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55 - 1955. 화끈하게
봉인 당했다.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숨도 쉴 수 없다.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마나도 사용할 수 없다. 정신을 제외하고 시간이 멈춘 느낌이라고 할까.
‘그놈은 내 의식까지 봉인했다고 착각하고 있다.’
마치 내 육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봉인술이다. 놈이 자신감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놈의 봉인술은 내 정신을 봉인하지 못했다. 지금 내 정신은 육체와 달리 아주 또렷했다.
‘이것도 절대정신 덕분이겠지.’
정신은 멀쩡한데 움직일 수 없고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들을 수 있다는 건 다행이라고 할까.
‘완전히 격리되는 봉인은 아닌가.’
놈은 내가 두려워서 봉인한 게 아니다. 날 기계천황의 생체 배터리 혹은 발전기로서 이용하려고 봉인한 것이다. 그게 날 완전히 격리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혹은 다른 이유가 있거나.
‘앞이 보이지 않는 건 내가 어두운 곳에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수정 자체가 빛이 투과되지 않는다거나.’
나는 뇌전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마나가 움직이지 않아서만이 아니다. 마나가 없어도 체력을 소모하니까.
‘마나와 체력. 둘 다 사용할 수 없으니 뇌전을 사용할 수 없군.’
[천안(天眼)을 개안합니다.]
천안을 성공적으로 발동했다. 천안은 마나와 정신력을 소모한다. 즉, 지금 천안은 정신력으로 발동되고 있었다. 천안의 효과로 수정을 투시하고 바깥을 볼 수 있게 됐다. 기계 공방이라 볼 것도 없었다.
‘선명하지도 않고 멀리는 못 보겠군. 정신력만으로 천안을 사용하는 건 한계가 있어.’
솔직히 지금 당장에라도 벗어날 수 있었다.
천심과 완전 회복.
둘 다 마나와 체력, 정신력 같은 걸 소모할 필요도 없이 즉발가능한 스킬이니까. 봉인도 상태 이상으로 칠 테니 바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유희 생활 어플은 사용할 수 있나? 저번에 스마트폰 없이도 유희를 종료할 수 있었으니….’
유희 생활 어플은 내 스마트폰의 능력이 아니었다. 온갖 창작물 속으로 들어가 즐길 수 있게 해주는데 고작 스마트폰에 그 힘이 한정되겠는가.
나는 유희 생활 어플을 떠올리며 집중했다.
단번에 성공할 수 없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근데 막상 포기하면 할 게 없었다. 결국 집중에 집중을 거듭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눈앞에 내 능력치가 나타났다.
[성유진
레벨: 91
근력: 130 체력: 130 민첩: 130 지능: 120 정력: 130 마나: 130]
‘되네.’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근데 엄청 불편하군. 집중력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할까. 스마트폰이 몇천 배는 더 편해.’
지금 이 상태에서도 유희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섹스 마렵군. 백환 세계에 잠시 갔다 와야겠어.’
[유희를 시작합니다.]
[유희를 종료합니다.]
메이드과 질펀한 섹스를 하고 온 나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여전히 봉인된 상태라 움직일 수 없었다.
‘심심하군.’
할 게 없었다. 잠이나 자던가. 아니면 유희 세계로 들어가던가.
유희 세계와 달리 현실은 자동진행이 불가능했다. 그냥 지금 천심을 사용할까? 충동이 왔으나 꾹 참았다.
‘그놈한테 한방 먹여야지.’
단순히 놈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이 불사신이라고 하는 놈이라 죽이는 게 힘들었다. 놈을 영원히 죽여버릴 수단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놈들은 자기 목숨보다 자기 계획이 더 중요하게 여기지.’
놈의 계획을 망친다. 그것도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초를 친다.
‘아마 최소 10년 이상은 계획한 일이겠지.’
