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8화 > 1908. 다크 문
“의회는 병원 관련 일로 내게 빚이 있다. 이 정도 일은 아무렇지 않게 들어줄 테지. 준남작 작위에는 관심 없나?”
“관심은 있습니다.”
“다행이군. 멍청한 놈들은 준귀족이란 이유로 멀리하지. 이 도시에서 귀족이란 이름을 전혀 모르는 놈들이.”
준귀족은 들러리다.
진짜 귀족들을 빛내주기 위한 들러리. 하지만 주역들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준귀족이라 어느 정도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건 당연하고.
“뒤탈이 없는 건 확실합니까?”
“내 이름을 걸지. 다만, 귀족 사회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부터 의무는 지켜야 할 거다.”
귀족과 관련된 말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이 있지 않나.
노블레스 오블리주.
물론 준귀족에게 주어지는 의무라고 해봐야 별거 없었다. 그깟 의무가 무서워서 찾아온 기회를 걷어차는 것도 말도 안 된다.
“거래하겠나?”
“하겠습니다.”
뜻하지 않은 행운을 놓칠 수 없었다. 준남작 작위만 얻어도 앞으로 할 모든 일들이 더 수월해질 테니까.
“시원해서 좋군.”
아르폰 기분 좋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다시 채워진 찻잔을 보면서 물었다.
“환수계의 벚나무 꽃잎 차라…. 허영심을 자극하는군. 맛도 향기도 모두 상등품이니 돈이 되겠어. 판매할 생각이 있나? 가장 먼저 내가 구입하겠다. 가격은 프리미엄까지 붙여주지.”
“판매할 생각이 있긴 합니다만, 아직 벚나무는 연구 중인지라 대량으로 생산하기 힘듭니다.”
“그렇군. 아직 연구가 덜 됐나? 판매할 때가 되면 내게 연락해라.”
그리고 그가 이어서 말했다.
“보아하니 단풍나무와 라일락의 꽃은 피우지 못한 모양이군.”
“…예. 그렇습니다. 벚나무는 제 마나에 반응했으나, 그 두 개의 나무는 전혀 반응하지 않더군요.”
“환수계 생물이다. 특이한 건 당연하지. 단풍나무도 내게 팔 생각 없나?”
“필요하십니까?”
“귀족 사회에서 돈 이상으로 중요한 게 뭔지 아나? 희귀하고 특수한 물건이다. 환수계 나무 정도가 되면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이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멍청이들의 질시를 받을 수 있다. 소장 가치는 충분하다.”
“그것만은 아니겠지요.”
“눈치 빠르군. 거래하기로 했으니 말해주마. 환수게 라일락 나무에는 치료 효과가 있다. VIP 전용 병원 로비에 환수계 라일락 나무를 박아두면 미미하지만 치료 효과를 받을 수 있지. 단풍나무에는 불과 관련된 효과가 있다. 내 손자 녀석이 불속성을 타고나서 말이야. 이번에 선물해줄 생각이다. 녀석의 성장에 도움이 되겠지.”
나는 천천히 고민해봤다.
단풍나무와 라일락 나무는 내게 반응하지 않았다. 앞으로 반응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반응한다고 해서 아르폰 남작과의 거래를 거절할 만큼의 가치가 나올까?
“단풍나무도 거래하겠습니다.”
“좋군. 돈을 원하나?”
“다른 것으로 주실 수 있습니까?”
선 제시는 피했다.
“…음.”
아르폰 남작은 새롭게 채워진 벚꽃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집이 좁군.”
“…예. 막 네오 런던에 왔을 당시에 구한 집입니다.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군.”
“1년 만에 준남작 작위를 받는 건가. 능력과 운이 뛰어나군.”
“감사합니다.”
“하지만 집은 영 아니야. G 구역에 오래된 저택이 하나 있다. 조부께서 사용하시던 집이었지만 3년 전에 돌아가시고 텅 비었지. 적당히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팔아버리려고 했었는데… 단풍나무의 대가로 주지.”
G 구역. 부자 동네다. 다만, 좀 낡은 부자 동네. 하위 귀족들과 준귀족, 일부 기사들이 머무는 동네다. 여기 S 구역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좋은 곳이었다.
“마음에 안 드나?”
“아뇨, 마음에 듭니다. 그쪽 저택 값은 최소 10억 크레딧 이상이라고 들었습니다.”
“준귀족이라도 귀족. 어울리는 집에서 살아야지. 이런 평민 집에서 살면 귀족 사회에서 무시당한다.”
“네. 덕분에 거처 문제로 무시당할 일은 없겠군요. 유리아. 공방에 가서 단풍나무와 라일락 나무를 가져와.”
“네. 주인님.”
유리아가 지하 공방으로 차분히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아르폰 남작이 살짝 감탄했다.
“기품이 느껴지는군. 메이드복이 아닌 드레스를 입었다면 어느 귀족으로 착각했을 거다. 자격은 어떻게 되지?”
“…그녀는 아직 메이드 아카데미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
아르폰 남작의 눈빛에서 흥미가 싹 사라졌다. 자격증이 없는 이유 하나만으로.
“충고 하나 하지. 접대용 고용인이 아니라면, 아무나 고용인으로 들이지 마라. 외모만 보고 고용인을 뽑는 놈들은 비웃음밖에 당하지 않는다.”
“그녀는 메이드로서 우수합니다.”
“정말 우수했더라면 트리풀 이상의 자격 등급을 가졌겠지.”
“……남작님의 고용인들은 등급이 어떻게 되십니까? 갑자기 궁금해지는군요.”
“각각 트리플이다. 플라워 이상은 돈만으로 일하지 않는 자들이라 구하기 쉽지 않더군.”
“제가 그쪽으로는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만, 트리플과 플라워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겁니까?”
