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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1938화 (1,718/2,000)

Chapter 1938 - 1938. 다크 문

하이스트 제국.

세계 유일의 제국.

하이스트 제국이 제국이라 불리는 이유는 3가지였다. 넓은 땅. 넓은 땅만큼이나 많은 인구수, 다른 국가들보다 뛰어난 군사력.

그러나 천년만년 영원한 국가는 없다고. 지금 하이스트 제국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 원인은 카이저의 노쇠와 후계자의 부재다. 원래 황태자가 있었는데 7급, 초인의 경지를 넘보다가 사망했다. 그 후, 후계자 자리가 비었으나 카이저는 어떤 이유에선지 후계자를 선포하지 않았다.

또 다른 이유는 제국 내부에 들끓는 레지스탕스와 반역자들 문제다. 특히 제국 서쪽 변방에는 반역자들이 많았다. 제국에 불만이 많은 소수 부족이 서쪽에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는 소수 부족 출신이라고 하면 반역자가 아닌가 의심부터 하고 볼 정도다.

제국의 서쪽, 어느 작은 마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활기로 가득 찼던 마을은 음울한 분위기로 가득 찼다. 마을의 청년인 잭슨은 코트를 여미며 조심스럽게 마을 거리를 걸었다.

지금 마을은 도적단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공무원들도 한패였다. 세금은 말도 안 되게 치솟았고, 그놈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통행세라는 명목으로 돈을 뜯겼다. 밖에 나오는 일이 있으면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제국군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잭슨이 이를 갈았다. 스스로를 레지스탕스라고 주장하는 도적단이 들어온 지 벌써 3개월. 인터넷과 전화는 끊겼다. 외부와 연락할 수 없었다. 도적놈들이 마을 주위를 지키고 있어서 밖으로 나가는 것도 힘들었다.

‘한 달 전쯤에 마을 밖으로 도망쳤던 니콜 아저씨가 도시에 무사히 도착했겠지…?’

가능성은 적었다.

한 달이 지났는데도 제국군이 오지 않으니까. 길을 가다가 몬스터에게 당했을 수도 있고, 다른 도적단을 맞닥뜨릴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 학살을 일삼는다는 갱단에 끌려가 노예로 부려질 수도 있었다.

‘…어쩌다 서쪽이 이렇게 된 거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물론 그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반란.

서쪽을 지배하던 9군단이 반란을 일으키고 실패했다. 문제는 어중간하게 실패했다는 거였다. 제국이 서쪽을 수습하기에는 여력이 없었다. 동쪽에는 몬스터 웨이브의 조짐이 보인다던가. 남쪽 최전선에는 소규모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던가. 북쪽은 기상 이변으로 고생이라던가. 카이저의 자식들이 황태자의 자리를 두고 치열한 암투를 벌인다던가. 지금 제국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문제가 터지고 있었다.

식료품 가게로 향하던 잭슨의 발이 우뚝 멈췄다. 그는 고개를 돌려 골목길에 널브러져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로, 로나?!”

그의 소꿉친구인 로나였다. 잭슨은 로나의 몸을 잡았다. 사늘했다. 온기 따윈 없었다. 그녀의 옷은 찢어져 있고 하반신에는 허연 액체와 피가 흐른다. 후두부에는 함몰되어 있었다. 간살 당한 것이다.

‘이, 이 도적 새끼들이!’

잭슨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대화를 나누었던 소꿉친구가 오늘은 골목길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그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몸을 떨고 있을 때였다.

“이거 누구야. 잭슨이잖아.”

골목길 안쪽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허리춤에 칼과 총을 찬 남자였다. 현재 이 마을을 지배하고 있는 도적단의 일원. 잭슨은 그를 보는 순간 분노가 먼지처럼 사라지고 두려움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

“노, 노만….”

“아, 마침 잘됐다. 술 먹게 돈 좀 줘. 술을 파는 게 하필이면 대장 동생이라 빼앗을 수도 없고…. 쩝. 그 여자는 네가 치워라. 네 친구잖냐. 반항 좀 했는데 그대로 죽어버릴 줄은… 쩝.”

도적이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잭슨은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멈칫했다. 혹시 몰라 챙긴 작은 칼이 손에 걸렸다.

지금 기습하면 놈을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살의를 느끼며 망설이는 순간이었다.

퍼억!

노만의 발이 잭슨의 복부를 걷어찼다. 주머니에 있던 지갑과 칼이 빠져나와 바닥을 굴렀다.

