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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1952화 (1,732/2,000)

Chapter 1952 - 1952. 화끈하게

막사 밖으로 나오기 전에 기척부터 숨겼다.

내겐 익숙한 일이었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한하린도 기척을 잘 숨겼다. 몸에서 힘을 빼고 마나를 차단했다. 그녀의 경우 능력을 제외한 신체 능력은 D급 이하였기에 마나만 잘 차단하면 기척을 숨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잘하네. 기감이 민감하지 않으면 일반인인 줄 알겠어. 기척을 숨기는 방법도 배운 거야?”

“길드에서 배웠어. 예민한 몬스터를 상대할 땐 이렇게 하는 편이 효과적이니까.”

한하린이 담담히 말했다.

그녀의 길드는 10대 길드 중 2위인 수월(水月). 구린내가 나는 길드이긴 해도 한국 최고의 길드 중 하나답게 쌓인 노하우는 진짜다.

막사 밖으로 나왔다.

묘했다.

아직 해는 짱짱한데 안개가 끼어 시야를 방해한다. 한국이 아니라 외국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폭음이 들렸다. 공기가 흔들린다. 안개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폭음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안개가 소리를 잡아먹은 것 같았다.

‘여길 찾아온 헌터들이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고 있다지.’

오팔은 몬스터를 지원하며 헌터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일부는 철수를 준비하고 있고.

나는 다우징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조심히 걸어갔다. 한하린은 내 뒤에 조용히 따라붙었다. 잠입 행동에 일가견이 있는 나는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능숙하게 피해 다녔다.

다우징이 가리키는 곳으로 갈수록 안개가 짙어졌다. 이제는 2m 앞도 보기 힘들 지경이 됐다.

“읏.”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 한하린의 허리를 잡아 지탱했다. 

“…중력으로 안개를 가라앉힐까?”

이 짙은 안개가 굉장히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그러지 마. 민감한 놈들이라도 있으면 바로 들킬 거야.”

안개가 거슬리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내겐 이럴 때 쓰기 좋은 스킬이 있었다.

[천안(天眼)을 개안합니다.]

예상했던 대로 천안은 지은 안개를 꿰뚫어 봤다. 앞이 보이니 걷기가 편해졌다.

‘진즉에 이럴 걸 그랬군.’

한하린과 떨어지지 않도록 그녀의 손을 꽉 잡고 걸어갔다. 가끔 다우징은 길 같지도 않은 길을 가리켰지만… 개의치 않고 움직였다. 내 목표는 이 다우징이 가리키는 보물이니까.

어느 순간부터 짙은 안개가 옅어졌다. 이제는 10m 앞에 있는 나무도 잘 보였다.

불꽃이 보였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꽃은 2m가 넘었다.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연기는 전혀 나지 않았다. 주위에 있는 나무에 옮겨붙지도 않았다. 불꽃 주위를 새끼줄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앞에 한 남자가 있었다.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있었다. 온갖 창작물을 접하고 있는 나는 일본의 전통 의상이란 걸 알았다. 주로 일본의 음양사 캐릭터들이 입는 옷이었다.

“누구냐?”

그가 뒤로 돌아봤다. 무감정한 눈동자로 우리를 쳐다본다. 일본어였다.

“어떻게 마요이의 결계를 뚫고 이곳에 당도한 거지?”

그는 다소 흥미로운 기색으로 물었다. 이것도 당연히 일본어였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어로 말해, 임마.”

나는 한국어로 대꾸했다. 놈의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실례했군. 설마 여기까지 오는 한국인이 있을 줄은 몰라서 말이지.”

현지인처럼 능숙한 한국말이었다.

“한국말로 다시 묻지.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보물 탐사기가 여길 가리켜서.”

“…설마 그 손에 들린 다우징을 말하는 건가? 특별한 힘은 안 느껴진다만….”

“네가 백림의 간부라고 들었다. 한국에 테러라도 하러 왔나?”

