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2화 > 1912. 다크 문
클리브와 함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해밍턴 교수를 제외하고도 2명이 더 있었다. 두 명 모두 탐사대원으로 보이지 않는다. 분위기가 거칠고 무장하고 있다. 아마도 용병들이다.
‘용병을 2명 더 고용했나? 이건 예상하지 못한 변수군.’
용병들의 수준을 훑어봤다. 한 명은 총기를 다루는 거너, 한 명은 거검을 사용하는 전사다. 초인급은 아니다.
“반갑네. 해밍턴 탐사대에 온 걸 환영하네.”
해밍턴 교수가 내게 다가왔다. 회색 머리칼의 중년 여성이었다. 여자치고는 다부진 몸을 하고 있다. 각진 턱에서는 자신감과 힘이 느껴진다.
“유진 마이어입니다.”
“노라 해밍턴일세. 이리로 와서 앉게. 마침 다른 용병들에게 내일 있을 탐사를 설명하고 있었네. 아, 자네들도 서로 인사하게. 일시적이지만 같이 일할 동료가 아닌가.”
용병 중 먼저 입을 연 건 부분 갑옷을 입은 전사였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하관에 짧은 수염이 지저분하게 나 있는 남자였다.
“진 엑스텀이다. 마법쟁이.”
“무식이로군. 그쪽은?”
거너 쪽을 쳐다본다. 조용히 앉아 있던 가죽 코트를 입은 장신의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쉬 윈터다.”
“유진 마이어, 마법사다.”
용병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러면서 눈으로는 날 살펴본다. 내가 그러하듯 그들 또한 수준을 가늠하고 있을 것이다.
“통성명이 끝났으면 이리 와서 앉게.”
자리에 앉았다. 노라 해밍턴은 커피 한 잔을 건네줬다. 한 모금 마셔봤다. 역시나라고 할까. 쓰레기였다. 싸구려 원두는 아닌 것 같은데 대충 커피를 내린 것 같았다.
“자네들이 해줘야 할 건 탐사대의 호위와 몬스터 섬멸일세. 고대 유적은 오래됐다 보니 일부 몬스터가 들어와서 살아가고 있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 몬스터가 딱 좋아하는 곳이지.”
“이상하군. 탐사대에 전투 담당 인원도 없나?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요?”
진이 해밍턴 교수에게 물었다. 무식해 보이는 놈이지만, 고용주에 대한 예의는 최소한도로 지키고 있었다.
“원래 탐사대의 호위를 맡던 자들은 후원이 끊겨서 떠났네. 지금 탐사대원들도 싸우라면 싸울 수 있긴 하네만, 우린 몬스터와 싸우러 온 게 아니라 고대 유적을 탐사하기 위해 왔네.”
“후원이 끊겼는데도 탐사를 계속 이어간다는 말입니까?”
장신의 거너, 조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어렵게, 정말 어렵게 발견한 고대 유적지가 이곳이네. 후원금 대부분을 숨겨져 있던 봉인을 해제하는 데 사용했지. 게다가 나를 비롯한 우리 탐사대원들은 개인 자산까지 투자했네. 여기서 포기한다면 빚더미만 남을 뿐이네. 우리는 반드시 이 아래에 있는 보물을 손에 넣어야 하네.”
노라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투자한 게 많으니 본전 뽑기 전까지 빠질 수 없다는 말이었다.
“…우리 보수는 있는 거요?”
진이 우려하며 물었다.
“의뢰를 신청할 때 재산 확인서가 필요하더군. 의뢰비를 낼 돈은 있으니 걱정 말게. 난 미스캐토닉 대학교의 교수일세. 탐사대의 후원은 끊겼어도 그 신분은 아직 유효하네.”
“후. 그건 다행이군요.”
그 후로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 나와 용병들은 따로 만났다. 이 자리를 주선한 건 진이었다. 그는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입을 열었다.
“니들도 이 바닥에서 일했으면 알겠지. 여기 분위기가 요상하다는 걸.”
“쓸데없이 무게 잡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라.”
“마법쟁이 주제에 성격 하나 더럽게 급하군. 요컨대 감이 안 좋다고. 빚까지 낼 정도로 쪼들리는데 용병을 구할 돈은 있다? 왠지 이상하잖아.”
“이상하긴 하군.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하기 싫으면 관두던가.”
나는 같잖음을 담아 말했다. 해밍턴 탐사대가 이상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내 입장에서 이 용병들이 더 변수였다. 기왕이면 용병들이 없는 쪽이 더 낫다.
“어우 씹, 마법쟁이 아니랄까 봐. 존나 까칠하네. 내 말은,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서 우리끼리 뭉치자는 거지. 뭉치면 생존 확률이 높아진다. 당연하잖아.”
“탐사대도 탐사대지만 널 믿을 수 있을 것 같나?”
“이러지 마. 우린 같은 입장이야. 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그의 말이 맞다. 대비해서 나쁠 건 없지. 느낌이 안 좋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조용히 있던 조쉬가 말했다. 조용하던 그가 나서니 딴지 걸기도 힘들어진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끼리 어쩌자는 거지? 뭉쳐서 탐사대 뒤라도 칠까?”
“탐사대가 우리 뒤통수를 친다는 확신은 없어. 내 감이 기우라면 좋겠지만… 확신이 들 때 우리끼리 뭉치자는 거지. 그 후에 상황 봐서 탐사대 뒤를 치든, 내빼든 결정하는 거야. 알아들었어?”
“보험이군.”
“거너 형씨의 말대로 생존을 위한 보험이지. 어때?”
“나쁘지 않다. 보험은 보험일 뿐이니.”
