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25 - 1925. 다크 문
파울을 아무리 고문해도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알파티어 제약회사의 정보는 아주 기초적인 것들밖에 없었다. 어디서나 알 수 있는 기초적인 정보들.
‘모종의 방법으로 기억이 지워진 건 확실하다. 마법의 흔적은 없으니 과학 기술이나, 약이겠지.’
알파티어는 게약회사다. 기억을 지우는 약이 있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특정 기억만을 지우는 약? 다른 곳은 몰라도 알파티어는 가능하다.
알파티어는 과학 기술로 만든 약뿐만이 아니라, 마법 재료로 만든 마법약도 취급한다. 생물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물질을 약이란 이름으로 죄다 취급한다고 보면 된다. 특정 기억을 지우는 약? 공식적으로는 없으나, 비공식적으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기억을 되찾아야 한다.’
기억을 되찾는 마법. 혹은 기억을 되찾는 기술. 기억을 되찾는 약.
‘무엇이든 뚫는 창이 있으면, 무엇이든 막는 방패가 생겨나는 법. 분명 기억 복구와 관련된 기술이 있을 거다. 인류는 그런 식으로 발전해왔으니까.’
딸칵!
노트북을 두들기며 인터넷에 검색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터넷으로 고급 정보를 얻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 인터넷은 기본적으로 각국에서 검열하니까.
‘그래도 빈틈은 있고, 내가 원하는 건 작은 단서다. 그 작은 단서를 깊이 파고들면 어느 정도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정 안 되면 정보를 전문으로 다루는 업체에 의뢰한다. 이건 막대한 돈이 소모되고 이쪽의 정보가 역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단점이 있으나 손쉽게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없다. 마법약 목록을 뒤져봐도 기억과 관련된 건 하나도 없다. 그나마 마법 재료 중에 기억과 관련된 것들이 있으나 내가 원하는 건 없군. 논문 쪽도 싹 다 훑어봐야 하나?’
혀를 찬다.
예전에 마법과 관련된 논물을 살펴본 적 있다. 논문 신뢰도는 생각보다 떨어졌다. 어디서 본 듯한 논물들이 주를 이루었고, 그중에서도 쓸만한 내용이 적힌 논문은 천 개 중 한 개가 있을까 말까 하다. 그것도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고 통제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군사적인 이유로, 혹은 기업 기밀이라는 이유로.
똑똑똑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노트북은 껐다. 답이 안 나왔다.
“소장님. 부교도소장 캐빈 대위입니다.”
“…들어와.”
케빈이 들어와 경례한다. 절도 있는 그 자세를 보고 내심 혀를 찼다. 이놈은 일부러 괴롭혀도 주눅 들지 않는다. 정신력이 강해서… 라기보다는 다른 무언가를 믿고 있었다. 뒷배가 있는 게 확실했다.
“무슨 일이지?”
“최근 기억 복구에 대한 정보를 찾는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알았지?”
“간수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혹시 기억이 온전치 못하십니까?”
혹시나 싶어 간수 몇에게 물어봤는데 그새 소문이 난 모양이다. 딱히 상관없었다. 파울과 알파티어에 관한 소문만 나돌지 않으면 된다.
“개인적인 일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거면 나가서 일이나 해라.”
“제국군에 기억을 복구하는 마법약이 있다고 들은 적 있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아니었군. 자세히 말해봐라.”
“스파이 중에는 기억을 지우고 투입되는 자들이 있습니다. 스파이가 붙잡혔을 때 정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제국군은 스파이의 정보를 뜯어내기 위해 지워진 기억을 복구하는 마법약을 개발했다. 라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다른 나라였다면 헛소리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그런 약을 만들었다면 이미 알파티어 제약회사가 선점하고 비싼 값에 팔거나, 기업의 이익을 위해 자기들만 사용하고 있을 테니까.
일리가 있었다.
알파티어 제약회사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은 네오 런던, 디바인 프랑스 같은 도시 국가와 하이스트 제국이니까. 특히 하이스트 제국은 메가코프라도 쉽게 진출할 수 없는 곳이다. 설령 진출하더라도 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하이스트 제국은 카이저의 군사주의 독재국가니까.
카이저의 마음에 안 들면 기업이고 나발이고 터져나가는 국가였다.
“그 약, 구할 수 있나?”
“구할 수 없었다면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진 인맥을 총동원하면 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만?”
“특수 전략물자로 지정된 물건입니다. 구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교도소에는 보는 사람들이 많으니 은밀한 곳에서 거래해야 합니다. 돈은 대략 2억 크레딧 정도가 필요할 것 같군요.”
의심쩍다.
케빈은 내게 반목하는 놈이다. 호시탐탐 내 자리를 노리는 놈. 당장 총구를 겨눠도 이상하지 않은 놈.
그런 놈이 갑자기 내게 도움을 주려고 한다? 꿍꿍이가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2억 크레딧이라. 비싸긴 해도 그 정도 값어치는 있는 물건이겠지.”
“당연합니다.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2억 크레딧이면 비싼 것도 아닙니다.”
“좋다. 진행해라.”
“알겠습니다!”
르멘 교도소의 부교도소장에 불과한 케빈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기 어렵다. 아마도 뒷배를 이용하려는 거겠지.
‘함정이라면 구하지도 못하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이 기회에 이놈의 뒷배를 알아내고 죽여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2억 크레딧.
