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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1999화 (1,777/2,000)

< 1999화 > 1999. 신의 아틀란티스

세계수가 불탔다.

북쪽 인간들은 세계의 멸망이 코앞에 다가오자 패닉에 빠졌다.

세계수가 무너진다고 해서 실제로 인간 세계가 무너지진 않았다. 원래 그런지 몰라도 이 세계수는 일종의 통로였다. 다른 세계로 갈 수 있게 해주는 통로.

세계수가 불타면서 그 통로가 막히고 사라졌다. 다른 세계의 존재는 함부로 인간 세계에 간섭할 수 없으리라.

‘간섭할 힘도 없겠지만.'

북유럽 신화의 주신인 오딘을 죽이고 힘과 얻고 지혜의 샘물까지 마셔 지혜를 얻은 나는 세계수와 이어진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벼락으로 숨어 있던 신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전부 죽인 것 같진 않군.'

좀 실력 있는 신들은 내 눈을 피할 수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눈이라고 해서 모든 걸 파악할 수 없으니까. 벼락 또한 마찬가지다. 직접 공격하는 거라면 몰라도 이렇게 떨어진 장소에서 공격하면 위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헬은 못 죽였다. 요르문간드는 벼락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군.’

벼락을 맞으면서 대놓고 하품하는 요르문간드가 거슬렀다. 허나 직접 찾아가서 죽일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지금은 무시한다. 요르문간드쯤이야 나중에 생각나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

당장 해야 할 것은 혼란에 빠진 인간들을 수습하는 일이다. 물론 인간들이 가엾고 딱해서 그런 건 아니다.

'인간들의 신앙을 받으면 조금이라도 더 강해질 수 있겠지.'

이미 혼자서 신화 하나를 작살낼 정도로 강해졌지만, 나를 노리는 적들이 너무 많았다.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야 했다.

인간들을 수습하는 일은 쉬웠다.

내게 신앙을 바치지 않는 놈들은 벼락을 떨어뜨려 죽여버리면 된다. 그럼 살고 싶어서라도 내게 신앙을 바쳤다.

대충 북쪽을 정리한 나는 올림푸스로 향했다.

구름을 타고 빠르게 귀화했지만, 나를 반겨야 할 올림푸스는 반쯤 박살 나 있는 상태였다.

“…당신. 너무 늦었잖아요. 어디갔다 온 거죠?"

헤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여전히 아름다우면서도 도도했으나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북쪽을 쓸어버리고 오느라 시간이 좀 걸리긴 했어. 근데 올림푸스는 왜 이런 거지? 아무리 내가 없다고 해도 너와 다른 신들이 있을 텐데.”

헤라를 비롯한 다른 여신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힘이 좀 약해져 있었다.

“크로노스를 비롯한 티탄 족이 돌아왔어요.”

헤라의 말을 듣자마자 일이 어떻게 됐는지 깨달았다.

“하데스군. 하데스가 타르타로스의 문을 열어 놈들을 풀어줬나. …하데스에게 타르타로스의 문을 열 권한은 없을 터인데….”

나는 중얼거리다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봤다. 올림푸스의 신들이 불멸이라 다행이었다. 북쪽 신들처럼 불멸이 없었다면 절반 이상이 죽었으리라.

“모두 잘 버텨주었다. 크로노스와 티탄들은 어디 갔지? 하늘의 눈으로 내려다봐도 안 보이는군.”

헤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데스와 티탄들은 가이아를 데려가 땅을 뒤집었어요. 땅이 땅이 아니니 당신의 권능으로도 지상을 살피는 건 힘들 거예요."

“……가이아를?”

지금 가이아를 데려가서 뭐 하려고? 크로노스가 가이아를 겁탈하려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인 건 둘째치고, 가이아가 크로노스에게 협력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목적이 있다고 봐야 했다.

‘대지모신은 몇 있지만 가이아만큼 뛰어난 대지모신은 없다. 가이아는 근본 그 자체라 할 수 있지. 가이아만 있다면 다시 신화를 만드는 것도…. 아, 그 목적인가. 크로노스는 다 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모양이군.’

크로노스는 일이 끝난 뒤를 기약해 가이아를 납치한 것이다. 그러니 가이아의 신변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중에 가이아의 협력이 필요할 테니까.

