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6화 > 1896. 이터널 에덴
박해길이 도로를 내달렸다.
성악초등학교 근처는 안전했다. 성유진과 보안팀이 주기적으로 밖으로 나와서 좀비를 청소하기 때문이다. 그게 소문이 났는지 성악초등학교 주위로는 사람들이 모여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성악초등학교 내부로 들어가지 않더라도 외부에 있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안전하니까.
박해길은 죽을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스스로 목을 매달거나, 한강에 투신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 죽더라도 의미 있게 죽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이 세상에 의미 있는 죽음은 많았다. D 바이러스가 퍼지며 좀비가 돌아다니는 상황이 됐으니까.
‘좀비 하나라도 죽인다면 의미 있는 거다. …의미 있는 거겠지.’
좀비가 보였다. 박해길은 좀비의 뒤통수를 곤충 손으로 후려쳤다.
팍!
좀비의 머리가 수박처럼 부서졌다. 원치 않는 쪽으로 진화가 진행되었으나, 그의 신체는 일반인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졌다. 그에게 있어 이제 좀비는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변종에 비빌 정도는 아니었지만.
“으아아악! 괴물!!”
“변종이다!”
“사, 살려줘!”
해가 저물 때까지 눈에 보이는 좀비들을 처리하며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했다. 하지만 그에게 대뜸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양손뿐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곤충의 그것처럼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해길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절망했다. 자신이 봐도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곤충 괴물.
‘능력자는 능력을 쓰면 쓸수록 강해진다고 했다. 그건 진화자도 마찬가지였나?’
―――――.
어디서 소리가 들린다.
아니, 소리인가? 확실한 건 무언가가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거울을 보고 절망하고 있던 박해길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들렸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머리가 3개 달린 변종과 커다란 곤충 괴물들이 싸우고 있었다. 곤충 괴물들이 불리했다. 변종을 둘러싸고 있는데도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
―――――.
이 소리다. 곤충이 내는 소리였다. 곤충들은 말하고 있었다. 우리를 도와서 이 괴물을 죽이자고.
박해길은 당혹스러웠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진화가 이렇게 된 것도 저 곤충 괴물 놈들 때문이 아닌가? 그러니 곤충 괴물들에게 증오심이 일어나야 정상이다. 허나 증오심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존재가 기껍다. 오랜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모르겠다. 언제 깊이 생각해보고 행동했었나?’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변종에게 달려들어 그 뒤통수를 공격한다. 곤충 괴물들과 싸우며 방심하고 있던 변종의 머리 하나가 그대로 날아갔다.
‘지능이 낮은 변종이다. 이런 놈을 상대할 때는… 치고 빠지고가 최선이다.’
보안팀은 성유진의 지시에 따라 변종을 몇 번 처리한 적 있었다. 성유진은 다른 건 몰라도 변종 사냥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성유진은 괴물 사냥의 전문가였다. 반대로 지휘는 영 아니었지만.
“―――(거기! 공격하는 척하면서 뒤로 빼!)”
고주파 소리를 내며 곤충 괴물에게 명령했다. 곤충 괴물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움직였다.
지휘가 된다.
본능대로만 움직이던 곤충 괴물들의 움직임에 질서가 생겼다. 벌레들의 변종 사냥이 시작되었다.
5분 뒤.
변종은 곤충 괴물들에 의해 시체가 되어 바닥에 누웠다. 곤충들은 그 시체를 잘라서 맨홀로 가져가려 했다.
‘내가 뭘 한 거지? 왜 곤충 괴물들을 도와서….’
몸이 돌리려고 할 때였다. 곤충 괴물들이 일제히 박해길을 바라본다. 박해길이 몸을 움찔 떨며 반사적으로 전투 자세를 취했다. 허나 곤충 괴물들은 달려들지 않았다.
――――――.
곤충 괴물들이 따라오라고 말한다. 곤충 괴물들의 의지에는 친숙함이 담겨있었다. 몇 마리는 아예 박해길의 다리에 몸을 비비기도 했다.
‘…그렇군. 나는 이놈들의 동료가 된 건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 박해길은 홀린 듯이 곤충 괴물들을 따라 맨홀 속으로 들어갔다.
***
박해길이 사라졌다.
나와 양수빈이 섹스하는 걸 보고 멘탈이 터져 성악초등학교를 나간 것이다.
‘어느 정도 버틸 줄 알았는데 바로 초등학교를 나가줄 이야. 이건 좀 예상 밖이군.’
그렇다고 초조하거나 불안하진 않다. 그러려니 하다. 박해길은 원래부터 마음에 안 들던 놈이었다. 양수빈의 눈치가 보여서 직접 처리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직접 사라져 줬으니 오히려 더 낫다.
나한테 원한을 가진다? 그러던가. 애초에 남한테 원한을 잘 가지는 성격도 아닌 것 같긴 하지만.
‘내 뒤통수를 깔 기회는 많았어. 그러지 않았다는 건 자기 주제 파악을 잘해서? 그런 놈은 아니지. 그냥 포기한 거다. 어디 가서 객사할 놈이군.’
중요한 건 양수빈의 반응이었다. 양수빈이 박해길을 찾아서 밖으로 나가겠다고 하면 골치가 아파 온다.
“…그게 해길이의 선택인가요. 어쩔 수 없죠. 왠지 모르지만 이렇게 될 것 같아서요. 그날, 진화 혈청을 투여했을 때부터.”
양수빈은 한숨을 내쉬며 말한 게 전부였다. 생각보다 담담한 반응이었다.
‘마음을 접고 있었나? 박해길의 벌레 손은 인간으로서 좀 그렇긴 했지.’
