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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1913화 (1,693/2,000)

< 1913화 > 1913. 다크 문

아무리 해밍턴 교수라고 해서 대놓고 죽으라고 하지 않는다. 탐사대 전원을 적으로 돌릴 수 없을 테니까.

나는 귀에 마나를 집중하며 청력을 일시적으로 높여 해밍턴 교수의 대화를 엿들었다.

“내가 저 비석의 내용을 해석한 바에 의하면…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제 도움이요?”

“정확히는 젊은 여자의 도움이지. 이 고대 유적은 젊고 순수한 여자를 원하고 있네. 드문 일은 아닐세. 고대로부터 처녀는 신성하게 여겨지기도 했으니….”

“그, 그렇긴 하죠. 설화 중에는 처녀와 관련된 이야기도 많고…. 디바인 프랑스에서도 순결한 처녀에 집착하잖아요.”

“이해해 준다니 고맙군.”

클라라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유적이 인신 공양을 원하나요? 순결한 처녀는 인신 공양에 최적인 제물이기도 하잖아요.”

“아니, 그런 건 아니니 걱정 말게. 유적은 젊은 여자가 자신을 위해 춤을 추기를 원한다네. 그 대상이 처녀면 훨씬 좋고. …그래서 말인데. 처녀인가?”

클라라는 주변을 살폈다. 해밍턴 교수와 클리브를 제이하고 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 뺨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처녀예요.”

“부끄러워하지 말게. 순결을 지키고 있다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네. 요즘 시대에는 순결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어….”

그래도 클라라의 붉게 물든 뺨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순결을 지키고 싶어서 지킨 건 아닌 것 같은데.’

클라라는 빈말로도 예쁘다고 말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머리는 푸석하고 피부도 깨끗하지 않았다. 탐사대로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고생한 티가 팍팍 났다. 체구는 또 어찌나 다부진지 남자처럼 입혀 놓으면 여자로 전혀 보이지 않을 것 같다.

“제가 정확히 뭘 하면 되나요?”

“저 비석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 되네.”

“어, 그 두 개 다 제가 잘 못하는 건데요….”

“완벽하게 할 필요는 없네. 중요한 건 마음이니까. 아, 그래도 노래는 주의해주게. 음정은 틀려도 발음은 중요하네.”

해밍턴 교수는 노래를 알려주겠다며 전혀 색다른 언어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언어네요. 고대어인가요?”

“그렇네. 고대어를 발음한 것이네. 축복과 관련된 노래지.”

전부 거짓말이었다.

저건 고대어가 아니라 대륙 끝 어딘가에 있는 소수 부족의 언어였다. 뜻은 나 자신을 바친다는 말. 춤도 인신 공양을 위한 춤이었다.

‘원작대로 흐르는군.’

30분 뒤, 클라라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비석 앞으로 나섰다.

클라라는 해밍턴 교수로부터 속성으로 교육받은 춤을 췃다. 양팔과 양다리의 관절을 기괴하게 꺾는 춤이었다. 숙련도가 낮아서 막춤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어서 갈라진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춤은 엉성하고 노래는 불쾌했다. 탐사대원 중 절반 이상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비석이 은은하게 빛났다.

그리고.

드르르르륵!

바닥에 문이 열리더니 촉수 같은 게 튀어나와 순식간에 클라라를 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꺄아아아아아악?!”

쾅!

바닥이 닫혔다.

시간으로 따지면 2초 남짓한 시간.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 그 누구도 반응하지 못했다. 뒤늦게 탐사대가 소리쳤다.

“클라라?!”

“이, 이게 대체?!”

“함정? 함정이 왜 갑자기 발동한 거야?!”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해밍턴 교수는 비석을 빤히 쳐다봤다. 비석은 반으로 쩍 갈라지더니 그대로 옆으로 벌어졌다. 비석 안쪽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 해밍턴은 순간적으로 미소 지었으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비석의 함정이었군. 어쩔 수 없는 일일세. 자네들도 방심하지 말게. 고대 유적은 미지로 가득 차 있으니,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이네.”

해밍턴 교수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탐사대원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진정했다. 그들은 동료의 죽음에 익숙했다. 고대 유적은 대부분 위험한 만큼 사망자가 제법 나온다. 게다가 이 세상 자체가 죽음에 가까운 편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는 건 아니었다.

탐사대원들은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클라라가 이렇게 죽을 줄이야….”

“함정이 없는 건 확인했잖아. 왜 갑자기 발동한 거야?”

“해밍턴 교수님이 실수한 거 아닐까? 고대어를 잘못 해석했거나….”

“그건 아니지. 해밍턴 교수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데. 저번 고대 유적에서 교수님의 지식이 없었다면 우리 모두 죽었을 거야. 너도 알잖아. 진짜 문제는 용병들이야. 이럴 때를 대비해서 고용한 게 용병들인데… 하는 일이 없잖아.”

“맞아. 용병들이 제대로 반응했으면 클라라가 그리 허무하게 죽진 않았을 거야.”

“저 용병들을 고용하는 1억에 가까운 크레딧을 썼다던데… 돈만 버린 거 아니야?”

분위기가 순식간에 용병 적대적으로 변했다. 용병을 범인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당연히 듣는 용병들은 억울했다. 아무리 보통의 인간보다 강하다고 해도 예상치 못한,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대응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적어도 시간이 더 있었다면 모를까.

‘뭐, 난 가능했지만.’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 염력을 사용했다면 클라라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선 필요한 일이야.’

클라라라는 탐사 대원을 구해야 하는 이유를 떠올려봤다. 하나도 없었다.

