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9화 > 1899. 다크 문
[유희를 종료합니다.]
[경험치 정산을 시작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나채영의 인연 레벨은 5입니다.]
[촤혜진의 인연 레벨은 3입니다.]
[이연희의 인연 레벨은 1입니다.]
…….
[성유진
레벨: 91
근력: 123 체력: 116 민첩: 113 지능: 113 정력: 123 마나: 123]
[사용 가능 포인트: 17,820]
생각보다 많은 포인트를 얻었다. 하지만 바로 사용하기엔 포인트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뇌전을 올리고 싶은데…. 1만 포인트 이상 부족하군.’
저번에 뇌전의 레벨을 12로 올리면서 뇌전에 특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내게 익숙한 특성을 제외하면 컨트롤하기가 영 쉽지 않았다. 뇌전 레벨을 올리면 뇌전을 좀 더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신체 능력이라도 올릴까?’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신체 능력으로는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현재 나는 B급 헌터인데, 신체 능력은 최소 A급이니까.
‘A급 평균에는 못 미치겠지.’
사실 A급 평균도 정확한 기준이 없다. A급은 개인마다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육체 계열 능력자의 신체 능력은 나보다 더 뛰어날 것이다. 반대로 마법 계열이나 초능력 계열 능력자는 내 신체 능력보다 낮을 테고.
‘S급 후보 급의 A급 헌터는 제법 있어. 하지만 거론되지는 않지.’
S급 후보로 불리는 헌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벽을 넘을 수 있는 재능이다. 한아영은 그 재능을 인정받았기에 S급 후보로 불렸고, 지금은 S급으로 인정받아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인류를 위해서.
‘S급이 되면 쓸데없이 시선을 끌어서 피곤해질 것 같긴 해.’
한아영이 바쁘며 활동하는 걸 보면 알겠지만, 세상은 그리 평화롭지 않았다. 한국은 A급 헌터가 인구 대비 지나칠 정도로 많아서 안전한 거다. 해외로 가면 몬스터로 인해 멸망한 도시 정도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걸 복구하기도 쉽지 않은 게 던전은 전 세계적으로 계속해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S급이 되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군.’
그래도 S급은 되고 싶었다. S급 헌터의 권력 맛은 달달할 테니까.
나는 의욕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S급이 되기 위해선 우선 A급이 되어야 했다.
‘오늘은 B급 던전 두 개 돌자!’
8시간 후. 피곤에 찌든 나는 했던 결심을 후회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새끼가 실적 같은 시스템을 고안해서는…. 어디 날로 먹을 방법은 없나?’
***
오랜만에 세진 그룹 회장 손녀, 재벌 3세인 하승희를 연구소에서 만났다.
똑 부러지는 하승희는 웬일로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은 푸석해 보였고, 표정에선 피곤함이 드러났다.
“요즘 많이 바쁜 모양이야?”
“네. HB-1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HB-1. 헤빌의 촉진제의 복제품이다. 저번부터 판매를 시작했는데, 언론에서는 처음에는 호들갑을 떨더니 지금은 조용했다. 그래서 바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유진 선배 덕분에 천문학적인 이득을 얻고 있어요. 유진 선배의 계좌에도 돈은 쌓이고 있을 텐데요?”
그녀의 말대로 계좌에는 수십억 이상의 돈이 쌓이고 있었다. HB-1이 잘 팔리는 이상 내 계좌는 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긴 해. 돈을 쓰려고 해도 막상 쓸 곳도 별로 없어.”
내겐 유희 생활 어플이 있었다. 원하는 물건? 적당한 창작물 세계에 들어가서 가져오면 된다. 그게 아니어도 진심으로 원하는 물건은 별로 없었다. 지금도 내 집에는 특이한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공간 이동 주문서]만 해도 팔기만 해도 억 단위로 팔 수 있다. 마시기만 해도 젊어지는 [젊음의 샘]도 있었다. 이건 못해도 수백억짜리다. S급 헌터들도 노화는 피할 수 없으니… 수천억을 얻을 수 있다. 굳이 돈만이 거래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닐 테지만.
“집이라도 바꿔보시죠? 사람들은 보통 큰돈이 들어오면 집부터 사잖아요. 일종의 부동산 투자라고도 할 수 있겠죠.”
“지금 사는 곳이 마음에 들어서. 부동산 투자에는 별 관심 없고.”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은 적당히 넓어서 혼자 지내기에 충분하다. 위치도 나쁘지 않고, 최신식 건물이라 노후화된 부분도 없다. 무엇보다 언제 어디서든 한하린을 만날 수 있는 최대의 장점이 있었다.
“회사에 투자하는 것도 한 방법이에요.”
“그것도 귀찮은데. 그리고 회사에 투자했다가 회사가 망하면? 나만 손해잖아.”
돈이 많아도 손해를 보고 싶진 않았다.
“그럼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세요. 헌터 장비는 비싸지만 그만큼 제값은 하잖아요.”
“으음.”
이것도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웬만한 장비는 스톰브레이커 선에서 전부 정리할 수 있었다.
“헌터 실적을 돈으로 살 수 없나?”
“세상은 돈으로만 굴러가지 않아요.”
“헌터 협회에 수십억을 기부해도?”
“표창장 받고 뉴스에 한 번 나오는 것으로 끝이겠죠. 그것도 큰 업적은 못 될 거예요. 대형 길드는 매년 수백억씩 협회에 기부하니까요.”
일종의 기름칠이다. 아무리 대형 길드라 하더라도 협회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유진 선배.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여기에 온 건 돈 때문이 아니죠?”
