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7화 > 1917. 다크 문
멀린의 넘버즈.
멀린이 사용하던 아티팩트를 일컫는다. 현시대에 알려진 넘버즈는 2개밖에 없으나, 그 두 개 모두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네오 런던의 보물이다.
“그, 그게 넘버즈라고?!”
해밍턴 교수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외친다. 부릅뜬 그녀의 두 눈에는 불신과 기대가 동시에 떠올랐다.
현재 알려진 넘버즈 아티팩트 2개는 모두 10급의 아티팩트였다. 10급. 그 말도 안 되는 경지의 힘이 아티팩트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치를 따질 수 없는데, 멀린의 넘버즈다? 네오 런던에 갖다 바치면 막대한 부는 물론이고 네오 원탁의 한 자리까지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겠지.’
No.6 환몽.
10급 아티팩트.
‘원래는 일회용이지.’
너덜너덜한 No.6 환몽이란 이름으로 일회용 아티팩트로 드랍된다. 그러나 지금 내 손에 들린 환몽은 너덜너덜하지 않았다. 새것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깨끗하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리커버리를 걸어 레드 드래곤을 회복시켜 죽이면 온전한 환몽을 얻을 수 있는 걸 알아내고 퍼뜨렸지.’
단점이라고 한다면 전투 난이도가 조금 올라간다는 거다. 하지만 10급 아티팩트를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단점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아쉬운 점은 전투용이라 하기엔 애매하다는 거지.’
그래도 어마어마한 물건인 건 맞았다. 이걸 적절한 대상에게 판매한다면 백작 이상의 작위도 노려볼 만하다.
‘이건 내 거다. 이런 귀한 걸 함부로 내줄 순 없지.’
환몽을, 남청색 케이프 코트를 몸에 걸치려고 한 순간이었다.
“당장 그거 내려놔!!”
해밍턴 교수가 소리쳤다. 탐욕에 이성이 먹힌 그녀는 굶주린 짐승 같았다.
“싫다면?”
해밍턴 교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진정하게. 진정하고 내 말을 듣게. 그 정도 수준의 물건은 처분하기도 힘드네. 용병인 자네와 달리 내겐 뛰어난 인맥이 있네. 의회에서 일하는 자들도 다수 있어서 고대 유적을 제값을 받고 처분할 수 있네. 7대3. 자네가 7이고 내가 3. 구미가 당기지 않나?”
“구미는 무슨. 9대1이라고 해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내가 갖지 못한다면, 자네도 갖지 못하는 걸세. 이 악마의 손이라면 자네와 그 물건을 동시에 없애버릴 수 있네. 부디 멍청한 짓은 하지 말게.”
“하하. 멍청한 짓을 하는 게 누굴까. 환몽은 내 거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환몽이 네 것이 될 일은 없다. 악마의 손으로 나를 죽인다? 해보시던가.”
“이노오오옴!!”
해밍턴 교수의 팔에서 터지는 소리와 함께 피 분수가 일어났다. 손바닥에 막대한 에너지가 생성되더니 광선이 되어 내게 날아온다.
나는 환몽의 능력을 사용했다.
멀린의 10급 아티팩트인 환몽이 가진 능력은 딱 하나였다.
앱솔루트 폴리모프.
대상을 깊이 이해하고 있거나, 대상의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조건 하에 대상으로 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조건만 만족한다면 드래곤으로 변할 수도 있는 거다.
그리고 마침 내 앞에는 드래곤의 유전 정보가 있었다.
레드 드래곤이 흘린 피가 발끝에 닿는다.
[앱솔루트 폴리모프]
몸이 커지고 피부에 비늘이 돋아난다. 미각, 청각은 살짝 둔해졌지만, 다른 감각은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다.
콰아아아앙!
해밍턴 교수가 쏘아낸 광선이 내 가슴팍에 적중했다. 조금 아프긴 하나, 그 외의 상처는 없다.
“크르르르….”