탐사대의 호감을 살 수 있다? 해밍턴 교수는 일이 꼬였다며 오히려 싫어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놈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에든버러 고대 유적의 보물은 내가 독점해야 하니까.

용병에 대한 적의가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진은 인상을 쓰며 탐사대원들을 노려봤고, 조쉬와 나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있었다.

“잡담은 그만하고 주목하게.”

해밍턴 교수가 내려가는 길 앞에 서며 탐사대를 둘러보았다.

“아래는 더 위험할 것이네. 여기서 그만둘 사람이 있다면 억지로 데려가지 않겠네.”

“교수님.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만둡니까. 그건 저희 해밍턴 탐사대를 향한 모욕입니다.”

“이미 우린 모든 각오를 끝마쳤습니다. 클라라 또한 그럴 것입니다.”

그들은 위험하다고 돌아갈 수 없다. 여기서 포기하면 막대한 빚더미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역시! 자네들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우리 해밍턴 탐사대는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걸어갔지. 클라라의 죽음은 안타까우나, 애도는 탐사가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네. 우리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야 하네!”

“맞습니다!”

“해밍턴 탐사대가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위험한 고대 유적인 만큼 보상은 더 달콤하겠지요!”

탐사대의 사기를 끌어 올린 해밍턴 교수는 앞장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진이 바로 그녀의 옆에 따라붙었다.

나는 탐사대원들과 함께 움직였다. 조용히 걷고 있는데 귓가에 바람이 느껴졌다.

-조쉬다. 방금 있었던 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가장 뒤에서 해밍턴 교수를 주시하고 있었다. 해밍턴 교수는 당황 한번 하지 않더군. 마치 일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조쉬는 감이 좋았다. 그러나 나는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지금 조쉬가 내게 목소리를 전한 방법이 궁금했다.

‘마나는 아주 미약하게 느껴지는군. 일단 마법은 아니야. 술식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까.’

바람에 목소리를 실어서 날린 느낌이다. 즉, 바람을 조작했다는 거다. 무공에는 전음이란 수법도 있지만…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바람이 귓가에 느껴졌으니까.

‘바람을 다루는 이능인가.’

그거라면 말이 된다. 마법과 달리 이능은 세심하게 제어할 수 있었다. 응용력이 뛰어나다는 거다.

‘이 바람이 귀를 통해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면…?’

암살하기 딱 좋은 능력이 아닌가.

‘저항력을 갖추고 있어서 힘든 일이겠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 조심해야겠군.’

비석이 나왔다. 그리고 비석의 뒤로 길이 나뉘어져 있었다.

모두가 해밍턴 교수를 쳐다본다. 비석에 적힌 고대어를 해석할 수 있는 그녀뿐이니까. 해밍턴을 팔짱을 끼며 비석을 노려봤다. 보자마자 고대어를 해석했을 것이다. 지금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거겠지.

-오른쪽에 삶이 있고, 왼쪽에 죽음이 있다. 삶과 죽음은 하나다.

간단히 말해서 오른쪽 길로 가면 살고 왼쪽 길로 가면 죽는다. 단, 어느 한쪽만 선택해서 갈 수 없다. 두 곳 동시에 가야 한다.

‘악질적인 고대 유적이군.’

그만큼 보상은 달콤할 것이다.

“두 개의 운명이 있어야 길이 열린다고 하는군.”

해밍턴이 입을 열었다.

까놓고 말해서 여기엔 1명만 희생하면 된다. 용병 중 하나를 왼쪽 길로 보내는 게 가장 합리적이다. 이유는 정찰하라고 보내면 된다. 용병이 가려고 하지 않으면 탐사대원 하나를 붙여서 보내던가. 그럼 싫어도 해야겠지.

해밍턴 교수는 일행을 절반으로 나눌 생각이다. 탐사대 절반을 죽인다. 왜? 고대 유적 끝에 있을 보물을 독점하기 위해서.

“내 생각에는 반으로 나눠서 각각 전진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

“특이한 고대 유적이군요.”

“자네들에게 선택지를 주겠네. 오른쪽으로 갈 텐가, 왼쪽으로 갈 텐가?”

“교수님은 어느 쪽으로 가시려고 합니까?”

“내 의견은 여기서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군. 마지막에 선택하겠네.”

탐사대원들의 눈동자가 불안해졌다.

“전부 다 같이 움직이는 건 안 됩니까?”

“자네들도 알지 않나. 이런 종류의 고대 유적은 정해진 대로 행동해야 안전하다는 것을. 내 생각에는 나중에 다시 합류할걸세.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게.”

탐사대원들은 30분 정도 회의한 끝에 절반으로 나뉘었다. 해밍턴 교수는 용병들에게도 말했다.

“자네들도 이야기해서 인원을 나누게.”

“…….”

용병들은 인상을 썼다.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다. 탐사대를 호위하는 게 용병의 일이니까.

“나는 오른쪽으로 가지.”

내가 바로 말했다. 오른쪽 길이 살길이었다.

“오른쪽.”

“…나보고 왼쪽으로 가라고? 이거 어쩌나? 내 직감도 오른쪽인데.”

진이 웃는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진과 조쉬를 쳐다봤다.

“의견은 쉽게 조율될 것 같지 않군. 어떻게 할 거지?”

파지직. 오른손을 타고 전류가 튄다. 전투도 불사하겠다는 내 의도가 전해졌는지 둘의 눈빛도 무거워진다.

“마법사. 어제부터 네 토대가 좀 거시기 했는데… 뭘 알고 있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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