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31 - 1931. 다크 문
아침 식사 시간이 끝난 뒤에는 교육 시간이 이어졌다.
메이드 아카데미의 교육은 대개 실습 위주다. 처음에는 이론으로 무언가를 알려주고, 그다음은 실습으로 돌입한다. 어느 정도 익숙해질 것 같으면 바로 평가가 시작된다.
평가는 당연히 성적과 관련되기 때문에 대충할 수는 없다. 낙제점을 받는 순간 바로 탈락이니까. 워낙 못하는 경우가 아니면 낙제점을 주진 않아도 메이드 아카데미 학생으로서 굉장히 피곤한 스케줄 이란 건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오전 수업의 교탁 위에 선 것은 깐깐한 얼굴의 안나였다. 요리 담당 교관이기도 한 그녀는 준비한 자료들을 학생들에게 건네고 말을 이었다.
“오늘 배울 것은 네오 런던의 전통인 만찬회와 무도회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 절반 이상은 귀족가에 취직하기를 원하고 있겠죠. 귀족가에 일하는 것만큼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일은 없을 테니까요.”
메이드를 가장 잘 대우해주는 곳이 귀족가였다. 귀족가는 메이드가 없는 것만으로 무시당하고, 평판을 신경 쓰는 만큼 메이드를 확실하게 대우해줄 수밖에 없다.
“옛날이었다면 모를까. 오늘날에는 자격증을 가졌더라도 귀족가에 취직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기존에 귀족가에서 일하고 있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죠.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 중에 10% 정도만이 귀족가에서 일하게 될 겁니다. 나머지는 기업 혹은 상류층 가문에서 일하게 되겠지요.”
메이드 자격증만 있다면 상류층에서도 상당히 자격을 받을 수 있다. 경력이 없더라도 허드렛일은 하지 않는다. 기업의 경우 높은 확률로 비서 일을 맡게 된다.
“귀족가 혹은 상류층 가문에 들어가게 되면 여러분은 주기적으로 만찬회와 무도회를 준비하게 됩니다. 만찬회와 무도회에 중요한 것은 음식과 에티켓입니다. 음식이 맛이 없다면 평판이 떨어지게 됩니다. 에티켓은 말할 것도 없겠죠. 여러분은 에티켓을 몸에 익히고, 최소한의 요리를 평가할 줄 아는 미각과 지식을 익혀야 합니다. 맛있다고 아무 음식이나 내놓는 것 자체가 모욕이니까요.”
맛있는 음식이라고 무작정 만찬회에 내놓을 수 없었다. 음식에는 역사와 전통이 담겨 있어야 했다. 저렴한 음식을 내놓는 건 모독이었다.
안나는 만찬회 필수 요리를 비롯해 무도회 에티켓을 주르륵 설명했다.
메이드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질문이 있다는 뜻. 안나는 손에 쥐고 있던 지휘봉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질문이 있는 모양이군요. 뭐가 궁금하시죠?”
“무도회의 사교댄스를 저희가 배워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저희는 준비하는 쪽이 아닌가요? 메이드나 집사는 무도회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을 텐데요.”
“옛날이라면 그랬겠죠. 하지만 요즘은 다릅니다. 메이드 자격증을 취득한 여러분은 최고의 신붓감이기도 합니다. 신사분들 중에는 여러분에게 댄스 신청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또한 무도회에 초대된 사람이 없을 경우 여러분들이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를 채워야 할 일도 생깁니다. 그때를 대비해 사교댄스를 배우는 겁니다. 사교댄스를 익혀둬서 나쁜 것은 전혀 없으니 안심하고 수업에 따라오세요.”
“알겠습니다. 교관님.”
일부 메이드들의 얼굴이 몽롱해졌다. 그녀들은 적당한 신사를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을 상상했다. 상류층 가문으로 시집간다. 그를 위해 메이드 아카데미에 지원한 여인도 적지 않다. 그리고 간혹 운이 좋으면 귀족가에 시집갈 수도 있다.
지금 시대에서 귀족과 평민의 연애와 결혼은 의외로 흔했으니까.
“오늘과 내일은 요리를 배우고, 그 후에 무도회에 사용되는 음악과 춤을 배울 겁니다.”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와 교육 방식이 조금 달랐다. 하나를 배우면 바로 그 하나를 시험했었다.
“교관님. 그럼 시험은?”
시험은 없지 않을까. 학생들은 묘한 기대감을 갖고 교관을 바라봤다. 교관은 살짝 웃으며 그녀들의 기대감을 박살 냈다.
“여러분은 다음 주 마지막 날에 조를 나눠 모의 만찬회와 무도회를 개최할 겁니다. 2개 조가 번갈아 가며 귀족 역과 고용인 역을 맡습니다. 저를 비롯한 교관 5명이 여러분을 평가할 것입니다.”
학생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 보니 대규모 시험이었다. 게다가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닌 조별 시험. 그녀들은 반사적으로 유리아를 힐끗거렸다. 지금까지 매번 최고의 평가를 받은 유리아와 같은 조가 된다면 낙제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으니까.
“참고로 조는 무작위로 정합니다. 말이 나왔으니 조를 정하기로 하죠.”
조는 제비뽑기 프로그램을 통해 간단히 정해졌다.
조는 총 10명으로 이루어졌다. 유리아와 줄리엣은 같은 1조였다.
“인원이 부족한 조는 부족한 대로 진행하세요. 불이익은 없을 것을 약속합니다. 함께 합을 맞춰 평가할 조는 평가 당일 날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점심 식사 당번들은 저를 따라오세요.”
교관이 나가자마자 강의실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유리아의 옆에 앉은 줄리엣은 묘하게 흥분한 얼굴이었다.
