니면 너의 갈치늄처럼 새로운 물질을 만들던가.”
갈치늄은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금속이었다. 그런 신물질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단 이 새끼부터 심문해볼까.”
***
이연희는 부하들을 시켜 성악초등학교를 주시하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24시간 동안 감시한다고 보면 된다.
S.
그러니까 성유진의 행동을 주시하고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태왕의 보스인 구태희의 말을 듣고 어느 정도 파악했다. 다만, 이연희의 성격상 구태희의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확인 작업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번에 데이비드 김이 성악초등학교에서 나오지 않는 것으로 판단을 내렸다. 구태희의 말은 옳았다. 성유진은 미친놈이었다. 하지만 마냥 미친놈은 아니다. 자기 자신만의 기준이 있다. 그러니 그 기준만 잘 지키면 무탈하게 협상할 수 있다.
‘데이비드 김은 건물에 감금되어 모진 일을 당하고 있겠죠. 성악초등학교에는 플레이어도 있고, S는 정신계 능력이 잘 통하지 않을 테니까요.’
성유진의 정신계 저항력이 상당히 높다는 건 행적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전쟁 무기 연구소에서 정신 파동을 쏘아내는 브레인디바우를 죽인 게 성유진이다. 정신계 능력자로 추정되는 데이비드 김을 저지하지 않고 성악초등학교로 들여보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녀가 추정한 성유진의 성격은 정신계 능력자라는 걸 아는 순간부터 분노할 테니까.
띠리리.
책상 위에 놓인 사무실 전화기가 울렸다. 이연희는 느긋하게 유전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죠?”
-CIA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CIA의 한국 지부장인 케일 먼슨의 연락입니다. 차장님과 통화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CIA가 연락할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데이비드 김. 각성자 포섭에 특화된 정신계 능력자를 이렇게 쉽게 잃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이연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은근히 안기부를 무시하던 케일이었다. 그가 무슨 아쉬운 소리를 할지 기대됐다.
“연결하세요.”
-…이연희 차장. 케일 먼슨이오. 오랜만에 대화하는군.
“그렇네요. 그간 평안하셨나요?”
-…뭐, 나름 잘 지내고 있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도와주시오.
“자세한 설명도 없이 도와달라고 말하시니 곤란하군요.”
-이미 알고 있지 않소? 설마 제 국가에 일어난 일을 모른다고 할 셈이오?
“후후. 그 말투는 여전하시네요. 네. 알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김에 관한 일이겠죠.”
-성유진. 그자는 CIA 요원을 불법으로 감금하고 있소. 데이비드 김을 데려와 주시오. 본래는 마땅한 처벌을 해야 하나… 그건 우리 쪽이 관대하게 넘어가겠소.
“안기부는 CIA의 하청 조직이 아니랍니다.”
-알고 있소. CIA와 협력관계지. 그러니 지금 협력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요.
“데이비드 김은 정신계 능력자지요. 그가 포섭한 한국의 각성자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한국으로 돌려보내세요. 정신 조작으로 사람을 포섭해서 빼가는 건 아무리 그래도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데이비드 김이 정신계 능력자?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우리가 그를 데려가려는 건 그가 CIA 요원이기 때문이오. CIA는 동료를 버리지 않소.
“그럼 직접 하시죠?”
-이렇게 나올 거요? 우린 양국의 안보를 위해서라도 협력해야 하오.
“받을 거만 받는 게 협력인가요? 그리고 저희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최근 동아시아 정세가 심상치 않아요. 북쪽에서는 내려보내는 간첩이 많아졌죠. 안 그래도 바쁜데 당신들이 싸지른 똥을 저희가 치워줘야 하나요?”
-하, 알겠소. 이 일은 우리가 처리하지. 그리고… 지금 대화는 유감이오. 이연희 차장.
뚝.
전화가 끊겼다. 그의 목소리에 서린 분노를 느낀 이연희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CIA와 성유진.
평소였다면 CIA 쪽에 손을 들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미국은 예전의 미국이 아니다. D 바이러스로 인한 좀비 사태. 총기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국가인 미국에서는 온갖 문제가 터지고 있었다.
그리고 히어로가 있다면 빌런도 있는 법. 특히 미국은 그게 심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대단하지 않다는 뜻이죠.’
게다가 부정한 방법을 이용해 남의 나라의 인재를 빼가려 해놓고서는 아무 잘못 없다는 듯 뻔뻔하게 나오는 그 태도도 아니꼬웠다.
동맹국을 위한다고 말은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자기 나라뿐이다.
지금 안기부에게 있어 중요한 건 CIA과의 관계보다 강력한 능력자인 성유진의 관계다.
이연희는 통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정도 울렸을 때였다.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이연희는 평소처럼 미소를 지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성유진 씨. 국가안전기획부의 4차장인 이연희라고 합니다. 갑작스레 전화를 드린 건 죄송합니다. 상황이 좀 급박하게 흘러서요. CIA 한국 지부가 성악초등학교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목적은 데이비드 김입니다. 저희가 성유진 씨를 도울 수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내가 지금 좀 바빠서.
-아아아아악! 그, 그만!!!
-나중에 필요하면 이 번호로 연락하지.
뚝.
연결이 끊겼다.
아무래도 자체적으로 데이비드 김을 심문하는 모양이다. 이 사실을 CIA가 안다면….
CIA와 성유진의 관계는 끝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죠.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있었죠. 어쩌면 이미 그들의 관계는 끝난 걸지도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