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작물 속으로-1994화 (1,773/2,000)

< 1994화 > 1994. 신의 아틀란티스

지하 세계에는 다섯 개의 강이 있었다. 이 다섯 개의 강 중 하나는 그 유명한 스틱스강이 있었다.

눈앞에 있는 강을 쳐다봤다.

너무 커서 강이 아니라 바다처럼도 보였다.

'이게 스틱스강이군.'

딱히 부정적인 힘을 가진 강처럼 보이진 않았다. 신들이 스틱스강에 틈만 나면 맹세를 하니 무시무시한 강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의외로 스틱스강 자체는 멀쩡한 편이었다.

'신기한 강인 건 맞지. 눈앞에 있는 지금도 신비한 힘이 느껴지는군.'

생각만큼 불길한 힘은 아니었다.

'뒤집어엎어 볼까.'

츠즈즈즈즈즈즛.

힘을 일으킨다.

내 몸에서 흘러나온 번개가 지하 세계의 공기를 타고 흩어진다. 어두운 지하 세계가 한순간에 밝아졌다.

손아귀에 번개를 모아 창의 형태로 만든다. 어느 정도 힘이 모였다 싶어 스틱스강을 향해 내던졌다. 번개는 스틱스강 전체를 뒤흔들었다. 강의 표면이 파도처럼 거세게 흔들렸고 그 물줄기가 천장까지 치솟았다.

"……."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그냥 강이었다. 벼락을 몇 번이나 떨궈도 별다른 의미는 없을 것이다. 저승에 있는 강이라 그런지 안에 생명체가 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좀 더 힘을 써서 휘저어 볼까.'

신력을 사용하려는 순간이었다. 스틱스강이 갈라지더니 한 여신이 나타났다.

“그만! 그만두세요! 계속 그러시면 스틱스강과 다른 강들이 섞여 버릴지도 몰라요! 그건 곧 또 다른 혼란이 되어버리죠. 당신도 그걸 원하시진 않잖아요!”

기억에 있는 여신이었다.

스틱스.

이 강의 주인이었다.

“스틱스. 오랜만에 보는군. 그 전쟁 이후 처음인가?”

“네. 오랜만이에요. 제우스 님. 그만 멈춰주세요. 지하 세계에는 이미 당신의 분노가 새겨졌어요. 수천, 수만 년이 지나더라도 그 상처는 사라지지 않을 테죠.”

"흐음.”

“…당신이 다섯 개의 강을 모두 뒤섞어 버린다면… 저승의 질서는 어그러지고 새롭게 써야 할 거예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혼란이 생기겠죠. 그걸 바라시는 건 아니잖아요?"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는 좀 그렇군. 내 분노를 달래고 싶다면… 내 분노를 달래라.”

나는 노골적인 눈으로 스틱스를 쳐다봤다. 스틱스는 이미 자식까지 딸린 유부녀였다. 비록 그 남편은 타르타로스에 처박혀 있는 상태지만.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스틱스는 치를 떨면서도 도망가지 않았다. 지하 세계를 위해 희생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나는 히죽 웃었다.

스틱스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에 하늘을 날아 지하 세계 곳곳을 돌아봤다. 관광지로서 지하 세계는 영 아니었다. 볼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5개의 강은 흥미롭긴 해도 시간이 지나니 그러려니 했다.

‘평소보다 날아다니기 힘들군. 지하 세계라 그런가.'

특이한 걸 발견했다. 스틱스강 구석에 떠 있는 섬. 양귀비가 가득 피어 있는 그 섬의 중심에는 한 노인이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공중에서 그 섬을 내려다봤다. 백발의 노인은 처음 보는 신이었다. 물론 내가 제우스라고 해서 모든 신을 알고 있는건 아니다.

'이런 곳에 신이 있으니 호기심이 생기는군.’

잠들어 있는 늙은 신은 내 인기척을 느낀 듯 천천히 왼쪽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꺼풀은 절반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신들의 왕인가…. 그래. 새로운 신왕이 나타났다고 들었지. 이름이 제우스였던가…?”

“내가 제우스다. 이런 곳에 있으니 지상의 소식에 어둡지. 내가 신들의 왕이 되고 몇 년이 지난… 후, 됐다.”

눈앞에 있는 신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다는 뜻이었다. 놈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래도 정체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조심해라.”

“밑도 끝도 없이 말이냐? 아, 너도 예언자 쪽 신이냐?”

“꿈은 많은 것을 알려주지….”

노인의 반쯤 뜬 눈에서 피가 흐른다. 이유 모를 사태에 살짝 놀랐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시련은 이미 뒤틀렸다. 별들은 준비를 끝냈으며, 혼돈은 기어 오고 있다…. 멸망은 이미 준비되었으니… 너는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거다.”

“마지막? 기간토마키아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기간토마키아 따위가 아니다.”

“너는 이 세계가 시련이란 것도 알고 있는 모양이군.”

“이 모든 것 또한 과정이다."

“너는 누구지?”

파아아아아아앗!

그가 피를 토했다. 그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제멋대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핏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이 지경이 됐는데도 그는 잠에서 깰 생각이 없어 보였다.

“히프…… 노스….”

잠의 신 히프노스.

예상하고 있던 이름인지라 놀랍지는 않았다.

쿨럭.

히프노스가 피를 토했다. 발광하던 그의 눈동자가 다른 것을 비추기 시작했다.

통로.

어두운 통로가 눈동자와 이어져 있었다. 통로의 끝에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8개의 다리를 활발하게 움직이며 다가오는 그것은 거미였다. 인간의 머리를 한 거미.

‘인면지주? 아니, 그딴 격 낮은 존재가 아니다.’