최신 기술로 10m가 넘는 거대 로봇을 만든다? 아무리 그 기술을 음양술로 대체했다고 해도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갔을 게 분명했다.
‘그 계획이 눈앞에서 물거품이 된다면… 크크. 놈의 꼴도 볼만하겠군.’
사흘 내로 마무리를 한다고 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놈의 계획을 망칠 그날이 아주 기대됐다.
‘놈의 계획을 어떻게 망칠지 계획을 짜볼까.’
• • •
일본은 떠들썩했다.
어느 한 인물의 일본 방문 때문이었다.
한아영.
최근에 새로이 S급에 오른 헌터.
한아영의 인기는 전 세계적으로 뛰어났고, 일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는데, 그중 가장 큰 이유는 한아영의 외모다. 한아영은 연예인 이상으로 아름다웠으며 신비로웠다. 게다가 몸매도 어마어마하게 좋았다. 성격도 모난 곳이 없다. S급으로서 의무감이 있는지 전 세계를 돌며 위험한 던전과 몬스터를 처리하고 있으니까.
귀찮다는 이유로, 혹은 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두문불출하는 다른 S급 헌터와는 달랐다. 실제로는 헌터 협회와 맺은 계약 탓도 있었지만, 일반인들은 시시한 진실 따위엔 관심 없었다.
중요한 건 얼음의 여왕이 일본에 방문했다는 그 사실 자체였다.
공중파 뉴스에서마저 이 소식을 다루는 것은 물론이고 기자들도 이 소식을 쏟아냈다. 한아영의 과거를 다루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국의 S급 헌터, 한아영이 계획에도 없던 방일을 결정한 이유는?」
「한아영이 5성급 호텔에서 먹은 저녁 식사는 스시!」
「한아영은 과거에도 일본에 방문한 적이 있다!」
「한아영이 일본에 귀화할 가능성은? 전문가의 발언으로는 상당히 긍정적!」
「일본 A급 헌터 카와시와 웃으며 담소를 나눈 한아영! 유명 헌터들의 친밀한 관계?!」
언론을 설레발을 떨었다. 한아영과 관련된 기사를 우후죽순 쏟아낸다. 그 열기는 헐리웃 배우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보다 훨씬 뜨거웠다. 그리고 대부분이 호의가 담긴 기사들이었다. 조금이라도 한아영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한아영이 머무는 호텔에 몰려들었다. 실물을 한 번이라도 보고 사인을 받고 사진을 찍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의도를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어떻게든 한아영과 엮이기만 해도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오늘 있는 한아영의 기자회견!」
「그녀는 일본인들을 위해 후지산을 정리하러 왔다!」
「한국의 S급 헌터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스시!」
「일본이 좋아 일본어를 배운 그녀!」
“허허.”
일본 카가야 그룹의 후계자이자, C급 헌터인 카가야 미즈치는 인터넷에 쏟아지는 기사들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깨어난 시민인 그가 보기에 이 기사들은 죄다 과장이 들어가거나 왜곡되었다. 심하게 왜곡된 건 아니다. 그저 기자가 좋을 대로 해석한다고 할까.
‘스시를 좋아해? 외국인이 일본에 오면 가장 먼저 먹는 음식 대부분이 스시 아닌가.’
스시를 좋아한다. 그런 발언 정도는 누구나가 할 수 있었다. 단순한 립서비스 차원에서.
일본이 좋아 일본어를 배웠다? 일본어로 몇 마디 인사를 했을 뿐이다. 간단히 30초면 배울 수 있는 문장들.
‘카와시와 담소를 나눠? 사진을 보니 딱 봐도 한아영의 미소가 썩어있잖아. 보나 마나 억지로 말을 걸고 헛소리를 지껄였겠지. 일본 협회가 밀어줬나? 이슈가 있으면 좋을 테니.’
과장된 기사들 사이에서 진짜는 있었다.
후지산을 정리하는 것.
