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4화 > 1904. 다크 문
바바라는 창을 찌르는 척하며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간단한 속임수다. 그러나 허접들은 이 간단한 수에 목숨을 잃는다. 물론 유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공격을 꿰뚫어 보며 피했다.
‘빙(氷).’
바바라가 속으로 뇌까렸다. 유리아의 오른편에 있던 창 하나가 사라지고 냉기가 터진다. 냉기는 사방을 휩쓸었다. 유리아도 예외는 아니다. 유리아의 신체가 곧바로 얼어붙는 건 아니었으나, 냉기는 근육을 둔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것도 피할 수 있나 보자.’
바바라는 본질은 창술사다. 소환 마법? 그건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는 어렸을 때부터 쭉 수려해온 창술.
우우우웅.
창이 진동하며, 마나가 창을 코팅한다. 창은 그녀의 일부가 되었다.
‘창룡선(蒼龍僊).’
바바라의 움직임은 거칠었으나, 창은 섬세했다. 그 두 개의 조화가 우아하면서도 위험한 창술을 만들었다. 그러나 바바라의 창은 유리아에게 닿지 않는다.
아슬아슬하게.
조금만 더 나아가면 닿을 것 같으면서도 닿지 않는다. 그 아슬아슬함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사라졌다.
실시간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파훼 되고 있었다.
‘…이게 뭐야.’
창끝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유리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바라의 안쪽으로 훅 들어갔다.
영천류(影天流) 비설(秘說).
소리 없는 일격이 휘둘러졌다. 보통 무기를 휘두르면 공기의 떨림에 의한 소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일격은 달랐다. 존재감이 아예 없었다. 바바라가 이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각지대를 노렸다면 당하고 난 뒤에야 알았을 은밀한 일격.
창을 회전시켰다. 변칙적인 움직임을 위해 억지로 궤도를 꺾었다. 허나 이것마저 간파했다는 듯이 피한다.
싫어도 인정할 수 없다. 상대는 자신의 창술을, 나아가 자신의 움직임을 단숨에 파악했다.
‘내 20년이 20초 만에 파훼 됐다고?’
얼굴이 일그러진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재능. 압도적인 재능의 차이가 질투심을 부추긴다.
‘폭(爆).’
창 하나를 소모해 충격파를 일으킨다. 이번에도 아까와 같이 유리아의 뒤통수를 노렸다. 허나 유리아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가볍게 피했다. 달빛 아래에서 은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바바라가 이를 악물었다.
‘끝까지 가보자. 결국 내가 이기는 건 내가 될 테니까.’
바바라는 솔리드를 사용했다.
마법사에게 아스트랄이 있다면, 전사에겐 솔리드가 있다. 솔리드는 정신 가속이다. 정신을 가속시켜 억지로 각성 상태에 들어서는 기술. 3급 이상의 전사라면 거의 필수로 익히는 기술.
바바라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창술은 더 날카로워진다. 그녀가 창을 휘두를 때마다 푸른 불꽃이 화르륵 일어났다.
솔리드 상태일 때는 가능성과 잠재력 일부가 개방된다. 그 잠재력에는 신체 능력뿐만이 아니라, 이능이나 인자도 포함된다. 푸른 불꽃은 바바라의 가능성이자 잠재력이었다.
푸른 불꽃의 뜨거운 열기는 유리아의 치맛자락 일부를 태웠다. 유리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에 바바라가 미소 지었다.
“왜? 이제 좀 긴장돼? 죽을 것 같아? 아까처럼 깝죽대 보시지!”
“깝죽거린 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게 깝죽거리는 거라고!”
창 4개가 사라지고 화살 20개가 되어 유리아에게 쏘아진다.
정면에는 솔리드 상태의 바바라. 옆과 뒤에는 20개의 화살.
유리아는 위로 뛰었다.
‘멍청한 년. 딱 걸렸어. 너라면 위로 뛰어서 피할 줄 알았어. 잽싸게 움직이는 것들 대부분이 위로 피하니까.’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바라는 바로 뛰어올라 위로 뛴 유리아를 뒤쫓는다. 그녀의 창에는 푸른 화염이 휘감겨 용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푹.