“헤라. 잘해줬어. 꽤 힘든 싸움이었을 테지."

“…운이 좋았어요. 갑자기 기간테스가 내분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저희가 타르타로스에 끌려갔겠죠.”

“기간테스? 아, 그런가. 타르타로스에 놈들도 갇혀 있었겠군. 크로노스가 이끄는 티탄족, 티폰을 이끄는 기가스족이 힘을 합쳤군. 기간토마키아 보다 더 한 꼴이니… 이 정도로 멀쩡한 게 더 놀랄 정도군. 기간테스가 배신한 이유는 가이아 때문이겠지. 이긴 건 티탄인가?”

“가이아를 손에 넣은 크로노스가 별 미련 없이 물러섰죠. 기간테스가 그 뒤를 다급히 쫓았고…. 근데 당신 정말 내가 아는 제우스 맞아요?"

헤라가 의심스러운 눈동자로 날 쳐다봤다.

“내가 너무 똑똑해서 의심스러운가 보군. 훗, 북쪽을 정복하며 지혜의 샘을 마셨어. 지금 나는 끝없는 지혜를 손에 넣은 제우스다!"

내가 씩 웃었다.

헤라를 비롯한 신들은 내 설명에도 불구하고 의심의 눈으로 날 쳐다봤다.

이해한다.

평화의 시대가 유리컵처럼 손쉽게 깨졌으니 여러 가지로 당혹스러울 것이다.

"내가 왔으니 걱정하지 마라. 지금의 내 힘이면 포세이돈이든 하데스든 모조리 쉽게 제압할 수 있다. 크로노스? 티폰? 아무것도 아니다. 놈들이 하늘의 눈을 가린다고 하더라도 하늘 자체를 무너뜨리진 못하리라!”

자신감 있게 말했다. 이럴 때일수록 신들의 왕인 나는 강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제우스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북쪽을 정복하셨다고요? 그 싸가지 없는 것들을 홀로 정복하셨다니. 역시 제우스 님입니다."

“제우스 님의 힘이 느껴지는군요. 제우스 님이 있는 한 올림푸스는 영원할 것입니다.”

효과가 있었다. 침울했던 올림푸스의 신들이 다시 기운을 내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올림푸스의 지존인 내가 왔으니까.

'연설이나 한 번 해볼까. 연설만큼 사기를 고취하는 게 없지.'

그러다 뒤늦게 올림푸스 신들의 수가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신들이 없군. 특히 헬리오스가 안 보이는군. 어디 갔지?"

대답은 위에서 들렸다.

“여기 없는 신들은 모두 포세이돈과 아폴론 측에 붙었습니다! 하데스는 그들과 같은 편이지만 사른 세력이 동맹한 느낌이고요!"

헤르메스가 날아오며 말한 것이다.

"제우스 님! 돌아오셨군요! 물론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지금 전황이 계속 밀리고 있지만, 의외로 인간들이 잘 버티고 있습니다! 제가 전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헤르메스. 네가 고생이 많군. 가까이 와라.”

"넵! 제우스 님!”

헤르메스가 별 의심 없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헤르메스의 목을 낚아채 움켜쥐었다.

"컥?! 제, 제우스 님?!”

다른 모든 신들이 당황했다. 그들은 나와 헤르메스의 눈치를 살폈다. 대표로 헤라가 앞으로 나섰다.

“제우스! 뭔가 착각하고 있군요. 헤르메스는 반역자가 아니에요! 크로노스와 티폰이 쳐들어올 때도 헤르메스가 알려준 덕분에 미리 대비할 수 있었어요. 그의 공이 적지 않아요!”

헤라가 적극적으로 헤르메스를 변호했다.

‘그 차가운 헤라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니…. 내가 없는 사이에 성실하게 일한 모양이군.'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모두 들어라. 헤르메스는 배신자다.”

"제우스 님…?!"

헤르메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억울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울먹였다. 몇몇 신들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나와 헤르메스를 번갈아 바라봤다.

“히프노스는 죽기 전에 배신자가 있다말했지. 그건 하데스와 포세이돈을 말하는 줄 알았다. 실제로 나를 배신하고 반역했으니 말이다."