불만스럽게 숨을 흘렀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금 나는 레드 드래곤 해츨링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마, 말도 안 되는…. 인간이 드래곤으로 변하다니…! 이, 이게 멀린의 넘버즈인가! 내, 내놔라! 그건 내 것이다!”
악마의 손을 사용하고 팔 한쪽을 잃은 해밍턴 교수가 피를 흘리며 내게 다가온다. 탐욕에 눈이 멀어서 지금 상황이 어떤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입을 쩍 벌렸다. 드래곤이 됐다면 브레스를 써주는 게 인지상정. 그대로 숨을 삼키다가 멈칫했다. 공기와 마나로 가슴을 달구려고 했으나, 냉기 때문에 가슴이 달궈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능을 사용한다.
파지지직.
뇌전이 입안에 모이며 드래곤 하트와 공명한다. 폐가 짜릿해지며 입안에 거대한 힘이 모여든다.
한계까지 참다가 그대로 숨결을 내뱉었다.
콰콰콰콰콰콰!
번개 숨결이 그대로 해밍턴 교수를 휩쓸었다.
‘내가 번숨 쓰는 날이 올 줄이야.’
쿵쿵!
앞발을 내딛으며 해밍턴 교수의 시체로 다가갔다. 드래곤이 되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지라 걸음은 굉장히 어색하고 불안정했다.
해밍턴 교수의 유해는 종아리 두 개뿐이었다. 나머지는 소멸했는지 사라져 있었다.
‘음.’
이것으로 해밍턴 탐사대와 용병들은 나를 제외하고 전부 죽었다.
‘중간에 변수가 있긴 했으나 결국 계획대로군.’
나는 드래곤에서 인간으로 돌아왔다. 드래곤이 되는 감각은 대단하긴 했으나, 원래 인간이었던지라 어색해서 버티기 힘들었다.
인간으로 돌아온 나는 괜스레 몸에 걸친 환몽을 털었다.
‘환몽도 환몽이지만, 이 고대 유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건 이 문이지.’
고대 유적 중심에 있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레드 드래곤이 나왔던 커다란 문은 어느새 꽉 닫혀 있었다.
커다란 하나의 문에 총 다섯 개의 문이 겹쳐져 있는 문.
‘월드 도어.’
플레이어는 이 문을 어디로든 문이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세계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편의성을 위한 문이니까. 이 문이 있으면 세계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나는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확하게는 문의 중심, 동그란 구멍이 있는 부분으로. 그 구멍에 망설임 없이 손을 집어넣는다. 손가락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걸 잡아당기듯이 빼낸다.
열쇠.
돌로 깎아서 만든 듯한 투박한 디자인의 열쇠였다.
이게 게임이었다면 아마 이런 정보창이 떴을 거다.
No.9 월드 도어.
멀린이 애용하는 아티팩트.
좌표가 지정된 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열쇠 끝에는 5개의 작은 구슬이 박혀 있었는데, 3개는 회색이고 2개는 파란색이다. 5개의 좌표를 저장할 수 있는데, 현재 좌표 2개의 좌표만 저장되어 있다.
원작대로라면 한 곳은 여기다. 다른 한 곳은 북쪽일 터.
‘문이 있다면 지정된 좌표로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지.’
원작 게임에서는 편의를 위해서라도 필수로 얻어야 하는 아티팩트다. 이게 있으면 대륙 끝에서 끝으로 1초 만에 이동할 수 있으니까.
‘좌표를 지정하러 직접 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열쇠를 챙긴다.
고대 유적은 한동안 내버려 둘 것이다. 월드 도어의 본체는 눈앞에 있는 커다란 문이다. 함부로 옮기려 했다가 고장이라도 나면 큰일이다.
‘돌아가서 보고하면 되겠군. 탐사대는 내부 분열로 전멸했다고 하면 된다.’
미스캐토닉은 해밍턴 교수와 클리프가 저지른 비리들을 알고 있다. 탐사대의 후원을 끊은 것도 그 때문. 탐사대가 내부 분열로 전멸했다고 해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다. 해밍턴 교수라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판단할 테니까.
