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작물 속으로-1930화 (1,710/2,000)

Chapter 1930 - 1930. 다크 문

“긴장할 필요 없어. 니클라스보다 네가 더 마음에 들었으니까. 이 일에 관해선 묻지 않겠어. 플라쉬의 일도 묻어줄게. 대신 자기의 진짜 얼굴을 보여줘.”

들켰다.

‘혹시 떠보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그녀의 눈동자가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도망치는 건 힘들다.

“연금술사인 제가 원소계 마법을 사용해 그렇습니까?”

“연금술사도 따지고 보면 마법사잖아. 원소 마법을 쓸 수도 있겠지. 특별한 일은 아니야.”

“저를 레온 슈나이더가 아니라 판단하신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거 아니? 대지의 정령은 황무지를 좋아해. 그건 순수한 땅이니까. 사람들은 대지의 정령이 숲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야. 도시의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를 싫어하는 건 맞는 말이고.”

“……그곳에 대지의 정령이 있었습니까?”

“대지의 정령을 불러서 그날 있었던 일을 확인했지. 우연이라고 생각해?”

“니클라스는 최악의 경우까지 대비했군요.”

장소를 정한 건 내가 아니라 니클라스였다. 그저 싸우기 편한 장소라 선택한 게 아니었다.

“베르그만 대령이 계획을 짠 줄 알았습니다만, 이제 보니 군단장님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군요.”

“그건 아니야. 내가 일을 깨달았을 땐, 베르그만 대령은 이미 전역하고 본가로 돌아갔어. 플라쉬는 기밀 중의 기밀이라 대형급도 얄짤 없이 사형이거든. 모든 죄는 죽은 니클라스가 뒤집어썼어.”

“…….”

설마 베르그만 대령이 망설임 없이 튀어버릴 줄이야. 그 빠른 행동에는 감탄했다.

“대지의 정령이 보여준 기억 속에는 네가 사슴벌레로 변하는 장면도 있었어. 작은 벌레로 변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것도 식은 죽 먹기겠지. 아마 폴리모프를 사용할 수 있는 아티팩트 일 거야. 내 말이 틀렸니?”

“맞습니다. 전 레온 슈나이더가 아닙니다.”

“진짜 레온 슈나이더는?”

“제가 죽인 건 아닙니다. 제가 그를 봤을 땐 이미 갱단의 습격받아 죽기 직전의 상태였습니다.”

“르멘 교도소에 잠입하려는 이유는?”

“개인적인 일입니다. 알파티어 제약회사의 고위 간부 출신의 죄수를 심문하러 왔습니다.”

“아하. 알파티어 제약회사에 원한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것도 꽤나 깊은. 플라쉬를 왜 원했는지도 알겠어.”

“…….”

“자, 이제 네 진짜 모습을 보여줘.”

빠져나갈 수 없었다. 한숨을 내쉰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에게서 적의가 없다는 거다. 또 내가 그리 유명하지 않다는 거겠지.

앱솔루트 폴리모프를 해제하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게 진짜 모습이야? 훨씬 보기 좋네.”

마리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게 전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왜 제게 호의를 보이십니까?”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아끼는 부하를 죽이고, 레온 슈나이더의 모습으로 교도소에 잠입했다. 나를 증오하면 증오했지, 호의를 보일 이유가 없었다.

“얘가 너를 좋아하니까.”

그녀의 가슴 위에 앉아 있던 요정이 내 주위를 돌았다. 이내 내 어깨에 조심히 앉는다. 어떤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령은 순수하고 선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전 순수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헛소문이야. 날 보면 모르겠니?”

“…….”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는 별명부터가 웃는 학살자니까.

“정령은 자연이야. 자연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아. 인간의 선악을 따지지도 않지. 그리고 자연의 근원은 마나야. 너는 마나의 사랑을 받고 있어.”

“제가 마나 친화력을 타고나긴 했습니다.”

“타고났다. 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내겐 어렴풋이 느껴져. 네 안에 잠들어 있는 거대한 잠재력이. 이 세상이 너만을 편애하는 것 같은 불합리함까지 느껴진다니까?”

“플라쉬는 네가 가져.”

마리가 손짓했다. 내 어깨 위에 앉아있던 요정이 다시 마리의 가슴으로 날아갔다.

“이대로 떠나시는 겁니까?”

“말했잖아. 여긴 놀러 온 거라니까. 자기는 마음대로 해. 지금처럼 교도소를 마음대로 운영해도 좋고, 아니면 소리소문없이 떠나던가. 어느 쪽이든 존중해줄게.”

“기왕이면 교도소를 운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베르그만을 직접 처리하고 싶습니다.”

“베르그만을? 왜?”

“당하면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주는 성격인지라.”

“흐음. 나쁘진 않네. 정보는 줄 테니 알아서 처리해봐. 어느 정도 날뛰어도 상관없어. 베르그만은 명백한 배신자이자, 반역자니까.”

그녀가 소장실 밖으로 나간다. 나는 레온 슈나이더의 모습으로 변해서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그녀가 수송기를 타고 떠날 때까지 지켜봤다.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거대한 폭풍이 스치고 지나간 듯한 기분이었다.

• • •

유리아가 메이드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한 달이 지났다.

한 달.

입학생들이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적응하지 못한 입학생 대부분은 퇴학당했다. 그게 대략 100명 정도다. 그에 현재 메이드 아카데미에 남아 있는 94기 입학생은 200명 정도였다. 그리고 이 수도 조금씩 줄어들 것이다. 낙제점을 받는 순간 바로 퇴학이니까.

새벽 5시.