“우리가 같은 조라서 다행이야! 유리아가 있으니 낙제점 받을 일은 없겠지?”
“그렇게 말씀하셔도 곤란해요. 평가는 조별이 아니라 개인이 받는 것 같으니까요.”
“그래도 유리아랑 같은 조니 묘하게 안심되는걸.”
“줄리엣 양은 만찬회와 무도회를 좋아하시나요? 마치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사실 만찬회와 무도회를 겪은 적은 없어. 이야기만 들었거든. 한 번쯤은 꼭 경험해보고 싶었는데 여기서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어. 유리아는 어때?”
“저도 마찬가지예요.”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그랬다. 그리고 [백환] 세계에서도 만찬회와 무도회를 여는 경우는 드물었다. 파티를 자주 개최하긴 했으나, 그건 메이드들이 참석하는 파티였다. 대부분 광란의 파티로 끝났다.
유진은 온갖 파티를 개최했는데, 그중 하나는 마약 파티였다. 이유는 단순히 흥미였다. 유리아에게 몇 없는 아찔한 경험이었다. 마약에 중독된 메이드가 속출하는 바람에 파티가 끝난 후부터 상당히 고생해야 했으니까. 그녀가 마법과 인체에 조예가 깊지 않았다면 수십 명의 메이드가 폐인이 되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약간 시간이 흐르자, 유리아의 주위로 같은 조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녀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유리아를 리더로 취급했다. 유리아의 성적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유리아 씨. 어떻게 해야할까요?”
“모의 파티 시험이라니… 감이 안 잡혀요.”
“고용인 역은 당연히 해야 하니 할 수 있는데… 귀족 역도 해야 한다니. 저희가 할 수 있을까요?”
유리아는 병아리처럼 삐약거리는 학생들을 보며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백환] 유진의 저택에 막 메이드를 들이기 시작했을 무렵. 그녀는 직쩝 나서서 메이드들을 가르쳐야 했다.
“일단 진정하세요. 교관님이 주신 자료물이 있으니 무엇을 평가할지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확실한 건 요리와 에티켓은 확실하게 평가한다는 거예요.”
“요리도 연습해야겠네요.”
“후우…. 요리에는 자신이 없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자유 시간에 모여서 연습하지 않으실래요?”
“그게 좋겠네요.”
유리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가는 개인으로 한다? 유리아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개인으로 평가할 거면 처음부터 이런 방식으로 시험을 보지 않을 테니까. 알게 모르게 조별로 평가할 것이다. 주로 인간관계 같은 걸 보겠지.
유리아는 문득 시선을 느꼈다.
반대쪽.
유리아만큼이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여인이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살짝 어두운 회색빛이 감도는 은발의 여인이었다. 유리아와 닮은 듯하면서도 닮지 않은 그녀는 붉은 눈으로 유리아를 주시했다.
리디아 멧커프.
그녀는 멧커프 백작가의 영애였다.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귀족 특유의 품위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귀족. 메이드 아카데미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단어지만, 의외로 귀족가의 영애들이 메이드 아카데미에 많이 입학한다. 메이드 자격증 자체가 뛰어난 신붓감이라는 증명이기도 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왕실의 시녀가 되는 걸 목적으로 입학한 귀족들이 많다. 리디아 멧커프는 후자 쪽이었다.
성적은 동기 중에서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당연히 유리아였다.
여러 가지로 닮은 구석도 있어서 그런 건지 몰라도 학생 대부분은 유리아와 리디아를 라이벌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정작 유리아는 리디아를 라이벌로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었다. 다른 학생들에게 그러하듯 그녀에게 별 관심 없었다.
유리아는 시선을 돌렸다. 리디아보다 더 눈에 띄는 여자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파란 머리의 부랑아 출신, 티네가 노골적으로 유리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 • •
학생들은 자유 시간 외에도 모일 수 있었다.
소등 후 몰래 방을 나와서 만나는 것이다. 잠자는 시간이 줄어들긴 하지만, 메이드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며 낙제점을 피하기 위해서는 자는 시간마저 쪼개야 했다. 특히 이번 시험은 교관 5명이 평가하는 대규모 시험이기에 학생들은 더더욱 긴장하고 있었다.
물론 소등 후 방밖으로 나온 게 걸리면 5점 이상의 감점을 받는다. 달리 말하면 걸리지 않으면 된다.
유리아에겐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녀는 굳이 따지자면 교관 쪽 입장이었지, 학생 입장에서 생활하는 건 처음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으으응….”
방으로 돌아가는 길. 혼자 복도를 조용히 걷고 있던 유리아의 귀에 신음이 들렸다. 감각이 발달한 유리아가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억눌린 소리.
“으으윽, 앗, 아앙!”
찌걱이는 물소리가 섞여 있다.
단순히 스스로를 위로하는 소리였다면 유리아는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갔을 것이다. 젊은 나이의 여인들이 갇혀서 생활하고 있으니 성욕이 쌓이는 건 당연하니까.
문제는 신음 소리가 묘하게 겹쳐져 있다는 것.
“하아악, 항!”
“잠깐, 소리가 너무 커. 줄여.”
“그치만… 너무 기분 좋은걸.”
동성애.
여자만 있으니 당연한 건가.
유리아는 발걸음을 재촉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덮었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성욕이 있었다. 머릿속에 유진이 떠오른다. 오른손이 사타구니 쪽으로 향하는 것을 간신히 멈췄다.
지금 자위를 하게 되면 그동안 참았던 게 물거품이 된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면회 날이다. 그때 유진을 만나게 될 터. 손가락 따위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유리아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