“칼? 이 새끼가 지금 날 죽이려고 해?”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린 노만이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잭슨의 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길고 예리한 칼.

“노예 주제에 감히 반역하려고 해?”

“바, 반역자는 네놈들이잖아!!”

“이 새끼가! 저번에 대장이 말했잖아! 우린 반역자가 아니라, 구원자라고! 이 빌어먹을 제국에 저항하고, 제국에 지배당하는 시민들을 구하는 구원자!”

“개소리 집어쳐! 너희는 그냥 반역자라고! 제국군과 싸울 의지도 없이 여기에 틀어박힌 겁먹은 반역자!”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오냐, 네 뜻대로 죽여주마!”

노만이 검을 번쩍 치켜들며 휘둘렀다. 그러나 검은 도중에 멈춘다. 보이지 않는 힘에 붙잡힌 것처럼.

“말 잘했다. 네 말대로 이놈들은 겁먹은 반역자에 불과하다.”

마을 입구 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잭슨은 허공에 멈춘 칼끝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하얀 가면을 쓴 제국군이 있었다. 얼굴은 가렸고 소속 마크가 있어야 할 어깨에는 아무것도 없으나, 제국군의 군모를 쓰고, 군복을 입은 제국군이었다. 총 20명이 넘은 제국군이었는데 전원이 바짝 군기가 들어있었다.

뚜벅뚜벅.

그들의 앞, 그들의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검은색 장갑을 낀 손을 휘저었다. 염력에 붙잡혔던 노만이 옆으로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군인들이 움직여 노만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제국군?! 니들이 이러고도 우리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여긴 우리 구역이다! 카이저의 개새끼들이 우리를 건드려?!”

“시끄럽군. 조용히 만들어라.”

그가 명령했다. 군인들은 일제히 허리춤에서 몽둥이를 꺼냈다. 그리고 사정없이 노만을 내려쳤다.

퍽퍽퍽퍽퍽퍽!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내려친다. 노만은 입을 다물고 바닥에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제압당한 노만은 어느 한 군인의 손에 질질 끌려 마을 입구에 있는 트럭에 실렸다. 잭슨 피떡이 되어 끌려가는 노만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처럼 보였다. 물론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

멍하니 있던 잭슨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구해준 군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됐다. 놈들의 소굴은 어디지?”

“저기 있는 중앙에 있는 가장 큰 건물입니다. 마을 회관을 놈들이 점령해서 도적 두목이 거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소속이 어디 신지…?”

“기밀이다.”

“아, 네….”

남자는 앞으로 걸어갔다. 군인들이 그의 뒤를 따른다. 척척척. 아무 소리 없이 발맞춰 진군하는 군인들의 기세는 날카로우면서도 절제되어 있었다. 잭슨은 침을 꿀꺽 삼키고 홀린 듯이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평소에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마을 사람들도 밖으로 나왔다. 그들도 잭슨처럼 제국군의 뒤를 따른다. 그들의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중앙으로 걸어가던 남자가 우뚝 멈춘다. 자연스레 군인들의 발도 멈추었다. 남자가 2층 건물을 향해 턱짓했다. 군인 여섯 명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1분도 지나지 않아 집에 있던 남자 셋이 끌려왔다.

“저희는 도적이 아닙니다!”

“거짓말입니다! 저놈들은 도적이에요!”

“도적은 네놈이겠지!”

군인들의 대장이 잭슨을 쳐다봤다. 잭슨은 그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깨닫고 마을 사람인 척하는 두 명을 가리켰다.

“저 둘은 도적입니다! 평소에도 폐하를 모욕한 반역자 새끼들입니다!”

“그렇군. 감히 내 앞에서 거짓말을 지껄이다니. 괘씸하니 혀와 눈을 뽑아라.”

군인들은 즉각 움직였다. 이 일을 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닌 듯 도적들의 혀와 눈을 뽑았다. 기계처럼 정확하고도 자비 없는 손속이었다. 잭슨은 군인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짜릿함을 느꼈다.

자신들을 괴롭혔던 도적놈들이 지르는 비명은 꽤 달콤했다.

군인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중앙 건물 앞에는 도적단이 모여 농성하고 있었다. 자동차로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소총으로 군인들을 겨눴다.

갈색 수염의 도적단장이 군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멈춰라! 경고는 한 번뿐이다! 더 가까이 오면 쏜다!”

남자는 무시하고 앞으로 걸었다.

“쏴!!”