‘미스캐토닉 대학은 이미 해밍턴 교수를 내치기로 했으니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할 테지. 해밍턴 교수가 살아있었다면 소송을 걸며 지저분한 싸움으로 끌고 갈 테니.’
탐사대에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한 자들은 짜증을 내겠지만, 그뿐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
“그러니까. 해밍턴 탐사대는 고대 유적지에서 내부 분열로 전멸?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그래. 고대 유적지는 빈 깡통이더군. 그에 해밍턴 교수가 확 돌아버린 거지. 다시 가서 확인해도 된다.”
“네가 다 죽인 거 아니고?”
“내가 뭐 하러 그딴 짓을?”
“……하아. 이거 안 좋네. 어쨌든 넌 의뢰를 실패한 거야. 의뢰주를 호위하는 임무인데, 의뢰주가 죽었으니까.”
“그건 내가 감안해야겠지.”
“쯧. 결국 얻은 것없이 시간만 버린 거네.”
“…….”
투자한 시간 대비 어마어마한 이득은 얻은 거다. 근질거리는 입을 꾹 참았다.
로즈를 믿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믿음만으로 전부 털어놓기에는 내가 얻은 것들이 너무 컸다. 상황이 어떻게 꼬일지 모르는 이상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다.
“하아. 떨어진 평판을 복구할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리네. 평판은 다시 쌓는 게 더 힘들단 말이지.”
“난 평판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만.”
“네 평판이 아니라 내 평판 문제야. 네가 실패하면 중개업자인 내 평판도 떨어지는 게 당연하잖아.”
“……그렇군.”
“어쨌든 선금으로 받은 돈이 있다는 거로 위안해야지. 넌 어쩔 거야? 바로 다음 의뢰를 할 거야?”
“당분간 쉴 생각이다.”
“다쳤어?”
“그런 건 아니고 해야 할 일이 있다.”
“아. 사업쪽?”
“뭐, 비슷하지.”
나는 로즈와 인사를 하고 G 구역 저택으로 돌아왔다.
정원 중심에 있는 벚나무에 다가갔다.
‘빨리 자라는 것 같더니… 며칠이 지났는데도 변한 게 하나도 없군.’
겨울나무처럼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잎이 단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된게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내가 있을 때는 하루에 몇 cm씩 크던 것 같던데. 역시 정신 교감을 꾸준히 해야 하는 건가.’
벚나무에 손을 올렸다. 내 마나가 벚나무에 스며든다. 아스트랄을 여는 것과 동시에 벚나무와 정신을 공명한다. 벚나무가 짜증스레 묻는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일하다 왔다.’
배고프니 밥을 달란다. 치킨을 먹고 싶다고 칭얼거린다. 이래 보여도 치킨집 사장이다. 치킨 정도야 원 없이 먹일 수 있었다. 집사와 메이드들을 시켜 치킨을 가져오라 명했다.
벚나무의 투덜거림을 들으면서 손을 움직여 벚나무를 쓰다듬었다. 벚나무에 생기가 돋아난다. 앙상한 가지에는 연분홍색 벚꽃이 수줍게 피어났다. 벚꽃 냄새가 주변을 가득 채운다.
파지직.
벚꽃 사이로 스파크가 튀었다.
‘내가 너의 주인이다. 내가 너의 주인이다. 내가 너의 주인이다.’
벚나무는 시끄러워 죽겠다며 한탄했다.
***
집무실로 들어온 나는 주머니에서 월드 도어를 꺼내 열쇠 구멍에 찔러 넣었다. 오른쪽으로 돌리면 저장된 좌표로 연결할 수 있고, 왼쪽으로 돌리면 좌표를 저장할 수 있다. 왼쪽으로 돌렸다. 여긴 내 거처니까 좌표를 저장해둘 필요가 있었다.
열쇠 끝부분, 3개의 회색 구슬 중 하나가 파란색으로 변했다. 이걸로 월드 도어에 지정된 좌표는 총 3개.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