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1화 > 1901. 다크 문
전투용 기계말이 이끄는 마차가 점점 가까워졌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기계말뿐만이 아니다. 마차 자체도 전투용으로 개조했다.
네오 런던의 신사나 귀족들은 과한 튜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순수할수록 뛰어나고, 근본에 가까울수록 고상하다. 라는 게 그들이 가진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이런 마차를 타는 사람들은 적이 많다는 뜻이다. 불법적인 일을 통해 부를 쌓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가령 갱단이라던가.
마차는 우리 앞으로 다가와 멈춘다. 마부는 주변을 힐끗 살피고는 마차 문을 열었다.
철컥!
마차의 강철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내린 것은 메이드였다. 입에 담배 하나를 꼬나문 잿빛 머리카락의 메이드다. 얼굴 절반은 검은색 문신으로 뒤덮여 있었다. 태도는 불량해도 입고 있는 메이드복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등에는 창 한 자루를 메고 있다.
“나오시죠. 적은 없습니다. 함정도 아닙니다.”
잿빛 머리카락의 메이드는 시니컬하게 말하며 담배를 피웠다.
이어서 마차에서 내린 남자는 창백한 금발에 팔다리가 유독 길었다. 그는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마나를 내뿜었다. 파동치는 마나를 느끼며 미간을 좁혔다.
대뜸 마나 파동으로 간을 보는 건 무례하기 짝이 없으나, 마나 파동 자체는 꽤 세련됐다. 이런 식으로 마나를 다루는 걸 보면 90% 이상의 확률로 마법사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이텍 님!”
중개업자 마릭이 씩씩하게 웃으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인사를 받지도 않고 말했다.
“저것들은 뭐지?”
저것들. 나와 유리아를 일컫는 말이었다. 나는 끓어오르려고 하는 마나를 가라앉혔다. 딱 봐도 이놈은 불법적인 일을 하는 졸부였다. 그 말 하나, 하나에 반응할 필요는 없다. 힐끗. 유리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뒤에 서 있을 뿐이다. 허나 그 눈동자는 평소보다 훨씬 차가웠다.
“아, 저분들도 이번에 매물로 나온 공장에 관심 있으셔서 말입니다. 함께 구경하기로 됐습니다.”
“그건 처음 듣는 말인데?”
“미리 말하는 걸 깜빡했습니다.”
“…….”
남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저 남자에게도 마릭의 행동은 당황스러울 거다. 남자는 마릭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으나, 마릭은 뻔뻔하게 웃고 있을 뿐이다.
‘저 남자와 마릭 사이에 커넥션이 있는 건 아니군. 그나마 다행이다.’
저 둘 사이에 커넥션이 있었다면 이곳에 온 것 자체가 헛걸음하게 된 꼴이니까.
마릭의 속내를 파악하는 건 쉬웠다. 우리 둘이 공장을 두고 경쟁하기를 원하는 거다. 그래야 공장을 더 비싸게 팔 수 있을 테니까.
남자 또한 그 속셈을 파악했는지 이쪽을 쳐다본다. 가장 먼저 나를 보며 다시 한번 마나 파동을 일으킨다. 아까 일으킨 마나 파동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였다면, 지금은 탐색을 위한 마나 파동이었다.
‘여기서 무시당하면 귀찮게 나올 테지.’
참는다고 능사는 아니었다.
나 또한 마나 파동을 일으켰다. 보이지 않는 마나 파동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내 마나 파동이 남자의 마나 파동을 깨부수고 남자와 메이드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잿빛 머리 메이드의 표정은 오묘해졌고, 남자는 인상을 팍 썼다. 그는 나를 보고, 한 걸음 뒤에 물러나 있는 유리아를 보고, 내가 타고 온 마차를 봤다.
남자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았다. 곧 남자의 얼굴이 평온해진다. 속내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적의가 없다.
그는 내가 어중이떠중이 마법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테고, 유리아의 외모와 유니콘사의 일급 마차를 보고 내 재력까지 높게 평가했을 거다.
남자와 메이드가 다가온다.
“안녕하신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통성명부터 하지. 길리언 하이텍이라고 하네.”
길리언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네오 런던에서 악수를 무시하는 자는 무뢰배로 불린다. 내 평판을 위해서도 악수를 무시할 수 없다. 당연히 악수에 수작을 부리는 놈들은 천하의 개새끼로 취급받는다.
“유진 마이어일세. 뜻하지 않은 만남이라 조금 당혹스럽군.”
“우리 하이텍 가문은 운송업을 하고 있네. 이번에 공장을 사들여 사업을 확장할 생각이지. 자네는 어떤 사업을 하나?”
“요식업을 하고 있네. 유유 치킨이라고 들어봤나?”
“아. 요즘 잘 나간다던 치킨 프렌차이즈? 이거 떠오르는 신성을 만났군.”
길리언의 눈에는 은근한 멸시가 섞여 있었다. 익숙한 눈빛이기도 했다. 요식업은 네오 런던에서 대접받는 분야의 사업은 아니었으니까.
“자, 자, 신사분들. 인사는 나누셨으니 공장 안으로 들어가시죠. 시간은 금. 서로 한가하신 분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릭이 끼어들며 말했다. 우리는 그를 따라 공장으로 향했다. 뒤쪽에서 메이드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처음 보는 메이드군. 난 바바라다. 보시다시피 경호를 전문으로 하지.”