“어, 맞아. 네 아래로 뛰어난 연금술사들이 몇 있다지?”
“네. HB-1을 만들 수 있던 것도 그들 덕분이죠. 지금도 그들이 HB-1 생산을 맡아주고 있죠.”
“HB-1은 잘 팔려? 요새 소식이 없던데.”
“잘 팔려요. 대형 길드가 주문을 많이 넣고 있죠. 던전에서만 자라는 식물과 작물들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요. 그 때문에 농부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없죠.”
HB-1이 나올 당시에는 말이 많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기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농부들이었다. HB-1가 있으면 농부라는 직업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시위했고, 어느 순간부터 시위는 사라졌다.
“HB-1의 단점이 장점으로 작용했죠. 땅의 영양분을 한 번에 빨아들이니, 땅이 영양분을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는 거죠.”
그러니 농작물에 쓰기에 부담스럽다. 거기에 HB-1의 가격도 한몫한다. HB-1을 쓰고 농작물을 대량으로 생산해봤자 본전을 찾기 힘들다.
“헌터들은 HB-1을 환영해요. 덕분에 포션 값이 내려가서 헌터들의 사망률도 덩달아 내려가고 있으니까요.”
“잘된 일이군.”
나는 책상 위로 비스터 I과 비스터 II를 올렸다. 알약들을 본 하승희의 눈에 흥미가 깃든다.
“유진 선배가 가져온 만큼 평범한 약들은 아니겠죠. 무슨 효과가 있죠?”
“비스터 I은 통증 완화에 고통도 줄여줘. 신체 능력도 미미하지만 상승하고. 한 알만 먹는다면 부작용은 없어. 비스터 II는 신체 능력을 급격히 올려주지. 문제는 부작용이 좀 있어서 쓰기 꺼려진다는 거지.”
[이터널 에덴] 세계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효과는 떨어질 것이다. 유희 세계에서 가져온 물건 대부분은 현실에 가져오면 효과가 떨어지니까. 약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다.
“…이것들도 판매하고 싶은 건가요? 어느 정도 효과인지는 확인해 봐야겠지만… 돈은 될 것 같지는 않네요.”
“팔 생각은 없어. 양산이 가능한가 싶어서 가져온 거야.”
“연금술사들에게 물어봐야겠네요. 양산은 가능할 거라 생각해요. 여력이 없어서 문제지만요. 이런 건 어디서 얻었나요?”
“던전에서.”
“…….”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내가 설명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하승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연금술사들을 데려왔다.
그들은 하승희 이상으로 피곤에 찌든 모습들이었다. 그래도 새로운 약물 때문인지 두 눈은 형형하게 빛났다.
“HB-1을 가져오신 분이시라고요. 소장님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성유진입니다. 서로 바쁘니 자세한 인사는 됐고 이거나 한번 봐주십시오. 던전에서 얻은 겁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온 연금술사들이 알약을 살펴봤다. 그들의 눈은 번뜩이고 손가락 끝에선 빛이 난다. 능력이나 연금술을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연금술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문외한이었기에 조용히 그들을 기다렸다.
“꽤 흥미롭군요.”
“도핑용 약인 것 같은데 부작용이 좀 있군요.”
“이미 이것으로 완성된 약입니다. 부작용을 없애거나 줄이려고 한다면 약효도 덩달아 떨어지겠죠.”
“전 이 약을 만들 때 사용한 주재료가 궁금합니다. 연금술을 사용했는데도 알 수 없군요.”
연금술사들이 말하는 주재료는 D 바이러스에 감염된 생물들이다. 비스터 I은 사족 보행을 하는 동물, 비스터 II는 짐승 변종이 주재료다.
“이걸 복용하면 바이러스 같은 거에 걸립니까? 이걸 얻은 던전은 좀 특이해서 말입니다.”
D 바이러스가 터지면 골치 아프다. 물론 D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고 해도 바로 모든 인간이 좀비로 변하는 건 아니다. D 바이러스가 활동하려면 다른 물질도 필요하니까. [이터널 에덴]에서 괜히 한날한시에 좀비 사태가 터진 게 아니다.
“아니요. 부작용은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혈압 관련 부작용이죠.”
“바이러스 성분은 없습니다. 먹더라도 바이러스에 걸릴 일은 없을 겁니다.”
“이것도 양산해서 판매할 생각이십니까?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도핑용으로는 가치가 떨어집니다. 이미 이것들보다 좋은 도핑용 포션과 약들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약의 성분이 흥미롭긴 하나, 효과는 떨어집니다.”
고개를 끄덕인다. HB-1은 대체 불가능한 물질이다. 반면에 비스터 I과 비스터 II를 대체할 도핑용 약들은 사방에 널려 있어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비싸지만 부작용이 거의 없는 것들이.
연금술사들은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비스터 I과 비스터 II를 내려놓았다.
나는 그들을 보며 다른 물건들을 떠올렸다.
정신 능력의 저항력을 일정시간 올려주는 안티스퍼와 반반 확률로 진화시켜주는 진화 혈청.
저들이 그것들을 보면 어떻게 반응할까.
‘진화 혈청은 나도 없지만. 안티스퍼를 꺼내려면 이터널 에덴 세상으로 가야 하고….’
귀찮은 일은 사양이다.
“어쨌든 복제할 수 있다는 겁니까?”
“HB-1도 원본의 복제품입니다.. 이 약들이라고 못할 것도 없지요.”
연금술사들이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들을 품속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