히프노스의 눈동자에서 거미 다리가 툭 튀어나온다. 그 다리의 길이만 무려 10m가 넘었다.

‘눈동자를 통해 나오기에는 다리가 너무 긴데.'

자세히는 몰라도 공간 자체가 비집어진 것 같았다. 히프노스의 꿈이 뭔가 잘못됐다고 보는 게 맞겠지.

“제우스여, 죽, 여라….”

히프노스가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와중에도 거미 다리 4개가 더 튀어나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거미의 얼굴과 몸통이 튀어나온다. 거미 몸통은 둘째치고 얼굴은 절규하는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본능적인 혐오감을 느꼈다.

"역겹군."

파지지지지지지지지직!

아스트라페를 거미놈에게 던졌다. 거미가 다리를 휘둘러 아스트라페를 쳐낸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히프노스가 비명을 지른다. 눈동자 속에서 튀어나온 거미 다리가 히프노스의 가슴을 꿰뚫은 것이다. 그럼에도 히프노스는 잠자고 있었다.

나는 거미에게 다가갔다. 10m가 넘는 거미 다리를 양손으로 잡아 분질렀다. 남은 거미 다리가 주춤거렸으나 이내 내게 쇄도한다. 나는 그 다리들마저 붙잡아서 문질렀다.

분질러진 다리는 빠른 속도로 재생한다.

'완전히 재생하기 전에 결착을 내야겠어.'

파지지지지직.

만뢰(卍雷).

손아귀에 응축된 뇌전이 회전하며 그 위력이 키웠다.

나는 거미의 인간 대가리에 만뢰를 처박았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거미는 괴성과 함께 몸을 뒤틀었다. 다시 히프노스의 눈동자 속으로, 꿈속으로 도망가려고 한다. 나는 한 손으로 거미의 몸통을 붙잡고 다른 한 손에 번개를 모아 휘둘렀다.

‘아스트라페.’

한 번으로 부족했다.

번개를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13번 정 머리통에 아스트라페를 박아 넣었을까. 거미의 몸이 축 늘어지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드디어 뒤졌네.

역겨운 벌레를 죽였다. 그 사실에 뿌듯함을 느꼈다.

"끄으으....”

히프노스가 신음을 내뱉었다.

“배신자가…. 배신자가 있다…!”

“배신자? 그게 누군데?”

"……."

히프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뒤진 것이다.

“배신자가 누군지 말해주고 뒤져야지! 아니, 그 전에 진짜 뒤졌다고?”

당황했다. 그리스의 신은 기본적으로 불멸자다. 죽어선 안 되는 존재. 그런 존재가 불멸이란 말이 우습게 죽어버린 것이다.

완전한 불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진짜 죽었나?'

몇 분 기다려봤는데도 히프노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뇌전으로 히프노스와 거미의 시체를 태웠다. 여전히 히프노스는 재생하지 않았다.

'심상치 않아. 너무 심상치 않아."

하데스의 페르세포네 납치 사건으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지상과 지하 세계는 다시 안정되었다.

모든 일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죽음에 의한 혼란은 없었다.

허나 나는 올림푸스를 떠도는 불온한 기색을 느꼈다.

여신들은 평소와 같았다.

문제가 되는 건 남신들.

포세이돈, 아레스, 아폴론을 셋을 중심으로 불온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다른 자들은 모두 기분 탓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 폭군 경험을 몇 번이나 해보면서 나름의 감이 발전했다.

‘이 새끼들. 반란을 꿈꾸는군.'

척하면 척이다.

내가 크로노스에게서 왕의 자리를 찬탈한 것처럼 나를 끌어내리고 싶어 한다.

‘아마 높은 확률로 하데스도 엮여 있을 거다.'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남신들 전체를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있었다.

‘근데 증거가 없어. 아직 반란을 저지르지도 않았지. 아무리 나라도 일어나지 않은 반란을 이유로 남신들을 타르타로스에 처박을 수 없어.'

예언을 이유 삼는 것도 불가능했다.

운명의 세 여신인 모이라이가 포기할 정도로 운명은 꼬이고 꼬였다. 이 상황에서 예언은 아무 의미 없다.

‘놈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신들은 내 편이라는 점이군.’

여신들에게 잘해와서 그런지 딱히 불만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남신들 중에서 모두 저들과 손잡은 건 아닌 듯했다. 대표적으로 헤파이스토스와 헤르메스가 그랬다. 그들은 권력 같은 것에 크게 흥미 없었다.

‘준비를 해야 겠다.'

반란 정도야 내 힘으로 얼마든지 진압할 수 있었다. 우려스러운 건 반란 이후에 올 무언가다.

‘힘이 더 필요하다. 그러려면 내가 더 좀 더 인간들의 숭배를 받아야 한다.'

인간들을 겁주고 죽이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방법을 떠올렸다.

"헤파이스토스!!”

“네. 아버지. 또 여신께 선물할 장신구가 필요하십니까?"

“인간은 불을 손에 넣음으로써 크게 발전했다. 허나, 그 이상으로 발전하기에는 너무 느리다. 이에 인간들에게 번개를 내리고자 한다.”

“…아버지. 인간들은 감히 번개를 다룰 수 없습니다.”

“알고 있다. 허나 네 도움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헤파이스토스. 발전기를 만들어라. 그리고 전기를 사용하는 기계와 무기들을 만들어라."

"지금 인간들에겐 너무 이르지 않겠습니까. 인간들이 주제도 모르고 신들의 위에 서려고 할까 우려됩니다.”

“주제도 모르는 것들에겐 천벌이 내려질 것이다.”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