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53 - 1953. 화끈하게
눈앞에서 적과 성유진이 사라지자 한하린은 당황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달리는 도중에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걸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그녀가 성유진이 있던 곳에는 음양술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이 멍청이가…!”
보물에 눈이 멀어서 이런 참사가 났음을 똑똑히 봤다. 한하린은 오랜만에 성유진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었다. 지금 눈앞에 있었다면 중력으로 머리를 후려쳤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다급히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손이 떨리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의 눈엔 오직 스마트폰만 들어왔다.
성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으나 받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음양술은커녕 마법도 모른다. 성유진이 어디로 갔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당장 떠오르는 건 헌터 협회에 신고하는 것. 그러나 헌터 협회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까? 상대는 백림. 일본에서 주로 활동하는 최악의 범죄자 조직이다.
‘일본으로 공간이동 했을 수도 있어. 한국 협회는 바로 개입하지 못해.’
일본 협회와 한국 협회의 사이는 빈말로도 좋지 않았다. 일본 헌터 협회가 선뜻 반길 리도 없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과 성유진은 헌터 협회가 통제하는 곳에 몰래 들어온 상황이 아닌가.
헌터 협회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한아영이었다.
‘언니라면….’
S급 헌터는 어딜가나 환영받는다. 일본이라고 해서 다를 거 없다.
‘언니한테 도움을 청하는 건 싫어.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 성유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성유진이 약하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한하린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아마 어지간한 A급 헌터도 성유진보다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성유진보다 강한 자는 많았다. 최악의 경우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
안개가 옅어지고 있었다. 헌터 협회가 곧 들이닥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지금 헌터 협회와 접촉하면 일이 더 복잡해지겠지.
그녀는 성유진에게 받은 공간 이동 주문서를 꺼냈다. 단지 찢기만 해도 공간 이동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말도 안 되는 물건.
‘그 다우징도 그렇고 이런 건 대체 어디서 얻는 거야?’
던전에서 얻었다?
그 변명도 한 두 번이지. 특이한 물건을 가져오면 항상 던전에서 얻었다?
‘누구는 던전에 안 들어가는 줄 아나?’
던전에서 특수한 물건을 발견할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당장 한하린만 해도 그런 발견을 했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마음에 안 들어.’
찌이익!
공간 이동 주문서를 찢었다.
눈을 깜빡인 것처럼 시야가 점멸했다고 느낀 순간 그녀는 성유진의 집에 들어와 있었다. 집주인이 없는 집을 슥 둘러본 한하린은 스마트폰을 들었다. 신호음이 2번 정도 가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다행히 바쁘지 않은 모양이다.
“언니, 나야.”
한하린은 이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새끼 사고 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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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또 어디야?”
정체 모를 곳으로 이동한 나는 눈살을 팍 찌푸렸다.
집안이었는데 몇백 년 전 일본의 전통 가옥 같은 곳이었다. 바닥에는 다다미, 중앙에는 화로가 있었다. 바람만 불어도 재가 풀풀 날릴 것 같았다.
“천둥벌거숭이. 너처럼 막무가내인 놈은 처음 봤다. 너처럼 무식한 인간이 나랑 같은 시대에 산다는 것 자체가 치욕적이다.”
하반신이 없는 놈이 나불거렸다.
“이 자식이…. 여긴 어디냐? 질문에나 대답해라.”
대가리를 썰어버리고 싶은 욕구를 겨우 참았다. 여기가 어디고 뭐 하는 곳인지 궁금했다. 백림의 본거지라면 대박이 아닌가?
‘헌터 협회에 알리면 실적 점수를 왕창 받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위험할 것 같으면 공간 이동 주문서로 튀면 된다. 홀로 남은 한하린이 살짝 걱정되긴 하는데, 공간 이동 주문서를 줬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내가 왜 답해야 하지?”
“대답 안 하면 이렇게 되니까.”
칼을 휘둘러 놈의 하나 남은 팔을 썰었다. 머리와 상반신만 놈은 입술을 짓씹었다. 놈이 손에 쥐고 있던 피닉스의 심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박동하는 심장에 집이 탈 줄 알았는데 멀쩡했다. 피닉스의 심장에 손을 뻗었으나 열기가 느껴져 바로 손을 뒤로 뺐다.
‘사람 차별 존나 심하게 하네.’
보물이고 나발이고 발로 밟아 터트릴까. 나는 피닉스의 심장을 한껏 노려보다가 놈의 복부에 칼을 푹푹 찌르며 화풀이했다.
“커억. 컥! 의미 없는 짓은 그만둬라!”
“진짜 안 죽네? 불사가 능력이라고? 그게 가능한가?”
문득 내 능력이 떠오른다. 유희 생활 어플.
“생각해보니 보잘것없는 능력이군.”
“내 능력이 보잘것없다고?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라! 이 세상에 내 능력을 탐내지 않는 자는 없다!”
놈이 버럭 소리쳤다.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나는 쯧쯧 혀를 차며 놈의 배때지를 갈랐다.
“크으으윽!”
“네놈의 창자로 목 졸라 죽여버리는 수가 있다. 그래도 안 죽으면 대갈통을 깨주마. 빨리 여기가 어딘지 말해.”
“죽여라.”
