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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1942화 (1,722/2,000)

Chapter 1942 - 1942. 다크 문

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

풍만하고 육덕진 몸매의 중요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검은색 가죽은 손바닥보다 면적이 작았다. 눈 부신 태양처럼 빛나는 금발에 피처럼 붉은 눈동자. 그 입가에 걸린 것은 요염한 웃음이었다.

그녀의 등 뒤로는 악마를 뜻하는 검은색 박쥐 날개와 길쭉한 검은색의 꼬리.

꼬리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임프의 몸을 꿰뚫어 죽인 게 저 꼬리이기 때문이다.

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진다.

조금 창피하게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내가 서 있는 이 공간 자체가 그녀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괴물의 혓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기분이다. 당장에라도 괴물에게 삼켜져 죽을 것 같은 무력한 기분.

그녀의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씨발. 아스타로트가 나오다니…!’

아스타로트는 나를 쳐다보다가 주변을 훑고는 다시 나를 쳐다봤다. 아스타로트가 흥미를 내비치는 건 내가 유일했다. 그녀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건 100% 나 때문이다.

제물인 167명은 그저 고개를 조아렸고, 스태프들은 바닥에 떨어져 쾌락에 흐느꼈다. 아스타로트의 시선만으로 사정했는지 그들의 사타구니는 축축하게 젖어갔다.

반면에 나는 아스타로트에게 성욕을 느끼지 않았다. 불세출의 미녀? 다 의미 없다. 아스타로트의 본체가 추악한 괴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아스타로트의 저 모습은 본체이면서도 본체가 아니었다. 화신체를 만들어 본체를 그 안에 가둬 놓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본체를 보자마자 어지간한 존재는 죄다 미쳐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72 악마는 악마라기보다는 마신에 더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재밌네. 아주 재미있어.”

이곳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목숨은 그녀의 변덕에 달렸다. 그녀가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 했다. 그녀에게 있어 우리는 벌레와 같았다.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콰지지지지직!

공간이 비명을 지른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막으려고 세계가 발악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스타로트는 세계의 저항을 힘으로 찍어누르며 무시했다.

“너한테서 그리운 냄새가 나. 아주 오래된… 그 시절의 냄새가.”

무슨 소리지?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았다. 압박감에 입을 열기 힘들었으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래된 냄새. 그게 그녀가 내게 흥미를 느끼는 이유인가?

그러는 와중에도 카메라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기를 바랐다. 그래야 돈을 제대로 벌 수 있을 테니까.

“좋아. 너의 미래를 봐줄게. 너도 네 미래가 궁금하지?”

• • •

마계. 달리 지옥이라 불리는 곳을 지배하는 72 악마 중 하나, 아스타로트는 오랜만에 자신을 부르는 기척을 느꼈다.

아주 미약한 기척.

고작 인간 167명의 공양으로 자신을 부르는 건 괘씸하다 못해 불쾌할 지경이었지만, 정식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이었기에 신기한 기분도 들었다.

허나 딱 거기까지.

직접 나설 이유는 없었다.  고작 인간 167명을 빌미로 나서기엔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니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악마 중 하나가 알아서 나서서 처리할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의 흥미를 일으키는 냄새가 맡아졌다.

아주 오래된 과거. 신과 신들이 뛰놀았던 그 시절의 냄새.

마음이 바뀐 아스타로트는 직접 움직였다. 거슬리는 임프는 단번에 처리하고, 자신을 거부하고 밀어내려는 세계의 의지 또한 강제로 짓누르며 현세에 강림했다.

많은 인간이 있었다.

허나 자신을 부른 마법사만큼 특별한 존재는 없었다.

아스타로트는 웃었다.

그녀는 특별한 인간을 좋아했다. 지켜보는 맛이 있었으니까.

“좋아. 너의 미래를 봐줄게. 너도 네 미래가 궁금하지?”

아스타로트가 가진 권능 중 하나. 그녀는 특정 인간의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는 권능을 가졌다. 그녀가 보는 미래는 무수히 많은 미래 중 하나에 불과한 불안정한 미래지만. 그렇기에 미래를 보는 게 더 재밌었다.

“딱히 궁금하진 않다만.”

마법사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말했다. 아스타로트는 키득키득 웃었다. 마법사는 자신을 보고서도 발정하지 않았다. 정신을 보호하는 힘을 가진 건가? 그게 아니면 어떤 특수한 물건? 어느 쪽이든 마법사에게 흥미가 더 생겼다.

“네 의견은 상관없어. 중요한 건 내가 네 미래를 보고 싶다는 거야.”

아스타로트가 권능을 사용했다.

그녀의 눈에 마법사의 미래들이 보인다. 보통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평범한 인간보다 미래가 10배 이상 많았다. 그 미래들은 모두 하나같이 빛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나, 하나 들여다보며 음미하고 싶지만… 지금 그녀는 그 정도로 여유로운 건 아니었다.

지금 볼 수 있는 미래는 딱 하나.

아스타로트는 가장 찬란하면서도 불길함을 느끼게 하는 미래를 들여다봤다.

그곳은 별들이 반짝이는 공간이었다. 지구가 아닌 우주였다. 다만, 의아스러운 건 그녀가 모르는 별자리들이 많다는 거다. 익숙한 별빛들도 많이 보이는데, 그 위치가 죄다 뒤죽박죽이다. 마치 누군가가 별자리를 어질러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시선을 조금 돌리자 우주 공간을 떠도는 무언가가 보였다.

