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7화 > 1897. 이터널 에덴
시종일관 침착하던 이연희의 눈동자가 격렬히 흔들렸다.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복기하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북한으로 가신다고요? 침투하시겠다는 뜻인가요?”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누구나가 상상해본 일이 있다. 북한으로 침투해서 북한의 최고 권력자를 암살하는 일이다. 그럼 북한과 남한은 통일하고 한반도는 평화로워진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맞아.”
물론 나도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죽는다고 바로 통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북한 권력자 놈들은 죄다 죽여버리는 거지. 다소 혼란이 있겠지만, 권력자들이 다 뒈졌는데 아랫놈들이 어떻게 하겠어?”
“중국과 일본, 러시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미국도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네요.”
“우리가 통일 해야 하는데 왜 그것들의 눈치를 봐야 하지?”
“국제 정세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으니까요. 각각의 이득이 있는 거죠. 북한이 중국의 꼭두각시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도 아니에요. 중국이 가장 크게 반발할 거예요.”
“그럼 다른 방식으로 해야겠군.”
“…들어볼 수 있을까요?”
“북쪽 돼지 놈을 꼬시는 거지.”
여자를 보내 미인계로 꼬시자는 말은 아니었다. 독재자 주위에는 미녀가 넘쳐나는 법이다. 그런 놈을 미인계로 꼬시려면 세상을 뒤흔들만한 미녀를 찾아야 했다. 그런 미녀는 내가 가져야 마땅하고.
“어떻게 말인가요?”
“…….”
무심코 말하려다가 참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손에 넣지 못하는게 있다.
건강. 젊음. 영생.
나는 그 모든 걸 줄 수 있었다. 건강은 말할 것도 없고, 노화도 되돌릴 수 있다는 걸 최근에 실험을 통해 알아냈다. 그 두 개를 극복하니 불로. 즉, 영생이었다.
내 계획은 이랬다. 내 능력인 회복으로 북쪽 돼지를 꼬셔서 따르게 만든다. 한국이 통일하고 안전한 궤도에 올렸을 때 필요 없어진 돼지의 멱을 딴다.
‘그 새끼 얼굴이 노란 게… 딱 봐도 건강이 안 좋아 보이던데. 뒈지고 싶지 않을 테니 협력하겠지.’
북쪽으로는 내가 직접 가야 한다. 회복 능력을 쓸려면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놈들에겐 내 능력을 숨겨야 했다. 이연희에게도 회복에 관해선 말할 수 없었다. 그녀를 믿을 수 없으니까.
“정부는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 괜히 북한과 주변 국가를 자극해서 좋을 것 하나도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현 정부는 무력으로 인한 강제 통일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득보다 실이 더 많아요.”
“알았어. 알았어. 그럼 이 이야기는 없던 거로 하자.”
이연희는 부정적이었다. 예상했던 대로다. 대뜸 통일하자고 해도 그 말을 따르는 쪽이 이상하지.
하지만 나는 이미 머릿속으로 통일 계획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안 그래도 D 바이러스로 인해 인구수가 줄어들고 있는데 전쟁으로 인해 인구수가 더 줄어드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한국에 전쟁이 터지면 좋아할 놈들이 많아서 더 눈꼴 시리다.
‘그놈이 협조적으로 안 나온다면… 다른 적당한 놈을 그 자리에 앉혀야겠지. 지금 당장은 내 체력 문제도 있으니 실행하기 어렵네. 공간 이동 주문서만 있어도 당장 실행하는 건데.’
이연희를 봤다. 똑 부러지는 여자 같았는데 내 착각이었던 걸까. 그녀는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통일이라니….”
“통일이 마음에 들지 않나?”
이연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통일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군가 원하는 숙원이지요. 하지만 쉽게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이 자리에 올라와서 많은 고위 공직자를 만나 봤습니다만, 그들은 통일을 하나의 정치적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통일을 생각하고 실천하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요. 유진 씨는 진정으로 애국자시네요.”
“애국하면 나지. 나처럼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걸?”
내가 다스려야 할 대한민국이다. 애국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내 대답에 이연희가 살짝 입을 벌렸다. 감명받은 여자의 그것이었다.
촉이 왔다.
이연희를 어떻게 따먹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방향이 보였다.
‘왜 이런 미인이 안기부 같은 곳에서 일하나 싶었는데… 애국심이군.’
어쩌다 그런 애국심을 가지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너무 확신하지는 말자. 미끼를 던져 볼까.’
나는 차를 한 번 홀짝이고는 이연희에게 물었다.
“통일된다면 대한민국은 더 발전하겠지?”
“문제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북한의 2,500만 인구수가 한 번에 확 유입되는 일이니까요. D 바이러스로 인해 그 수가 줄어들었다고 해도 한국 또한 줄어든 상태인지라…. 바로 분계선이 사라지지는 않을 거예요. 북한으로는 기업들이 먼저 진출할 가능성이 높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은 강해질 거예요.”
이연희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아까보다 말이 빠르고 많아졌다. 흥미 있는 주제라는 뜻이다.
‘이렇게 애국심 가진 여자는 또 처음 보네.’
나는 신기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머릿속으로는 그녀를 어떻게 공략할지 생각하면서.
***
성악초등학교의 내 생활은 단조로웠다.
늦은 아침에 눈을 뜬다. 미슐랭 셰프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훈련에 임한다. 약해지지 않으려면 신체는 계속 단련해야 했다. 이전에는 혼자 했지만, 요즘에는 최혜진과 같이 하고 있었다.