“한국 자체에는 관심없다. 우리 백림이 추구하는 건 일본의 개혁이다. 한국이 먼저 나서지 않는 이상 엮이는 일은 없을 거다.”

“한국에 와서 그딴 소릴 지껄여봤자 설들력이 있을 것 같냐?”

“……이번은 예외다. 후지산의 정기가 쇠약해진 지금. 일본에는 여기처럼 화기가 충만한 곳이 없었다. 곧 완성되니 조금만 기다려라. 이 일이 끝나면 바로 사라져주마.”

“그러십니까. 하고 그냥 넘어갈 줄 알았나? 내 보물 탐사기가 그 불을 가리키고 있잖아. 정확히 뭔지 몰라도 내가 가져야겠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분에 넘치는 탐욕인가. 어리석기 짝이 없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 물건은 감히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길을 열어줄 테니 돌아가라.”

나는 칼을 치켜들고 투지를 끌어올렸다. 저 불이 뭔지 직접 확인해 봐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일본 최악의 범죄 길드인 백림을 적대한다? 여기서 놈을 죽여버리면 내가 놈을 죽였는지 누가 알겠는가.

“하린아.”

“하아, 정말이지….”

한탄하듯 한숨을 내쉰 그녀가 오른손을 들었다. 쫙 펼친 손바닥을 천천히 움켜쥐는 순간 남자를 포함한 주변 공간이 통째로 짓눌린다.

털썩!

강제로 바닥에 무릎 꿇고 앉은 남자는 작게 신음성을 토했다.

“중력인가. 성가신 능력이로군.”

그가 손가락으로 오망성을 그린다. 얼핏 보면 마법과 비슷해 보여도 다르다. 저건 일본의 음양술이다.

후우우우욱.

몸 안의 마나가 하늘 위로 빠져나간다. 직후, 하늘에서 벼락 한 줄기가 놈에게 떨어졌다.

놈은 멀쩡했다. 벼락에 의해 옷이 그을리긴 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능력을 쓴 건 아닌 것 같고… 저 치렁치렁한 옷의 효과인가?’

한 국가를 뒤흔드는 대규모 테러리스트 집단인 백림의 간부다. 특별한 장비를 갖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곤란하군. 방금 벼락으로 위치가 드러났다. 한국과는 척지고 싶지 않았네만… 어쩔 수 없군.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너희 탓이다.”

안개가 모여든다.

시야가 한순간에 차단된다. 천안(天眼)을 개안한 나는 안개 너머를 꿰뚫어 볼 수 있었으나, 지금 문제는 보이지 않는 시야가 아니었다.

이 안개는 질량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점점 그 질량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안개에 파묻혀 압사당할 수도 있었다.

“안개는 내가 맡을게.”

한하린이 말하며 손을 휘둘렀다. 검은색의 구체 10개가 그녀 주위로 나타났다. 중력구. 하나, 하나가 강력한 힘이 압축 되어 있는 구체.

중력구가 사방으로 날아가 안개 사이에 자리 잡는다.

그우우우우웅!

중력구가 힘을 발휘하며 안개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안개의 밀도가 확 떨어지며 팔짱을 끼고 있는 놈이 보였다.

“중력을 힘을 제법 잘 다루는군. 허나 이쪽은 이미 준비 만전이니, 안개는 무한히 증식할 터. 언제까지 버티겠는가.”

“나는 뭐 가만히 있는 줄 아나?”

앞으로 뛰어갔다. 성가신 안개는 한하린이 맡아준 덕분에 길이 열렸다.

[가속을 사용합니다. 10분 동안 유지됩니다. 남은 스택: 11]

파지직.

칼날을 타고 뇌전이 흐른다. 뇌전은 이어 검기와 합쳐져 칼날이 되었다. 허공에 칼을 휘둘렀다.

뇌천류(雷天流) 뇌섬(雷閃).

번개의 칼날이 옅은 안개를 꿰뚫으며 놈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간다.