교도소에서 빼돌린 예산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죄수들을 쥐어짜 내면 된다.
‘흉악한 갱단 놈들답게 꿍쳐놓은 재산이 꽤 있더군.’
출소만 하면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라고 지껄이는 죄수들이 몇몇 있었다.
‘출소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줘야겠지.’
마침 죄수들에게 심어 놓은 공포심도 희석되어가고 있다. 최근 조용히 지냈더니 금붕어 같은 범죄자들이 나대는 것이다.
‘못 나대도록 날 잡고 몇몇을 처형해야겠지. 범죄자 놈들도 제 가족만은 끔찍이 여기는 것 같으니… 가족까지 모조리 잡아서 처형한다.’
폭동을 일으켜도 상관없었다. 그때는 폭동을 이유로 처형하면 되니까.
‘언젠가는 내게 대든다는 생각마저 못 하게 될 거다.’
그 전에 예산을 아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예산을 더 많이 횡령할 수 있을 테니까.
‘역시 먹는 것에 손을 대야겠지. 하루 두 끼로 줄이긴 했는데… 그래도 죄수가 많다 보니 돈이 제법 나가는군. 음. 음식물 쓰레기로 가축의 사료를 만든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인간이 먹을 수 있게 조정할 수 없나? 뭔가 마법적 영감이 떠오를 것 같은데…. 음식물 쓰레기에 마법을 걸어 신선도를… 아니, 잠깐. 음식물 쓰레기보다 인간의 몸을 개조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나? 위장을 마법으로 개조하면 음식물 쓰레기도 어렵지 않게 소화할 수 있겠지.’
마법적 영감이 마구마구 떠오른다.
‘소환술사 길리언을 죽이고 키메라 연구서와 소환 마법서를 얻었지. 이참에 인신 공양 마법도 연습해볼까?’
다 내 마법의 발전을 위해서다.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고개를 까닥이며 목을 풀었다. 우두둑! 뚜둑! 뼛소리가 울린다. 어쩐지 어깨가 무겁다.
‘최근에 너무 무리했나? 피로가 쌓인 기분이군.’
네오 런던에서 사업 관리와 마법 공학 공장 관리, 르멘 교도소 관리, 개인 마법 연구 등등.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케빈을 치우고 안체를 부교도소장 자리에 앉히면 일이 어느 정도 편해지겠지. 그때까지만 참자.’
어깨를 주무르며 소장실 밖으로 나갔다.
• • •
일주일 뒤, 케빈이 내게 말했다.
“거래 장소가 정해졌습니다. 교도소 근처에 있는 황무지 지역에서 거래하기로 했습니다.”
“30분 거리에 있는 그 황무지?”
“네. 아무것도 없기에 거래에 최적인 장소입니다. 돈은 준비되셨습니까?”
“나를 뭐로 보고. 당연히 준비됐다.”
“거래하겠다고 전하겠습니다. 시간은… 내일 점심 식사 후. 어떠십니까?”
“나쁘지 않군.”
다음날이 되었다.
네오 런던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르멘 교도소로 온 나는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안 좋았다. 최근에 쉬지 않고 일했던 피로가 지금 터진 느낌이었다.
‘옛날 생각나는군. 빡세게 일했던 날도 이랬지.’
5급의 경지에 오르고 이런 최악의 컨디션을 겪는 건 처음이었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자연스럽게 신체 또한 강해진다. 마법사인지라 극단적으로 신체 능력이 강해지진 않지만, 잔병치례는 하지 않을 정도는 된다.
‘이번 일이 끝나고 이틀 정도 푹 쉬어야겠군.’
교도소 밖으로 나갔다.
케빈이 따로 차를 준비했다. 은밀한 거래라 부하들을 데리고 갈 수 없었다. 마음에 안 들어도 케빈과 둘이서 움직여야 한다. 2억 크레딧이 든 돈 가방과 함께 자동차 뒷좌석에 몸을 싣는다.
운전석에 앉은 케빈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쩐지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시는군요. 괜찮으십니까?”
“나는 멀쩡하다. 운전에나 집중해라.”
“출발하겠습니다.”
자동차가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스스로에게 바디 스캔 마법을 사용해 몸 상태를 점검했다. 컨디션 난조가 케빈의 수작이란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 문제 없다. 단순히 기분 탓이라고 하기엔 느낌이 너무 안 좋군. 나한테 독을 먹인 건 아닐 텐데… 뭐지?’
나는 르멘 교도소에서 뭔가를 먹은 적이 없었다. 간수고, 죄수고 믿을 놈이 없는데 함부로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 음식은 항상 네오 런던에서 먹었다. 음료도 마찬가지다.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실 때는 마법을 사용했다. 독이 내 몸에 들어올 일 자체가 없었다.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나?’
아니다.
감각이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익숙했다. 전투를 앞뒀을 때,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때, 날 죽이기 위한 암살자가 수를 쓸 때 등등. 직감에 불과했지만, 이상하게 이런 종류의 직감은 곧잘 맞아떨어졌다.
‘듣기로는 수많은 위험한 경험을 겪은 자들이 후천적으로 얻는다고 하던데, 난 그 정도는 아닌데 타고났지.’
스스로의 재능에 감탄하면서 전투를 대비한다. 어떤 기습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자동차는 황무지 중심, 약속 장소에서 멈췄다.
케빈이 먼저 내려 뒷좌석 문을 열어줬다. 나는 흙먼지 냄새를 맡으면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