진화 과정에서 유전적으로 문제가 생겼다는 거다. 의사인 양수빈도 그 사실을 알 테니 박해길이 남자로서,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으로서의 매력을 점점 못 느꼈을 거다. 특히 벌레를 혐오하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렇다고 찾아내서 죽이기에는… 귀찮네.’
박해길은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다. 기회가 되면 주저 없이 죽일 놈. 데이비드 김처럼 굳이 귀찮음을 감수할 정도로 깊은 원한은 없었다.
그냥 신경 끄기로 했다.
양수빈의 허벅지에 손을 뻗는다. 양수빈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는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의료실은 어제처럼 후끈 달아올랐다.
***
“직접 뵙는 건 처음이군요.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국가안전기획부 4차장 이연희라고 합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미녀가 생긋 웃으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녀였다. 긴 검은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 그야말로 청순가련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미녀였다.
안기부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했다. 원래는 적당히 대화나 나누다가 헤어지려고 했었다.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악초등학교의 성유진이다.”
“네. 알고 있어요. 그, 아시는지 모르시겠지만, 인터넷에 유진 씨의 영상을 퍼뜨린 건 저희 쪽입니다.”
“너희가?”
“네. 그 당시에는 인터넷이나 뉴스를 보면 암울한 내용밖에 없었죠. 그나마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는 건 각성자들에 대한 소식뿐이었죠. 괴물 거미와 전투를 한 유진 씨의 영상은 사람들의 희망이 될 거라 생각하고 퍼뜨렸어요. 성급한 행동이었습니다. 물론 맨입으로 사과할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좋아했었다. 사람들 모두가 전부 날 찬양했으니까. 사람들이 빨아주는 거 싫어하지 않는다. 게다가 내 목적에도 도움이 되는 편이고.
“크흠. 좀 불쾌하긴 했지. 보상은? 시시한 걸 가져온 건 아닐 테지.”
“안티스퍼라고 아시나요?”
그녀가 주머니에서 꺼낸 건 회색 알약이 든 유리병이었다.
“알고 있지. 설마 이게 안티스퍼라고? 만드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안티스퍼. 정신을 보호해주는 알약.
절대 정신을 가진 내겐 필요 없는 약이었으나, 나채영과 최혜진에겐 필수다. 이걸 먹으면 일시적으로 정신 저항력이 크게 오른다.
“정신계 능력을 굉장히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이연희는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이번 일의 인과를 완벽히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가련한 얼굴과 달리 그녀의 분위기는 날카로웠다.
‘20대로 보이는데 차장에 오른 건 다 이유가 있군.’
일단 안티스퍼는 챙겼다. 정신계 능력에 걸렸다 싶으면 이걸 먹이면 된다. 정신계 능력자를 상대할 때 미리 먹어도 효과는 있다. 내가 먹을 일은 없겠지만.
“이건 잘 쓸게.”
“네. 괜찮으시다면 유진 씨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우선은 생존이지. 뭐가 되든 살아남아야지.”
“그 후에는요? 제가 봤을 때 유진 씨는 이미 그 목적을 달성한 것 같네요.”
맞다.
이 근처는 싹 다 정리됐으니까. 좀비가 없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변종이 탄생할 확률이 확 떨어진다.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지배한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안기부. 어떻게 보면 잠재적인 적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 아직 구체적인 목표도 없어.’
세상은 아직 덜 망했다. 아니, 한국은 덜 망했다. 원래라면 TV나 수도가 끊겼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D 바이러스가 터지고 몇 개월이 지났는데도 수도와 전기는 끊기지 않았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방송도 한다.
물론, 이건 서울을 비롯한 도시 몇 개뿐이다. 일부 한국 도시는 처참하게 망했다. 사망자 수만 해도 최소 수십만이다. 실종자까지 합하면 수백만이다. 어쩌면 천만이 넘을지도 모른다.
‘더 망해야 해.’
더 망할 것이다.
“생존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야.”
“그렇군요. 저희는 유진 씨와 힘이 필요합니다.”
“날 개처럼 부리고 싶다?”
“절대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강력한 각성자 한 명, 한 명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한국이 이 지경이 됐는데 군대는 지금 뭐 하는 거지? 놀고 있나?”
“…기밀입니다만, 한국의 영웅인 유진 씨에게까지 숨기고 싶진 않네요. 현재 변종에 의해 멸망한 도시들을 봉쇄하고 있습니다. 좀비와 변종들이 기어 나오는 것을 최대한 막고 있습니다. 또한 D 바이러스에 의해 좀비가 된 병사들을 수습하고 있으며, 전방은 북한의 침공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하네. 북한이 이 시기에 침공할 것 같아? 걔들 뭣도 없잖아.”
“북한의 독재정권은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남한침공을 최대 수단이니까요. 저희는 70% 확률로 북한이 침공하리라 생각합니다.”
“…남한 전쟁인가.”
“네. 안타까운 일이죠.”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전쟁이 터지면 한국이 이긴다. 내가 있으니까. 내가 없더라도 결과는 한국의 승리다. 이제와서 한국이 패배하기엔 북한과의 격차가 어마어마하니까.
그러나 서울은 불탈 것이다. 아무리 못해도 서울에 미사일 몇 발은 떨어뜨리겠지. 한국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서울을 말이다.
‘내가 지배할 한국이 약해지잖아.’
그리고 북한도 내가 다스려야 할 나라다. 남한 전쟁은 내 입장에서 좋을 것 하나도 없었다.
가만히 머리를 굴린 나는 결정을 내리고 이연희에게 말했다.
“통일하자.”
“…예?”
“내가 북으로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