한아영은 일본의 안전을 위해 후지산의 위험한 몬스터를 정리하러 왔다고 천명했다.
‘굳이?’
지금 후지산은 위험한 몬스터가 많긴 하나 급하지는 않았다. 후지산에 자리 잡은 몬스터들은 자기 영역에서만 움직이니까.
‘물론 후지산을 정리해주면 좋긴 한데…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군.’
후지산 근처에 있는 던전을 공략하겠다는 것도 아니니 그 목적이 뭔지 모르겠다.
‘어쨌든 한아영은 지금의 대세다. 일본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이미지가 굉장히 좋다. 특히 미국 쪽에서도 인기가 좋다지.’
얼굴은 몰라도 몸매는 탈 아시아급인 건 확실하니까.
듣기로는 미국 헌터 협회가 어마어마한 러브콜을 한아영에게 보냈다고 한다. 한아영은 그걸 단칼에 거절했고.
‘우리 그룹의 모델이 되어준다면 좋겠군. 매출이 확 늘어날 테니까.
카가야 미즈치는 화면 속에 찍힌 한아영의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다시 봐도 아름다웠다. 웃는 모습이 남자의 마음을 뒤흔든다. 자신마저 이럴진대 다른 평범한 남성들은 더 심하리라.
’…단순히 모델 계약이라면 받아들일지도 모르지.‘
카가야 그룹은 일본 최고의 재벌 중 하나였다. 세계 최고의 대우를 해줄 수 있었다.
’직접 만나서 비즈니스적인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로 감정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재벌과 S급 헌터. 썩 잘 어울리는 관계가 아닌가. 사업적인 마인드로 가득하고 보수적인 아버지도 상대가 한아영이면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사람을 시켜 의중을 물어보는… 아니. 내가 직접 연락처를 알아내 연락하는 편이 더 낫겠지. 일본 최고의 스시 장인을 부르고 대화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한아영과 사귀게 되는 것까지 상상하던 그는 돌연 엄청난 두통을 느꼈다.
“끄으으으으윽?!”
생전 처음으로 겪는 격통! 어떤 미친놈이 뇌의 주름 하나, 하나를 칼로 찌르고 망치로 내려치며 다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고통에 헐떡이기를 10분. 그가 자신은 혹시 불치병에 걸린 게 아닌가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을 때였다.
「한아영에게 모델 제의를 한다. 하지 않는다.」
양자택일.
카가야 미즈치의 능력이 돌연 발현되었다.
’…설마. 이 두통도 능력의 영향이었나?‘
카가야 미즈치는 마른침을 삼켰다. 갑자기 이 시점에서 격통까지 일어나며 선택지가 뜬 이유가 뭔가?
’…하지 않는다.‘
「하지 않는다.」
정답이라는 듯 양자택일 답을 말해주고 사라졌다.
“그래도 한아영이라면 내 미래의 아내로서… 끄아아아악!”
「하지 않는다.」
“끄아아아아아악!”
「하지 않는다.」
“이젠 양자택일이고 뭐고 아니잖아! 끄아아아아아악!”
그는 30분 동안 고통받은 뒤에 한아영을 깔끔히 포기했다. 자신의 능력인 양자택일은 오직 자신의 미래를 위한 정답을 말해준다. 양자택일이 이렇게 까지 나오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한아영과 엮이면 오직 파멸밖에 없다는 건가….‘
그가 착잡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새로운 선택지가 떴다. 오늘따라 어쩐지 능력이 이상했다. 직접 발동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뜨다니.
「한아영을 돕는다. 돕지 않는다.」
’…돕지 않는다. 괜히 엮였다간 큰일 나겠지. 무시하는 게 제일이다.‘
「돕는다.」
정답을 잘못 아이에게 벌을 주듯 격통이 밀려왔다.
“끄아아아아악! 제기랄! 내 능력이면 능력답게 굴라고! 끄아아아악!”
오늘처럼 자신의 능력을 버리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