“어?”
바바라의 허벅지, 복부, 가슴에 나이프가 동시에 꽂힌다. 앞으로 나아가던 창이 급격히 힘을 잃는다. 바바라는 떨어지면서 어떻게 된 건지 생각했다. 유리아의 치마 속, 왼쪽 허벅지를 감싸고 있는 나이프 홀스터가 보인다.
‘언제 나이프를 빼서 던진 거지? 안 보였는데?’
떠오르는 것은 창을 내지를 때. 그때 집중하느라 시야가 좁아지긴 했다. 그러나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걸 포착하고 활용할 수 있는 건가?
바닥에 떨어진 바바라는 유리아의 얼굴을 보았다. 무감정했다. 이런 결과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에 확신했다. 우연도 뭣도 아니다. 노린 거다.
‘…괴물 같은 년. 파훼한 건 내 창술만이 아니라, 나였나.’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곳을 다녔고, 수많은 전장을 나섰다. 그 와중에 천재라는 연놈들을 몇 명이나 봐왔다. 대부분은 그 재능도 꽃피우지 못하고 전장에서 바스러져 사라졌다. 바바라처럼 생존에 목적을 두지 않고 공적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천재들은 바바라가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올랐다.
‘이년은 그 새끼들 중에서 독보적인 년이야. 오늘 낮에 처음 봤을 때부터 나 따위에겐 전혀 관심 없고 지 주인만 쳐다보더니… 지금도 날 안 보잖아.’
이 여자에게 한 방 먹일 좋을 기회였다. 어떻게든 떨어뜨린 창대를 손에 쥐어보지만… 그걸 휘두를 힘이 없었다. 바바라는 그렇게 사망했다.
***
콰아아아아아앙!
바위가 폐건물에 떨어진다. 낡은 담벼락과 천장은 손쉽게 부서지고 바닥도 바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지하 공방에 길리언이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배리어를 몸에 두르고 있어서 자욱하게 일어나는 흙먼지도 그의 몸에 닿을 수 없었다.
“아, 씨. 공방이 개판 됐잖아. 치우려면 반나절은 걸리겠네, 씨발.”
“치울 일은 없을 거다. 죽을 테니까.”
후우웅.
마나가 빠져나가며 준비했던 술식을 전개한다.
[썬더 볼트]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는 압축된 벼락은 길리언의 배리어를 간단히 찢어버리고 그 육체에 죽음을 내렸다. 놈의 육체가 새까맣게 타고 부서져 떨어진다.
‘끝났나?’
거대한 공방을 가진 마법사치고는 그 최후가 너무 허무하긴 하지만, 5급 마법인 썬더 볼트를 정통으로 맞았다. 그 시체 또한 두 눈으로 확인했다.
‘죽였으니 이제 이 공방은 내 거다.’
아래로 내려가려다가 멈칫했다. 내 주위에 있는 300마리의 짐승들이 여전히 으르렁거렸기 때문이다.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마법사가 죽으면 짐승은 원래대로 돌아온다. 본능에 따라서 서로 싸우거나, 흩어져야 정상이다. 그런데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다.
뚜벅뚜벅.
짐승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걸어왔다. 길리언이다.
“하하. 놀란 얼굴이 마음에 드는군.”
“…방금 죽은 놈은 인형인가?”
“인형 따위로 보였나?”
클론? 아니다. 이런 곳에서 클론을 만들 이유가 없다. 인형이라고 하기에도 뭣했다. 길리언은 인형술사가 아니라 소환술사니까.
“키메라군. 내형은 어찌 됐든 외형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을 테니.”
“맞아. 5급 마법사면 당연히 그 정도는 눈치채야지. 공들여서 만든 제물이지만, 썬더 볼트를 한 번 뺐으니 의미는 충분히 있었다. 마나는 어느 정도 남았지?”
“네가 걱정해주지 않아도 여유는 넘친다.”
“그럼 더 빼야겠군.”