놈이 손을 휘두른다. 넓은 소매에서 튀어나온 작은 칼을 쥐고 뇌섬을 받아친다. 뇌섬이 그대로 반사되어 내게 날아온다. 나는 칼로 뇌섬을 베어 갈랐다.

“그 단도도 탐나네.”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라 줄 순 없다.”

“이것도 반사할 수 있나?”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10]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9]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8]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7]

찰나를 통한 순간 가속을 연속으로 펼치며 놈의 앞에 순식간에 도달한다. 칼을 치켜든다. 안개가 뭉쳐져 내 팔과 다리를 수감과 족쇄처럼 묶는다. 허나 내 힘을 완전히 막기에는 부족했다.

‘방전.’

파지지지지지지지직!

온몸에서 뇌전이 뻗어 나가 사방팔방 흩어진다. 놈의 몸에 뇌전히 흘러 들어간 건 당연했다. 방전은 마나 소모가 심한 탓에 효율적이지 못하지만, 지금처럼 속전속결을 낼 때는 상관없었다.

뇌천류(雷天流) 뇌광(雷光).

‘죽어라.’

칼날이 푸른 빛을 번뜩이며 놈의 정수리로 떨어진다. 그 머리를 정확히 반으로 쪼개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칼날이 비켜 나가며 놈의 왼쪽 어깨로 떨어진다.

서걱! 

베인 왼팔이 허공으로 튀어 오른다.

“누에여.”

콰직! 놈의 잘린 왼팔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비틀려 사라지더니, 그 어깨에서 커다란 닭의 발이 튀어나와 나를 움켜쥐려 했다.

‘내가 더 빠르다.’

[10초 동안 천재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뇌천류(雷天流) 심즉검(心卽劍).

아래로 떨어지는 칼을 억지로 비틀어 횡으로 베었다. 놈의 상반신과 하반신을 분리했다. 내 몸을 움켜쥐려던 닭 다리는 힘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별거 아니군.”

허공에 칼을 털며 승리감을 만끽했다. 놈이 나를 무시하고 방심한 것도 있겠지만… 결국 방심한 것도 놈의 실력이지 않나. 놈을 죽인 내가 진정한 승리자였다.

주머니에서 다우징을 꺼냈다. 혹시 몰라 확인해봤다. 역시 다우징은 불꽃을 가리키고 있었다.

‘불꽃 안에 뭔가 있군.’

불꽃의 열기를 느끼며 그 안을 들여다봤다.

심장이 있었다.

불꽃 속에서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주황빛을 띠는 심장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이건….”

뭐지?

예상 밖의 물건에 살짝 당황했다. 일단 범상치 않은 보물인 건 확실한 것 같으니 챙기자.

‘적당히 엔벤토리에 넣어두고 정체는 천천히 알아보면 되겠지.’

마나로 손을 감싸고 불타는 심장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인벤토리에 넣으려면 우선 만져야했다.

화아아악!

불길이 거세게 일어나며 내 손을 밀어낸다. 통증을 느낀 나는 손을 빼냈다. 손이 빨갛다. 그새 화상을 입은 것이다. 심한 고통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피닉스의 심장이다. 자격 없는 자는 불탈 뿐이지.”

놈이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 놈을 쳐다봤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나눠진 놈이 태연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너 왜 안 죽냐?”

“내 능력이지.”

놈의 하반신이 벌떡 일어났다.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잠깐 시선이 팔린 사이였다. 놈의 상반신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더니 피닉스의 심장을 움켜쥔다. 바닥에 숨겨져 있던 오망성이 빛을 내며 드러난다.

“마무리가 어설펐다만… 이 정도로 달궈졌다면 문제없겠지.”

공간이 일그러진다.

이번에도 본능적으로 알았다. 공간 이동이다.

“내 보물!”

여기까지 와서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다짜고짜 뛰어들어 놈의 머리를 잡았다.

“억!”

놈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히는 동시에 공간 이동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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