도적들이 방아쇠를 당긴다. 잭슨은 군인을 믿었다. 초능력을 사용하는 군인. 제국군 장교가 고작 총알 따위에 당할 리 없었다. 실제로 총알은 통하지 않았다.

‘배리어?’

커다란 배리어가 군인들 전체를 감싸며 총알을 튕겨냈다. 총알이 아예 통하지 않았다.

‘초능력자가 아니라 마법사였어!’

초능력자도 희귀하지만, 배틀 메이지는 그보다 더 희귀했다.

“멈추라고! 여기 인질이 있다! 인질 안 보여?!”

도적단장이 여자를 앞으로 내세우며 그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나신의 여자. 강간당한 흔적이 온몸에 가득했다.

“귀찮게 구는군.”

마법사가 중얼거렸다. 직후, 도적들이 모두 멈췄다. 염력에 붙잡힌 것이다. 여자를 비롯한 인질들은 뒤로 밀려나고, 붙잡힌 도적들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법사가 손을 아래로 까딱였다.

쿵! 도적들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씨발…!”

일부는 기절했고, 일부는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도적단장은 후자였다.

“하는 꼬라지를 보니 못해도 5급 이상의 마법사구나! 너 같은 놈이 왜 이딴 변경에 있는 거냐?”

“반역자를 잡으러 왔다.”

“그걸 왜 너 같은 놈이 하냐고!! 이상한 가면을 써서는! 소속까지 숨겨? 진짜 제국군이 맞는 거냐?!”

“아니라고 하면 어쩔 거지? 제국군이 반역자를 보호할 것 같나?”

“우린 반역자가 아니다! 구원자다!!”

“하.”

마법사는 그저 비웃었다.

도적단장은 몸에서 힘을 끌어올렸다. 그의 피부가 붉게 변하며 근육이 치솟는다.

“소수 부족 쪽 비전 기술이군. 일시적으로 신체를 부풀리는 기술. 쓰고 나면 체력이 떨어지는 쓰레기 기술이지.”

“쓰레기라고? 네놈을 죽일 기술이다!”

도적단장이 마법사를 향해 뛰었다. 마법사가 염력을 사용했다. 도적단장의 다리가 잠깐 멈췄다. 허나 다시 사나운 기세를 흘리며 달려든다.

쾅!

도적단장의 주먹이 배리어를 두들긴다. 배리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마법을 사용했다.

콰콰쾅!

시퍼런 벼락 한줄기가 도적단장에게 떨어졌다.

[라이트닝 스트라이크]

“이깟 벼락…!”

도적단장이 버텨냈다. 온몸에 피어오르는 연기와 격통을 무시하고 마법사를 향해 한 발 내디딘다.

쾅!

예고도 없이 두 번째 벼락이 떨어졌다. 도적단장의 두 눈이 뒤집히려다가 가까스로 원래 자리를 되찾았다.

쾅!

세 번째 벼락.

도적단장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마법사는 몸을 돌렸다. 군인들이 남은 기세가 꺾인 도적들을 붙잡았다. 군인들은 자비가 없었다. 도적들이 저항하면 몽둥이를 꺼내 사정없이 내려쳤다.

“으으으….”

도적단장이 몸을 꿈틀거렸다.

마법사는 도적단장에게 다가가 그 머리를 퍽퍽 짓밟으며 군인들에게 명령했다.

“반역자와 손잡은 공무원들이 있다. 빠짐없이 모조리 잡아라. 반역자들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군인들에게 명령한 마법사는 가만히 서서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다 도적 단장이 꿈틀거리며 딱딱한 군홧발로 걷어찼다.

그렇게 마을 중앙에 반역자들이 모두 붙잡혔다.

“총 몇 명이지?”

“반역자 74명이고 그 가족까지 합쳐 총 167명입니다.”

“운이 좋군. 제대로 건졌어. 모두 트럭에 실어라.”

“그게… 트럭 공간이 부족합니다. 추가로 트럭을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안 된다. 시간이 너무 걸린다. 어떻게든 욱여넣어라. 정 자리가 없으면 트럭에 매달고 간다. 그게 아니면 팔다리를 잘라서 넣던가.”

“몇몇은 여기서 처형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반역자는 반역자 나름대로 쓸데가 있다.”

군인들은 반역자와 그 가족들을 트럭에 태우고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그제야 환호성을 내질렀다. 잭슨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군인들이 도적단장 이상으로 두려웠기에 감사 인사조차 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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