운동을 가르쳐주는 척하면서 최혜진의 몸을 더듬는 재미가 쏠쏠했다. 최혜진은 그때마다 발작하듯 대들었지만, 나를 이길 수는 없었다.
단련 후에는 여자들을 만난다. 성악초등학교로 피난 온 미녀들이 제법 있었다. 이곳에서 내가 왕인만큼 내 심기를 건드리려는 여자는 거의 없었다. 내게 질색하는 미녀들에게도 이제는 구할 수 없게 된 가치 있는 물건들을 구해주면 알아서 기었다. 적당히 관리소장 등의 감투까지 씌워주면 아주 좋아했다. 여자라고 해서 권력을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최근에는 확장 공사까지 진행하고 있었기에 사람은 더 늘어났다.
식량과 생필품 문제가 있었으나, 최대한 자급자족하고 있었다. 나채영의 힘이 큰 도움이 됐다. 그녀는 기계를 만들 수 있었기에 작은 공장을 형성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스마트팜도 운영 중이었다. 얻을 수 있는 식량의 양은 적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급자족은 완벽하게 지고 있었다.
저녁도 점심과 마찬가지로 맛있는 식사를 한다. 이후에는 나채영이나 양수빈에게 치근덕거린다. 그녀들은 요새 바빴다. 나채영은 미국에서 받은 기술을 연구하느라, 양수빈은 인구수가 늘어나면서 환자를 보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시간이 나면 데이비드 김과 케일 먼슨을 고문했다. 이것도 훈련이었다. 회복을 사용하는 훈련.
‘바로 죽은 시체를 되살리는 건 크게 힘이 들지 않는군.’
늙은 케일을 젊은 몸으로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반대로 젊은 몸을 늙게 만들 수는 없었다. 한 번 회복한 걸, 다시 회복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진짜 개사기 능력이잖아.”
내 옆에 최혜진이 야구 점퍼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의 말에는 나도 동의한다.
“넌 또 왜 여기 있냐?”
“네 말도 안 되는 강함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것뿐이야. 비밀을 알아낸 뒤에 당했던 수모를 모두 갚아줄 테니 기대하라고.”
“허.”
나는 굳이 최혜진을 감시하지 않았다. 최혜진은 친인척이 없었다. 성악초등학교 밖으로 나가도 갈 곳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할 것이 없었다. 성악초등학교에는 오락거리가 많이 부족했다. 심심한 최혜진은 내 옆에서 알짱거렸다. 내게 성희롱을 당해도 그러려니 하고 있다. 이미 익숙해진 것이라 보면 된다.
‘주인을 졸졸 따라다니는 개새끼 같네.’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혜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최혜진은 항상 똑같은 독수리가 그려진 검은색 야구점퍼와 야구모자를 쓰고 있다. 속옷도 별 특징 없는 스포츠 브라다. 다리를 내놓는 걸 좋아하는지 핫팬츠는 항상 입고 있다. 더위를 타는 건 절대 아니다. 그랬다면 애초에 이 날씨에 야구점퍼를 입지 않았겠지.
‘근데 운동화는 자주 바뀐단 말이지. 그리고 볼 때마다 운동화는 깨끗해.’
오늘도 운동화가 바뀌어 있었다. 하얀색 바탕에 황금색으로 포인트를 준 운동화였다. 디자인도 꽤 멋있었다. 신고 다니라고 만든 운동화가 아니라 전시해 놓으라고 만든 운동화 같았다.
“너 이 운동화 어디서 났냐? 어떻게 매번 다른 운동화를 신고 있어?”
“똑같은 운동화를 신는 건 질리잖아.”
“어디서 났냐니까?”
“…….”
최혜진은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운동화를 구했는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도둑질 혹은 강도질을 한 거다.
“사고 치지 마라.”
“정당하게 거래 한 거니 신경 꺼.”
“거래? 너한테 뭐가 있다고?”
“…네가 나한테 주는 간식들. 그리고 무기.”
“무기를 팔았다고?”
“아, 총기를 판 건 아니야. 보안팀이 쓰는 그거 있잖아.”
“삼단봉?”
“맞아. 그거랑 방검복? 그거랑 교환했어.”
“미친년. 그게 지금 시대에 얼마나 가치 있는 건 줄 알아?”
특히 방검복 세트는 좀비가 만연한 이 시대에선 거의 필수라고 할 수 있었다. 일반인들은 방검복만 입어도 자신감이 팍팍 오른다.
“뭐! 너도 여자 사 먹는 데 쓰잖아!”
“내거니까 나는 마음대로 써도 돼! 근데 넌 아니잖아!”
“아, 씨발. 내 몸이나 만지는 변태 새끼 주제에. 그거 좀 썼다고 지랄이야.”
“야 이 또라이년아. 쓰려면 제대로 써야지! 그 귀한 것들로 고작 운동화나 바꿔 먹어?!”
“이거 한정판이거든?! 세상이 망하기 전에도 이건 쉽게 못 구해!”
최혜진은 또라이 년이었다.
뒤지게 쥐어패서 교육하는 것도 시도해 봤으나, 그것도 한 때다. 다음날이 되면 여지없이 깝치는 게 최혜진이었다.
‘얜 차라리 짐승 상태일 때가 더 다루기 편했어. 교육 방식을 바꿔야 해.’
주먹으로 교육이 안 된다면 좆으로 교육해야 했다.
나는 최혜진을 따먹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