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6화 > 1996. 신의 아틀란티스
"무슨 일이냐?"
나는 차분히 물었다. 최근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내 위엄이 세상에 퍼지니 인간들이 알아서 미녀를 공양한다. 기분이 좋아서 웬만한 무례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전쟁이! 전쟁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문명이 발전해도 인간들 사이에서 전쟁은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현대에도 전쟁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그러려니 했다. 우주 시대로 나아가면 우주에서도 전쟁을 벌일 것이 인간이었으니까.
“손가락 하나로 인간을 죽이고, 전차 대신 전투기를 타고 하늘에서 싸웁니다! 폭탄 하나에 마을 하나가 날아가다니…! 이런 건 전쟁이 아닙니다!”
“서로의 이득을 위해 죽이고 죽인다. 그게 전쟁이 아니면 뭐냐?”
“아닙니다! 전쟁은! 검을 휘두르고! 부딪히며! 핏속에서 영웅을 탄생시켜야 합니다! 이 전쟁에는 영웅이 없습니다!”
"영웅은 있다. 네가 알지 못하는 것뿐이지. 그리고 네가 바라는 전쟁은 너무 야만적이지 않나?”
칼 들고 설치는 것보다 총 들고 설치는 게 더 낫지 않나.
물론 신이나 초인들의 입장에선 칼 들고 설치는 게 더 낫다. 총은 그 한계가 너무 명확하니까.
“이런 건 전쟁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너무 교만해졌습니다! 감히 땅과 바다, 하늘을 제 것인 것처럼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전기를 거두소서! 그들에게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닫게 해주십시오!"
“불가하다. 전기를 거둔다고 해서 이미 발전할 대로 발전한 인간들이다. 인간들은 다른 방법을 찾겠지.”
“대홍수를 일으키지요! 인간들을 쓸어버리고 다시 만들면 됩니다! 과거에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이번이 두 번째이니 뭐가 어렵겠습니까!”
“그건 가이아의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의 가이아는 거절할 것이다. 수만, 수십만의 인간을 만드는 건 가이아에게서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크으으으으…."
아레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레스가 이토록 격정적으로 나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 인간들은 아레스를 그리 숭배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레스는 승패와 관련 없는 전쟁 그 자체의 신이었다. 승리를 보장해주지 않는 전쟁의 신을 어떤 인간이 원할까.
“정 그렇게 인간들을 쓸어버리고 싶으면 올림푸스의 12신들을 절반 이상 설득한 뒤에 찾아와라.”
“..…알겠습니다.”
아레스는 반항기 가득한 눈빛을 선보인 뒤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음에 안 드는데. 타르타로스에 처박아 버릴까? 헤라가 뭐라고 하려나?'
아레스가 12신들을 절반 이상 설득할 가능성은 적었다.
인간은 문명이 발달했으나, 그 원초적인 탐욕은 변하지 않았다. 권력을 추구하고, 가족과 사랑에 기대고, 죽음을 두려워했다.
아무리 문명이 발전했다 하더라도 인간은 인간이었다.
그날은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올림푸스의 여신들은 다 따먹었으니… 지상에 있는 인간들을 살펴봐야겠군.'
어디 내 아이를 임신할 여자가 없을까.
지상을 천천히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제우스 님! 제우스 님! 큰일입니다!!”
셔틀의 신 헤르메스가 날아왔다. 마법과 신발의 효과로 하늘을 날아서 지지치도 않는 놈이 지쳐서 헐떡이고 있었다.
헤르메스는 내 셔틀로서 구르고 구른 놈이라 어지간한 일에는 당황하지 않는다. 내가 남편 있는 여신과 불륜을 저질러도 초탈한 표정만 짓던 헤르메스였다.
'흠. 일어날 일이 일어난 건가.'
나는 냉정했다. 아마 내 예상대로의 일일 것이다. 조금 많이 늦은 편이긴 해도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날 일이다.
“포세이돈, 하데스, 아레스가 반역이라도 일으켰냐?”
헤르메스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혹시 누군가가 예언이라도 했습니까? 운명이 떨어진 이후로 예언은 쓸모가 없어졌는데….”
“예언이 아니라 냉철한 추론의 결과지.”
포세이돈과 하데스, 아레스는 내게 불만이 가득했다. 당한 것이 많으니까. 특히 포세이돈은 내게 암살을 시도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포세이돈이 눈독 들인 여자부터 시작해서 아내, 딸 등 관련된 여자는 모두 내가 따먹었으니까.
“하데스는 죽음의 군대를 조직해서 침략을 시도 중입니다. 아르테미스와 데메테르, 페르세포네가 견제하고 있습니다.”
“세 여신이 고생이 많군. 근데 그 정도로는 죽음의 군대를 막을 수 있나? 하데스만 있는 건 아닐 텐데.”
“인간들이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인간들을 발전시킨 게 아닌지요?”
아니었다. 신앙이나 쪽쪽 빨아먹을 생각으로 문명을 발전시킨 것뿐이다.
“다 계획대로군.”
“아레스는 야만인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야만인? 이 세계에 야만인이 남아 있었나?"
“다른 세계의 인간들입니다."
진짜 다른 세계 인간을 말하는 게 아니다. 헤르메스가 말하는 다른 세계란 다른 신화의 장소. 다른 신들이 통치하는 곳을 말한다.
"어느 쪽이지?"
“북쪽입니다. 토르라는 천둥의 신이 감히 제우스 님을 죽이고 그 번개를 빼앗겠다고 선언했답니다."
“아주 건방지군. 급한 일인가?”