놈이 망설임 없이 말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놈들은 협박하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보통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그걸 손에 쥐고 협박하면 된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피닉스 심장에 향했다. 피닉스 심장에 칼을 겨눈다. 반응은 곧장 왔다. 놈이 두 눈을 부릅뜬 것이다.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라. 그건 평범한 피닉스의 심장이 아니다. 요괴의 영육으로 강화하고 영약으로 보강했으며 화기를 끌어모은 에너지 자원이다. 일종의 원전과도 같은 물건이다. 그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멍청한 네놈이라도 모르지 않을 터다.”
“그래봤자 내가 가질 수 없잖아. 가지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부숴버린다. 그게 내 신조다.”
“꼭 네놈 같은 신조로군. 할 수 있으면 해봐라. 피닉스의 심장은 핵폭탄처럼 터질 거다. 네놈의 몸은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반면에 나는 죽지 않는다. 너는 개죽음만 당할 뿐이다.”
나는 킬킬 웃었다.
“새끼. 쫄려서 그런지 혀가 길어졌네?”
이게 정답이었다.
칼을 치켜들었다. 마나가 움직인다. 곧 칼날에 파란 검기가 맺혔다. 놈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내리쳐지면 터지겠지? 핵폭탄이면 고통 없이 죽겠군.’
고통이 있어도 상관없었다. 없으니 더 좋았고. 칼을 내려치려는 순간이었다.
“멈춰!”
목소리를 듣고 반응하기에는 내 칼이 너무 빨랐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5]
찰나를 이용해 억지로 칼날을 옆으로 비틀었다. 칼날은 피닉스의 심장 옆 바닥에 떨어졌다. 피닉스의 심장은 변함없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새끼 쫄아서 낚이기는. 원래 멈추려고 했어.”
“…이 미친놈이. 정말로 피닉스의 심장을 베려고 해? 살다 살다 마스터보다 미친놈은 처음 보는군.”
“이제 내 질문에 답할 이유가 생겼나?”
놈은 나와 피닉스의 심장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곳은 내 거처다. 후지산 깊은 곳에 있다. 결계를 쳐놓았기에 밖에선 볼 수도, 들어올 수도 없다. 설령 결계가 없더라도 너무 깊어서 일반인은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지.”
나는 창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다. 확실히 산속 풍경이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마을 광경이 보인다. 일본 전통 민가 형태의 집들이 있었다.
“혼자 사는 게 아니었나?”
“지금은 나 혼자다.”
“지금은?”
“백림의 비밀 거처 중 하나가 이곳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후지산의 정기를 받아 수련하기 딱 좋은 곳이었으니까. 10년 전부터 후지산의 정기가 사그라지면서 모두가 떠났다. 이곳에서 남아 생활하는 건 나뿐이다.”
확실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수상쩍은 기척이 느껴졌다. 칼을 들어 다른 집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벽이 베이고 드러난 것은 기계를 조작하고 있는 드론이었다.
“뭐냐 저건….”
“내 식신이다.”
놈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목소리에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음양사가 부리는 식신은 종이 쪼가리가 아니었나?”
“하, 네놈도 편견에 잡혀 있군. 식신술이라해서 부적과 요괴만 부려야 하나? 세계는 문명화되어 과학 기술은 점점 발전하고 있다. 옛 전통에 얽매이기만 해서는 발전할 수 없다. 음양술이라고 다를까.”
“백림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정말로 여긴 너 혼자뿐이냐?”
“네가 생각하는 백림은 뭐지? 일개 블랙 길드로 보이나?”
“국가 전복을 노리는 범죄 조직이잖아.”
“…아니다. 백림은 일본의 변화를 위해 의사(義士)들이 모인 조직이다. 빌어먹을 정치인들이 제 권력을 위해 우리를 배척하고 범죄 조직으로 몰뿐이다.”
“그게 테러리스트잖아.”
내가 말했으나, 놈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비탄스럽게도 일본은 수십 년 전에 멈췄다. 열도의 기운은 떨어졌고, 사람들은 발전보다 안전을 택했다. 일본에 망조가 들었다. 우리는 그런 일본을 바꾸기 위해 모였다. 서로 도움을 주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일본의 망조를 걷어내려 하고 있다.”
“평소에는 개인플레이를 한다는 거군. 그걸 왜 그렇게 어렵게 말하는 거냐.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지? 피닉스의 심장은 어디에 쓰려고?”
“그걸 내가 왜 네놈에게 말해야지?”
칼끝은 피닉스의 심장을 겨눴다.
“……피닉스의 심장은 조건만 맞으면 대규모 원전에 맞먹는 영구동력이 될 수 있다. 나는 이것으로 일본의 이상적이고 불멸의 지도자, 천신을 만들 것이다.”
놈이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이잉.
드론이 기계를 조작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드론은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마침 완성품이 기계에서 튀어나왔다. 그건 기계 부품 같은 걸로 보였다.
기계, 영구동력, 불멸.
키워드를 조립해보니 하나의 결론이 나왔다.
“설마 그 지도자가 로봇이냐?”
놈이 씩 웃는다.
“그렇다. 사적인 감정은 일제 없이 사람을 재판하고, 오직 이 나라를 위한 정책을 실행할 지도자. 인간의 추잡한 욕망을 일절 가지지 않는 완벽한 지도자. 기계천황은 일본에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고, 일본의 새로운 동력이 되어 나날이 발전한 것이다!”
“기계천황이 일본을 지배한다니…. 정말 멋진 계획이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군. 대단하다 못해 두려울 지경이야. 그런데 그 기계천황은 어딨냐? 내가 직접 피닉스의 심장을 넣어서 네 계획에 일조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