딱.
길리언이 손가락을 튕겼다. 300마리의 짐승들이 일제히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배리어를 중첩해서 펼쳤다. 짐승들은 발톱과 이빨로 배리어를 두들겼다. 급격히 부서지려는 배리어를 보면서 술식을 조형한다.
발아래, 허공으로 마법진이 순식간에 그려지고 발동한다.
[일렉트릭 필드]
전류가 땅바닥을 타고 흐르며 짐승들을 감전시킨다. 언데드라면 모를까.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감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원래라면 짐승 따윈 당장 뇌가 구워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으나, 짐승들은 몸을 덜덜 떨기만 할 뿐 쓰러지거나 기절하지 않는다.
“짐승들을 모아 개조한 건가?”
“실험하기 딱 좋지. 아, 참고로 전부 성공작들이다. 실패작들은 전부 뒈졌거든.”
배리어로 몸을 감싼 길리언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일렉트릭 필드의 출력으로는 저 배리어를 깨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길리언의 배리어를 파악했다. 거친 언동과 달리 배리어는 중첩해서 사용해 방어력을 높였다.
‘수비적으로 나오는군. 소환사이니 당연한가.’
저 중첩 배리어를 박살 내려면 어지간한 공격 마법으로는 안 된다. 가장 손쉬운 건 썬더 볼트를 시전하는 건데, 캐스팅 시간 등을 고려하면 명중 시킬 자신이 없었다. 아까처럼 미리 준비했던 것도 아니니까.
‘어쩔 수 없군. 거슬리는 짐승부터 정리할까.’
털썩!
갑자기 짐승들 중 일부가 쓰러진다. 수십 마리가 동시에 쓰러지더니 그 육체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직후, 길리언의 등 뒤로 엄청난 마나 흐름이 느껴진다. 이건 가만히 두면 안 된다.
[일렉트릭 윕]
급한 대로 손바닥에서 전격의 채찍을 뽑아내 길리언의 뒤편으로 휘둘렀다. 마법을 방해하기 위해서다. 규모가 크고 정교한 마법일수록 물리적인 충격에도 크게 흔들리니까.
그러나 짐승들이 펄쩍 뛰어 올라 일렉트릭 윕을 막아섰다.
[아이스 스피어], [파이어볼]
쉬지 않꼬 쏘아낸 마법 또한 마찬가지다. 짐승들이 뛰어 올라 몸체로 막아선다.
“마법에는 종류가 있지. 심플 하지만 강력한 원소계, 어두운 만큼 기괴한 흑마법, 물질을 제 입맛대로 조작하는 연금술…. 그럼 소환술의 특징이 뭔지 아나?”
“다른 차원의 생물과 계약하는 것 말인가? 따로 술식을 공부할 필요도 없다고 하던데. 날먹 마법이라지.”
내 말에 길리언이 킬킬 웃었다. 도발은 통하지 않았다.
“맞아. 술식만 따지고 보면 날먹이지. 환수계 소환 술식은 다 거기서 거기거든. 그런데 왜 마법사들은 날먹 소환술을 선택하지 않을까?”
“소환수 관리가 까다롭다고 들었다.”
“그 말대로다. 환수계 놈들은 죄다 다른 걸 요구하지. 강한 놈일수록 까다로운 걸 요구해서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야. 하지만 그만큼의 가치가 없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거든.”
소환진이 완성된다. 도중에 마나 파장을 쏘아 보내는 등, 방해하기 위해 시도해봤으나 통하지 않았다.
소환진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나무였다.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크기의 단풍나무였다. 빨간 단풍잎든은 은은하게 빛나며 주변을 밝히고 있다.
그 자태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도 잠시. 나는 곧 이변을 알아차렸다. 주변의 기온이 올라갔다.
“보통 소환사는 직접 전투는 하지 못한다. 라는 게 세간의 인식이지. 그건 뭘 모르는 놈들이 지껄이는 개소리라는 걸 내가 직접 보여주마.”
길리언의 펼친 손바닥 위로 화염구가 타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