“유리아 그레이스라고 합니다. 주인님을 보좌하고 있습니다.”
“아, 비서 쪽? 그래서 등급은? 난 더블이다.”
그녀가 묻는 건 메이드와 집사의 등급을 말하는 거다. 좀 더 정확하게는 메이드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얻는 자격증에 찍힌 등급. 총 7개의 등급이 있고, 더블이면 밑에서 두 번째다. 밑에서 두 번째라고 해서 무시할만한 게 아니다. 메이드 자격증을 가진 것만으로도 엘리트라고 할 수 있으니까.
“…자격증은 없습니다.”
“아하.”
잿빛 머리의 메이드가 비웃는다.
“외모로 고용된 병풍용 메이드라는 거군. 보나 마나 침대 위에서 앙앙거리는 게 주된 업무겠지.”
“큭.”
내 옆에서 걷고 있던 길리언이 웃는다. 입꼬리를 꿈틀거리는 걸 보면 일단 웃음은 참고 있는 모양새다.
나는 잿빛 머리카락의 메이드의 대가리를 후려치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한편, 침대 위에서 앙앙거리는 유리아를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니군. 유리아는 매일 밤 내 침대 위에서 앙앙거리니까.’
슬쩍, 유리아의 안색을 확인했다. 표정이 안 좋으면 당장에라도 놈들에게 따질 생각이었는데, 정작 그녀의 안색은 평온했다.
“더블이라…. 그쪽의 수준을 알겠군요. 아마 전투를 제외하면 다른 일은 못 하는 거겠죠. 말투 또한 천박하니 교양 과목은 낙제를 받았겠군요. 전 당신처럼 메이드란 이름을 더럽히는 부류를 혐오합니다.”
“뭐?”
“크크.”
내가 웃었다. 일부러 웃은 것도 있지만, 진짜 웃겨서 웃은 것도 있다.
“외모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년이.”
“메이드란 곧 하수인입니다. 메이드의 품격이 주인의 품격을 대변하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좀 더 품성과 외모를 가꿀 필요가 있습니다.”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길리언이 웃고 있었다. 자신의 메이드가 모욕당하는 데도 웃는 걸로 보아 성격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아, 그러셔? 자격증도 없는 주제에 말은 잘하시네. 딱 봐도 주인 믿고 나대는 모양인데, 이 도시에서 그런 식으로는 오래 못 살 거다.”
“바바라, 그쯤 해둬라. 네가 무례했다.”
웃음기를 지운 길리언이 나섰다. 바바라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예. 예. 나만 또 나쁜 년이지.”
”메이드라고 해서 자격증이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너도 3년 전까지 자격증은 없었지 않나.“
”그때는 용병이었고요.“
”그래. 그때는 용병이었지. 저 메이드가 한 말은 틀리지 않다. 네가 천박한 짓을 하면 주인인 나도 천박해지니 태도에 주의해라.“
”아, 네.“
바바라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길리언은 혀를 찼으나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주인이라고 해서 메이드를 모욕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 실제로는 고용 관계니까. 메이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해고하면 되고, 주인이 마음에 안 들면 메이드가 일을 그만둘 수 있다.
나는 길을 걸으면서 메이드 자격증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메이드 세계에선 메이드 자격증이 중요하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자격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노골적으로 유리아를 무시할 줄은 몰랐군.’
바바라의 성격이 나쁘다. 라고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나는 위로 올라갈 것이다. 당연히 상류층과 귀족들을 만날 것이다. 그때마다 그쪽 메이드와 집사들이 은근히 유리아를 무시할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같은 일이 계속 벌어질 수 있다는 것.
‘유리아에게 자격증을 취득하라고 해야겠어.’
원래 그녀를 메이드 아카데미로 보내줄 생각이었다. 유리아의 목적이기도 했고. 하지만 유리아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아니, 메이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난 뒤에 그녀가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었다.
‘음. 유리아를 붙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급료를 올려야 하나? 아니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나의 방법.
임신이었다. 매일 밤 몸을 겹치고 있으니 작정하고 임신시키려고 한다면….
‘그건 너무 나갔나?’
생각에 몰두하는 사이 공장 정문에 도착했다. 마릭은 한 손으로 공장을 가리키며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자, 공장 외형을 보십시오. 깔끔하지 않습니까? 이 공장은 지어진 지 3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3년이면 신축이죠.“
조금 쌓인 먼지를 제외하면 공장 자체는 깨끗했다. 먼지 자체야 공장을 청소하면 될 일이다.
”두 분께서 어떤 공장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부지와 면적은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대량 생산을 하기엔 조금 작은 편이죠. 기계 몇 개를 들여놓으면 꽉 찬다고 해야 할지.“
마릭이 단점을 거리낌 없이 말했다. 그는 이미 알고 있는 거다. 그 정도 단점은 단점도 아니라는 것을. 대량 생산이 힘들다는 것은 공장 크기를 보면 누구나가 알 수 있다.
‘공장이야 나중에 키우면 된다. 우선 가동해서 꾸준히 생산하는 게 중요하지.’
공장 바깥을 대충 둘러봤다. 다시 봐도 공간이 조금 아쉽긴 했다.
”자. 가장 중요한 안쪽입니다. 들어가시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와우.“
길리언이 작게 감탄했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다. 공장 내부에는 기계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무척 깨끗한 상태였다.
”기계는 왜 남아 있는 겁니까?“
내가 마릭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