시체였다.

온갖 시체들이 즐비했다. 허나 비슷한 시체는 하나도 없었다. 죄다 격이 초월한 존재들. 모두 아스타로트와 비슷한 존재들이었다.

아스타로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것들은 모두 본체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세계 하나쯤은 능히 농락할 수 있는 존재들의 진짜 육체였다.

그런 이들이 지금 여기에 쓰레기처럼 죽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우리 사이에 전쟁이라도 터졌나? 공허 쪽 놈들의 시체도 보이네.’

조금 놀라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여긴 무수히 많은 미래의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하다. 미래에 세계의 운명을 둘러싼 전쟁이 터졌다? 그럴 수 있다고 느꼈다.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이기도 했으니까.

시선을 돌리던 그녀는 곧 어마어마한 걸 발견했다.

10만 장의 날개를 가진 거대한 고깃덩어리. 달과 비슷한 크기의 그 존채는 메타트론의 본체였다. 72 악마로 치자면 서열 1위의 바엘과 비슷한 위치해 있는 존재. 바엘 조차 싸워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존재가 죽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체 위에 마법사가 서 있었다. 로브를 푹 뒤집어쓴 마법사는 우주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현재에선 그녀를 소환했다 보잘것없는 그 마법사. 마법사의 얼굴은 그녀가 알고 있던 것과 달랐다. 별로 놀랍지 않았다.

‘마법으로 외형을 숨기고 있던데, 아마 저게 진짜 얼굴이겠지.’

조용히 우주를 보던 마법사가 고개를 돌린다. 정확히 아스타로트가 있는 쪽으로.

“……!!”

아스타로트가 깜짝 놀랐으나 빠르게 진정했다. 이건 확정된 미래가 아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인 것이다. 마법사가 고개를 움직여 자신을 바라본 것도 우연일 뿐이다.

‘뭐지 저 눈은?’

마법사의 눈동자가 이상했다. 마치 우주를 저 작은 눈동자에 박아 넣은 듯 무수한 별빛들이 눈동자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단순히 겉보기만 요란한 눈이라고 하기엔 존재감이 남달랐다.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건방지군.”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그럴 리 없어. 내가 보는 건 확정되지 않은, 불안정한 미래. 인간의 문명으로 비유하자면 TV 속 존재가 말을 거는 것과 똑같아.’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법사가 손을 들었다.

그 순간 아스타로트는 이상한 별자리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법사가 손을 드는 순간 별들이 움직여 마법진의 형태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저 많은 별들이 마법진의 요소로서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 아아…!’

아스타로트는 저 존재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주 먼 옛날, 친분이 있던 잊혀진 존재가 목표의 목표.

마법의 근원을 열쇠로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 모든 것을 초월하는 진정한 초월.

잊혀진 존재는 그 목표를 자신이 만든 마법 체계에 이름 붙였다.

모든 것을 초월한 자.

오버 마인드.

‘말도 안 돼.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그게… 정말 가능하다고?!’

사념에 빠진 잠깐 사이에 별과 별빛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이 완성됐다. 마법진에서 나온 건 오색찬란한 한 줄기의 번개.

그 번개에 담긴 초월적인 힘을 느낀 아스타로트는 이게 불안정한 미래임을 알면서도 도망치듯 두 눈을 질끈 감아 권능을 해제했다.

눈앞에는 식은땀을 흘리는 마법사가 있었다.

아스타로트가 씩 웃었다.

어마어마한 걸 봐버렸다. 이걸 다른 존재들에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 다 똑같을 것이다. 일개 필멸자 따위가 초월의 초월을 이룬다? 모두가 믿지 않고 비웃겠지.

“아주 재밌는 미래를 봐버렸어.”

그녀는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눈앞의 보잘것없는 마법사가 그 미래에 도달할 수 있을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밌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도달한다면… 자신은 살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아양을 부려야 한다. 떡상할 가능성이 있는 종목이 코앞에 있는데 투자를 망설일 필요가 있을까.

마법사를 유혹하듯 손을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아스타로트의 안색이 싹 굳었다. 그녀가 다급히 고개를 들어 허공을 쳐다본다.

파지지지지지직!

오색찬란한 번개가 허공을 찢고 나타나 아스타로트에게 내려꽂힌다.

“마, 말도 안 돼…!”

번개가 시공간을 뚫고 당도했다. 같은 건 아니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 불안정한 미래.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미래. 0의 가능성.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나타난 것이다.

“아아아아아악!”

아스타로트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격통을 느꼈다. 번개를 떨쳐내기 위해 힘을 쓰려고 했으나, 번개는 그녀의 힘마저 찢어발기며 본질에 파고든다. 불멸성이 훼손된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는다.

“구, 구해줘!”

아스타로트는 본능적으로 눈앞의 마법사에게 손을 뻗었다. 미래의 본 마법사와 눈앞의 마법사는 동일한 존재다. 그렇다면 이 마법사만이 자신을 구해줄 수 있지 않을까?

마법사는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아스타로트가 아니라, 아스타로트를 죽이고 있는 오색찬란한 번개였다.

이윽고 마법사가 아스타로트의 손을 잡았다. 오색으로 빛나는 번개가 마법사에게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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