해가 뜨기 전에 기숙사 천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알람 소리가 울린다.

부드러운 클래식 음악의 일부였다. 잠에서 깨기는커녕 더 깊이 잠들 것 같은 알람. 여기서 일어나지 못하면 5시 15분에 시작하는 아침 점호에 늦게 된다. 그럼 감점 2점. 점수가 0점이 되면 퇴학이니 반드시 일어나야 했다.

“…….”

유리아는 언제나처럼 기상 알람 소리가 울리자마자 일어났다. 여유롭게 침대에서 내려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잠옷에서 메이드복으로 갈아입는다. 옷매무새를 확인하고 간단히 방을 청소하고 나면 10분이었다.

“꺄아아아아악!”

기숙사 방 중 하나에서 비명이 울린다. 동기 중 한 명이 조금 늦잠은 잔 모양이었다. 유리아는 그녀를 도와주기로 했다. 순수한 선의는 결코 아니었다. 도움을 주면 언젠간 자신에게 돌아오리라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물론 거창한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유, 유리아 씨. 고마워요. 유리아 씨가 아니었으면 아침 점호에 늦었을 거예요.”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밖으로 나가시죠. 이러다 아침 점호 시간에 늦겠습니다.”

오늘 아침 점호에는 6명이 늦어 감점받았다. 어제 있었던 전투 훈련 때문에 피로가 쌓인 탓이다. 유리아는 그녀들을 도와주고 싶어도 도울 수 없었다. 기숙사가 달랐으니까.

아침 점호가 끝나고 1시간가량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아쉽게도 유리아는 이 자유 시간을 누리지 못했다. 그녀는 오늘 아침 식사 당번이었으니까.

유리아를 비롯한 메이드 몇 명이 조리실로 향했다.

깐깐한 표정의 요리 담당 교관 메이드 안나는 식사 당번을 앞에 두고 말했다.

“요리의 첫째는 청결, 둘째는 맛, 셋째는 아름다움입니다. 자, 요리는 뭐라고요?”

그에 메이드 학생들이 일제히 말했다.

“첫째는 청결, 둘째는 맛, 셋째는 아름다움입니다.”

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메이드들을 나눴다.

“1조는 빵, 2조는 소시지와 계란을 요리합니다, 3조는 세팅을 준비합니다. 자, 움직이세요.”

짝짝!

안나가 박수를 쳤고 메이드들이 움직였다.

유리아는 2조였다. 냉장고에서 소세지를 꺼내려고 손을 뻗었다.

툭.

옆에 있던 메이드와 어깨가 부딪혔다. 이미 알고 있었던 유리아는 피하는 대신 일부러 몸을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 씨. 조심 좀 해. 하마터면 너 때문에 넘어질 뻔했잖아.”

파란 머리의 메이드가 비죽 웃는다. 날카로운 눈매의 그녀는 부랑아 출신의 티네였다. 티네는 쓰러진 유리아를 보며 이죽거렸다.

“그쪽이 먼저 다가와서 제 어깨를 밀치시지 않으셨나요?”

“뭔 소리야. 네가 굼벵이처럼 있으니까 부딪친 거잖아. 사과해.”

티네가 유리아를 노려본다. 눈동자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유리아가 딱히 그녀에게 뭔가를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시기심과 질투로 유리아를 싫어할 뿐이다.

유리아는 물론 그녀에게 별 관심 없었다.

“넘어진 건 저예요. 사과는 제가 받아야겠습니다.”

“해보자는 거야?”

“해보면 감당하실 수 있으시고요?”

“이게 미쳤나?!”

티네가 목소리를 높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대답하는 유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선 제압을 위해 따귀라도 한 대 때려줄까 고민할 때였다. 교관인 안나와 메이드들이 이쪽을 쳐다봤다.

“거기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쯧.”

혀를 찬 티네는 안나에게 몸을 돌렸다. 눈에 독기를 빼고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재료를 꺼내려다가 소란이 일었네요.”

유리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안나는 둘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말했다.

“주방에선 흔히 일어나는 사고지요. 둘 다 다친 곳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실수인 것 같으니 감점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네. 교관님.”

티네는 몸을 돌렸다. 유리아만 보이는 각도에서 입꼬리를 밀어 올린다.

하지만 그녀는 알까.

유리아가 입학 첫날부터 쌓아 올린 평판은 고작 이런 일로 무너지기엔 너무 견고하다는 것을.

“유리아. 괜찮아?”

연갈색 머리의 줄리엣이 유리아에게 다가왔다. 유독 엮이게 되는 동기였다.

“네. 괜찮습니다. 티네 씨는 절 싫어하시는 모양입니다.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유리아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티네가 널 질투 하는 거야!”

이렇게 조금씩, 알게 모르게, 독이 스며들 듯이 티네의 평판을 깎는다. 일종의 정치질이었다. 그녀가 지금껏 베풀어온 계산된 선의는 아군을 만들었다.

원래라면 티네 같은 거슬리는 여자는 독살하든, 암살하든 단번에 치워버렸겠지만, 여긴 메이드 아카데미였다. 뜬금없이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피해가 더 커진다.

줄리엣은 시원하고 순박한 성격 때문에 친구가 많다. 아마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방금 있었던 일이 소문으로 퍼질 것이다.

“줄리엣. 후추가 너무 적게 들어간 것 같아요.”

“어, 그런가? 역시 조금 더 넣는 게 좋겠지?”

“계란은요?”

“가져오는 걸 깜빡했어. 잠시만 기다려!”

줄리엣은 다 괜찮은데 많이 덜렁거렸다.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