“플라워는 귀족도 무시하지 못한다. 고용인 자격증 자체가 왕실이 발행하는 거고, 플라워 등급은 왕실이 인정한 인재라 할 수 있으니…. 플라워 이상부터는 고위 귀족들이 탐내는 인재들이지.”
곧 유리아가 양손에 보존 캡슐을 들고 왔다. 캡슐 안에는 단풍나무와 라일락 나무 묘목이 들어있었다.
“확인해 보도록.”
아르폰 남작이 말하자, 집사가 앞으로 나섰다. 캡슐을 열고 묘목들을 확인한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는다.
“환수계 나무가 맞습니다. 드루이드의 이름을 걸고 보증하겠습니다.”
“챙기도록.”
아르폰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다. 나는 그 전에 질문을 던졌다.
“환수계 나무에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까?”
“마법사가 직접 알아보지 않고 내게 묻는 건가?”
“빠른 길을 두고 돌아서 가는 취향은 없습니다.”
아르폰 남작은 직접 입을 여는 대신 집사를 쳐다봤다. 드루이드 집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환수계 나무 묘목은 주인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곳이 환수계였다면, 딱히 관리하지 않아도 잘 성장했겠지만, 여긴 환수계가 아니니까요. 벚나무가 꽃을 피웠다면 마이어 님과 벚나무는 어느 정도 정신 파장이 맞는 겁니다. 벚나무의 주인으로 인정받으시려면 정신 교감을 자주 하십시오.”
“인정 받으면 뭐가 달라집니까?”
“달라집니다. 아마 몰라보도록 빠르게 성장하겠지요. 다만, 마이어 님께 영향을 받는 만큼 정확히 어떻게 성장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 정신 교감 중 역으로 먹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들이 떠났다.
그리고 나와 유리아는 결정을 내렸다.
***
네오 런던에서 인정받는 고용인 아카데미는 총 두 곳이다.
메이드 아카데미와 집사 아카데미. 둘로 나뉘어져 있지만 커리큘럼의 차이는 별로 없다. 남학교냐 여학교냐의 차이일 뿐이라고 할까.
이 두 아카데미의 주인은 네오 런던의 왕실이다. 왕실이라고 해서 권력이 막강한 건 아니다. 네오 런던을 다스리는 건 원탁 의회니까. 그래도 왕실이란 이름이 붙은 이상 그 권위는 네오 런던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지금 나와 유리아는 C 구역에 있는 메이드 아카데미로 왔다.
메이드 아카데미는 커다란 고성이었다. 담벼락은 높았고, 정문 입구도 무척 컸다. 고성 위에는 커다란 종이 달려 있어서 그런지 수녀원 같은 느낌도 났다.
‘여기저기 메이드 밖에 없군.’
오늘은 메이드 아카데미의 입학식 날이다. 서류 심사와 면접을 통해 거르고 걸렀다고 하는데도 300명이 넘는 메이드들이 입학생으로 뽑혔다. 물론 입학한다고 해서 전원이 메이드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건 아니었따.
메이드 아카데미 내의 규율을 어기거나, 낙제를 받으면 바로 퇴학이니까.
‘규울이 군대 이상으로 대단하다고 하던데. 분위기가 그럴 것 같긴 하군. 면회도 한 달에 1번 이상은 안 되고.’
외출은 당연히 불가능.
오전부터 오후까지 교육을 받는다. 학비도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졸업만 한다면 인생은 탄탄대로라 할 수 있었다.
나와 유리아는 입학식이 진행되기 전에 그 주위를 돌아다녔다. 대기업 본사, 국가 기관이 늘어서 있는 C 구역이라 그런지 치안은 완벽했고 볼거리도 많았다.
“유리아. 너라면 아카데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졸업할 수 있을 거야.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난 뒤에는….”
“전에도 말했듯이 제 주인님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저를 내치더라도 모시겠습니다.”
“설마 내가 너를 내칠까. 네가 내 메이드라서 고마울 뿐이야. 면회는 꼭 올게.”
같은 도시에 있으니 시간만 내면 언제든지 면회할 수 있다.
“입학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마법으로 키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곧 사람들이 입학식장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뒤에서 입학식을 지켜봤다. 각각 다른 메이드복을 입은 입학생들이 긴장한 얼굴로 단상 위의 학장을 쳐다봤다.
학장도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중년인이었으나, 꼿꼿이 선 허리와 흔들림 없는 눈동자 때문인지 철의 여인 같은 느낌을 풍겼다.
‘왕실에서 일했던 로열급 메이드라고 했던가.’
마리아 힐턴. 공식적으로 7급에 오른 인물. 즉, 초인이었다.
‘밑바닥이 어느 정도인지 감지할 수가 없군. 확실한 건 지금 그녀와 싸우면 내가 100% 진다.’
그녀 말고도 메이드 아카데미의 교수진들은 하나같이 실력자들이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대부분 입학생들의 가족들이지만, 일부는 나처럼 준귀족으로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입학생들을 후원하는 자들이다. 물론 대가 없는 후원은 아니다. 후원을 받는 대가로 졸업한 뒤에 몇 년 동안 일한다. 그런 계약을 했을 것이다.
학장의 지루한 연설을 끝으로 입학식은 끝났다.
“입학식은 끝났습니다. 손님분들은 밖으로 나가주십시오.”
사람들이 메이드의 안내를 받아 빠져나간다. 나는 떠나기 전에 유리아를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유리아도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여긴 어쩐지 학교라기보다는 군대 느낌이 났다. 군대가 얼마나 지긋지긋한 곳인지 잘 알기에 더 열심히 유리아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불쌍한 유리아. 좆뺑이 치겠네.’
좆은 없지만.
‘그럼 봊뺑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