“아무리 대단한 신이라도 함부로 우리 세계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쳐들어가기도 힘들지만요. 야만인은 야만인일 뿐. 높은 문명을 이룩한 우리 인간들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아레스는 멍청한 놈이니 별문제 없겠군. 직접 나서지만 않는다면….”
“직접 나서지는 않고 있습니다. 야만인들의 전쟁을 원했는지 뒤에서 지켜보며 좋아하더군요. 설령 나선다고 하더라도 헤파이스토스가 주시하고 있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헤파이스토스와 아레스는 형제였으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서로 죽이면 죽여댔지 봐주는 건 없을 거다.
“아폴론도 포세이돈에게 붙은 것 같습니다. 태양이 조금씩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어서… 계속 내버려 둔다면 조만간 모든 인간이 불타 죽거나, 작물들이 시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폴론이 반역에 가담했다고?”
깜짝 놀랐다. 아폴론의 반역은 정말 예상하지도 못했다. 아폴론은 겉으로 볼 땐 날 아주 잘 따랐으니까.
“아르테미스랑 다프네 일 때문이 아닐까요?"
"…그럴 수 있겠군."
아르테미스는 이상할 정도로 내게 순종적이었다. 제 여동생을 귀히 여기는 아폴론에겐 그게 못마땅할 수도 있었다.
다프네의 경우 에로스의 화살로 인해 아폴론이 다프네를 좋아하게 된 님프다. 다프네를 스토킹까지 할 정도로. 나는 아폴론의 눈앞에서 다프네와 뒹굴었다. 솔직히 말해 그 님프가 다프네였는지도 몰랐다. 그냥 예쁜 님프가 있기에 따먹었는데, 그게 다프네였을 뿐이다.
‘물론 알고 있었어도 따먹었을 테지만.'
그때 분노한 아폴론이 내게 대들었고, 나는 힘으로 아폴론을 찍어 눌렀다. 타르타로스에 몇 년 가둬 놓으니 얌전해졌다.
‘그때 일은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나는 헤르메스를 쳐다봤다. 아직 가장 중요한 놈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포세이돈은 심해 속 괴물과 손을 잡았습니다!”
"....…뭐?"
“그 심해 속에 웅크리고 있는 괴물인지 신인지 모를 그거 말입니다. 포세이돈이 그거랑 손을 잡고 바다 괴물들과 육지를 침략하고 있습니다! 그거의 권속들은 자기들을 딥 원이라 하더군요.”
“……전세는 어떻지?"
“인간들의 함선은 전부 침몰당했습니다. 아무리 강철로 만든 배라도 포세이돈의 영역인 바다에서는 힘을 쓰긴 힘드니 말이죠. 해로는 막힌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래도 하늘길이 있으니 큰 혼란은 아닙니다. 육지로 올라오는 괴물들은 인간들이 잘 대처하고 있습니다. 총과 폭탄은 괴물들에게도 효과적이니까요.”
“우리 쪽이 유리하다는 거군."
“방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들을 회유하려 합니다. 인간들의 신앙으로 힘을 쌓는 목적인 거죠."
“뻔한 일이다. 인간들의 신앙은 흔들리고 있나?”
헤르메스가 피식 웃었다.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맞다.
나를 향한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인간들은 죽음의 군대와 바다의 군세보다 나를 더 두려워했다. 정확하게는 문명이 사라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헤르메스가 물었다.
문득, 히프노스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배신자가 있다.
반역자들을 두고 한 말일까? 아니면 다른 신을 두고 한 말일까. 배신이라고 할 때 가장 의심스럽고 치명적인 건 헤르메스였다. 셔틀 신이라 이런저런 귀찮은 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헤르메스가 수작을 부리면 적잖게 귀찮아진다.
“넌 왜 반역에 가담하지 않았지?"
“자고로 내기는 이기는 쪽에 걸어야죠."
맞는 말이라 반박할 거리도 없었다.
나는 옥좌에서 일어났다.
“벌써 직접 나서시는 겁니까?”
“사태는 심각하다. 너도 알 텐데.”
“그래도 바로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어디부터 가십니까?"
“쉬운 쪽으로 가야지."
“아하. 아레스군요.”
“덤으로 북쪽에 경고도 하고.”
“…음. 북쪽은 너무 자극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마라.”
날 보는 헤르메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한 대 칠까 하다가 관뒀다. 헤르메스까지 반역에 가담하면 일이 더 귀찮아진다.
-일이 꼬였군. 그렇지? 흐흐흐.
제우스의 귓가에 이질적인 음색이 들렸다. 제우스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성유진의 시련을 지켜봤다.
-신들의 왕이여, 배신자로서 어떤 기분이지? 다른 신들은 널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 같던데…. 그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나올까?
제우스는 미간을 팍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시끄럽다, 기어 오는 혼돈. 그딴 말을 지껄일 시간에 도움이 되는 정보나 말해라. 배신자는 누구지? 하데스인가?"
-나도 몰라. 확실한 건 너와 달리 저 인간을 방해할 속셈이 확실하다는 거겠지.
제우스는 시련을 쳐다봤다. 그가 의도했던 시련과 궤를 달리했다. 그는 천천히, 성유진이 신으로서 익숙해지기를 원했다.
허나 시련은 급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저 인간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이야.
“그가 특별하다는 건 너도 알 거다. 나도, 너도, 그리고 시스템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그에게 있다. 그건 분명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겠지."
-흐흐. 그렇지.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저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는 거겠지.
제우스는 귓가에 울리는 놈의 목소리가 거슬렸다. 당장 놈의 멱살을 잡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질문을 던졌다.
“배신자는 누구와 손을 잡았지? 배신자는 몰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모든 문의 열쇠.
상상치도 못한 존재에 제우스는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