원래는 히프노스의 말을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하데스와 포세이돈의 배신과 반역? 불만이 가득한 놈들이었으니 놀랍지도 않았다.

“지혜의 샘물을 모두 마시고 보니 좀 다르게 생각되더군. 시간이 남아서 내가 해온 행적들을 천천히 생각해봤지.”

“제우스 님! 저는 배신자가 아닙니다! 저는 제우스 님의 그… 셔, 셔틀? 셔틀신이지 않습니까! 전 오직 제우스 님의 명령대로만 행동했습니다!”

“겉으로는 그랬지. 허나 너는 교묘하게 나를 조종했다.”

“제가 어찌 신중의 신인 제우스 님을 조종합니까?!”

“내가 말한 조종은 힘과 마법으로 인한 지배와 최면, 세뇌 같은 게 아니다. 너는 교묘한 언변으로 내 선택을 유도했다. 마치 내가 스스로 선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그런 적 없습니다! 선택은 제우스 님이 하시지 않습니까?!”

절대정신이 있는 나는 최면이나 세뇌 같은 거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완전무결한 정신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절대정신은 정신을 방어하는 쪽이다. 내가 사고하는 방식에 큰 영향은 끼치지 않는다.

가령 이런 거다. 빨간 걸 자주 보면 빨간 게 익숙해지고, 선택을 내려야 할 때 자기도 모르게 익숙해진 것을 선택하게 된다.

지혜가 없을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헤르메스가 시각 정보와 언변으로 교묘하게 나를 제어해 선택을 내리게끔 했음을.

“내가 북쪽에 가게 된 선택을 내린 것도 네가 유도한 거겠지. 정말이지…. 너 같은 놈이 내 옆에 있었다니 끔찍하군.”

“오해입니다! 북쪽의 신들이 제우스 님에게 헛소리를 지껄인 겁니다! 북쪽에는 기만의 신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신이 제우스 님에게 뭔가 한 게 확실합니다! 모두 보고만 있지 말고 제우스 님을 말려주십시오!"

신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핀다. 마냥 나서지 않는 건 나랑 깊은 사이의 여신들이 의심 서린 눈으로 헤르메스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헤르메스를 바닥에 찍듯이 내팽개쳤다.

"크억!"

헤르메스는 반동을 이용해 날아올라 도망치려고 했다.

'어림도 없지.'

콱!

헤르메스의 머리를 짓밟아 누른다. 헤르메스의 머리가 지면에 파고들어 갔다. 나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놀랍게도 헤르메스의 머리는 터지지 않은 것이다.

'전력을 다하진 않았다고 해도 지금 내 힘이면 헤르메스 정도는 가볍게 찢을 텐데.’

또 다른 확신을 얻었다.

파지지직.

뇌전이 일어나 족쇄처럼 헤르메스의 팔다리를 묶기 시작했다.

콱! 콱! 콱!

나는 헤르메스를 더 짓밟았다. 힘이 점점 실리면서 올림푸스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헤르메스의 머리는 박살 나지 않았다. 이어 번개의 창을 만들어 헤르메스의 허벅지와 팔뚝에 찔러넣었다.

“흐, 흐흐흐흐흐흐.”

헤르메스가 웃는다.

신들이 기겁했다. 음침한 웃음소리 때문이 아니다. 헤르메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굉장히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헤르메스의 머리를 몇 번 더 밟았다.

“네가 알아차렸다는 걸 인정할 테니 그만해라. 과연 지혜의 샘이라고 할까. 명불허전이군. 이렇게 쉽게 들킬 줄이야.”

헤르메스에게서 어둡고 질척질척한 힘이 뿜어져 나온다. 나는 혀를 차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이걸 상대하려면 내게도 준비 시간이 필요했다.

헤르메스의 머리가 변한다. 촉수가 튀어나와 빙글빙글 돌듯이 머리를 감쌌다. 그의 몸 곳곳에도 작은 촉수가 튀어나와 말리고 오그라들기를 반복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본능적인 역겨움을 일으킨다.

나는 아스트라페를 오른손에 쥐며 놈을 맹렬히 노려봤다.

"니알라토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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