조쉬가 말했다.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보험이니까. 이놈들과 앞으로도 계속할 것도 아니다. 손해는 딱히 없었다.
“좋아. 뭔가 수상쩍은 것들을 발견하면 바로 공유하자고.”
***
탐사대는 아침 일찍 고대 유적지로 향했다.
해밍턴 교수는 탐사대장으로서 우리를 지휘했다.
“진. 자네는 정찰을 부탁하네. 이미 중간까지 탐사해서 함정이 없다는 건 파악했네.”
“중간까지만 탐사했다면서요? 그 이후에 있는 함정은 어쩌고?”
“그때는 조심해서 내려가야지. 몬스터가 있나 없나 잘 확인해주게. 조쉬. 자네는 후방을 부탁하겠네. 일부 몬스터를 뒤를 노리는 걸 좋아하네. 맹수에게 등을 보이면 안 된다는 말이 있지 않나. 그건 몬스터에게도 통용되는 말이네. 물론 용병인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
“…….”
“유진 마이어. 자네에겐 탐색 마법을 지속적으로 써주게. 몬스터나, 특이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해주면 되네. 아, 그리고 내려가서는 배터리를 충전해주게. 전격계 마법사로서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
“알겠습니다.”
대충 대답했다.
해밍턴 교수의 의도는 뻔했다. 시작부터 용병들을 굴려서 체력과 마나를 빼놓으려는 속셈이다. 용병들이 하는 일이기도 하기에 다른 용병들은 깨닫지 못한 모양이지만.
고대 유적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내 근처에 있던 해밍턴은 내 반응을 보며 웃음을 짓는다.
“고대 유적 곳곳에 서려 있는 마나를 느낀 모양이군. 역시 마법사야.”
“고대 유적은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마나가 고이고 던전처럼 변형이 일어나는 것은 이론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실제로 보니 신기하군요.”
“처음에는 다 그런 법이지. 나는 처음 고대 유적을 탐사했을 때 돌멩이 하나, 하나를 살펴보며 걸었네. 그만큼 신기한 것투성이었지.”
“지금은 그러시지 않은 모양이군요.”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 하지만 시간은 영원하지 않고 유한하네. 탐사대는 나 홀로 움직이지 않으니… 최대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네.”
돌멩이 하나, 하나를 전부 확인했다면 새로운 걸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가령 어제 내가 발견한 황금 팔찌나, 황금의 선물 같은 물건들 말이다.
곧 중간 구역에 도착했다. 일종의 공터였는데 거대한 비석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비석의 중심에는 고대어가 적혀 있었다.
고대어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내용이 뭔지는 안다. 원작 게임에서는 친절하게 자막으로 알려주니까. 저것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묻는 질문이었다.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었느냐?
해밍턴 교수는 당연히 이 비석에 적힌 고대어를 해석했다. 교수라 불리는 만큼 그 실력은 진짜였으니까.
그녀는 탐사대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모든 준비가 됐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십시오.”
비석에 적힌 고대어가 한순간 빛났다.
드르르르르륵!
비석이 반으로 갈라지며 자동문처럼 열린다. 그 앞에는 어두컴컴한 길이 나타났다.
“역시 해밍턴 교수님이십니다.”
“이번이 해밍턴 탐사대의 마지막 탐사라는 게 안타깝군요.”
“교수님! 비석에는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까?”
“별거 아닐세. 우리의 각오를 묻는 내용이었네.”
해밍턴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정말 별거 아니었군요.”
탐사대원 또한 웃으며 말했다. 앞서 나가던 진이 움찔거린다. 한순간 어색함을 느낀 것이다.
탐사대는 모두 한통속이었다. 그들은 이 고대 유적에 제물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도 인신 공양을 요구하는 고대 유적임을 안다. 참고로 제물은 평범하지 않을수록 좋다. 일반인이 아닌 용병을 고용한 것도 그 이유다.
‘하지만 탐사대는 고대 유적 안쪽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 미리 겪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다르다.
게임을 통해 이 고대 유적을 겪었다. 뿐만이 아니라 3가지의 각각 다른 공략법도 알고 있다.
곧 우리는 첫 번째 관문에 도착했다. 비석에 적힌 고대어가 은은히 빛나고 있다.
“비켜보게. 우선 내가 고대어를 해석해보겠네.”
해밍턴 교수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대어를 해석했다. 나는 그녀의 입가가 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교수님. 고대어는 무슨 뜻입니까?”
“…음. 조금 비틀어 둔 고대어일세. 해석에 시간이 필요하겠군. 자네들은 이곳에 특이한 게 없는지 조사해보게.”
해밍턴 교수의 지시가 떨어졌다. 탐사대원들은 저마다 도구를 꺼내 조사를 시작했다. 마법으로 탐색하거나, 특수 도구로 구석구석 살펴보는 자, 바닥에 엎드려 귀를 땅에 대는 자 등 각양각색이었다.
나는 배터리를 충전해주면서 해밍턴 교수를 주시했다.
해밍턴 교수는 고대어를 보자마자 해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여자를 바쳐라.
현재 여기에 있는 인원은 총 24명이다. 그중에 여자는 교수를 해밍턴 교수를 비롯한 24명밖에 되지 않는다. 시작부터 교수의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해밍턴 교수는 지금 누구를 어떻게 제물로 바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부대장인 클리프를 불렀다.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클라라. 이쪽으로 와볼래?”
클리프가 탐사대의 막내이자, 여자인 클라라를 불렀다.
“네!”
그들은 3분 만에 희생자를 정한 것이다. 나는 힐긋 뒤를 바라봤다. 밖으로 빠져나가는 문은 아직 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