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화 > 2002. 신의 아틀란티스
창조의 힘을 사용하기 전에 일단 올림푸스의 신들과 모여 의견을 나눌 생각이었다.
상황이 좀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여신들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음?"
남쪽에서 신의 힘이 느껴진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다수의 힘이. 북쪽과 달리 남쪽은 내 영역이 아니었다. 그래도 긴장은 되지 않았다. 눈에 힘을 주니 남쪽에서 날아오는 신들이 보였다.
'이집트 계열 신들이네.'
싸우려고 왔나? 그럼 상대해줄 의향이 있었다. 이놈들이 떼로 덤빈다 하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까.
아스트라페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곧 힘을 풀었다.
‘…싸우러 온 게 아니야. 무언가에 쫓기고 있군.’
모래바람이 도망치는 이집트 신들을 공격하고 있다. 이집트 신들은 각각 힘을 써서 반항해보지만 소용없었다. 괴물에게 당하는 인간처럼 압도적인 힘에 유린당하고 있다. 그나마 주신이라 할 수 있는 오시리스 등의 이름 있는 신들이 어느 정도 버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모래바람이 아니라 노란 바람이군.’
이집트 신들이 누구와 싸우는지 짐작 갔다. 물론 이집트 신들을 구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지켜보다가 적당한 때에 나서서 모조리 다 죽여버릴 것이다.
그때였다. 이쪽으로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존재들이 있었다.
한 명은 등에 날개를 가진 여신이었고, 한 명은 은발에 금색 눈동자를 가진 여신이었다.
'니케와 아테나군. 남쪽으로 가더니… 이집트 신들에게 의탁했었나?'
솔직히 말해서 이집트 신들이 받아준 게 더 놀라웠다. 다른 세계의 신을 받아들이는 건 이질적인 일이었으니까.
'아테나 같은 여신이 도와달라고 한다면… 흠. 받아들이겠군. 아폴론 같은 놈이라면 볼 것도 없이 내쳤겠지만.'
내 뒤쪽에서도 올림푸스의 신들이 모여든다. 신들이 나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올림푸스의 신들은 내 뒤에 서서 황색 바람과 싸우고 있는 이집트 신들을 바라봤다.
“저들도 고생이군요. 근데 왜 이쪽으로 온 거죠?”
“아무튼 도와야 하지 않습니까?”
“저기 날아오는 건 니케와… 메티스의 딸인 아테나인가요?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군요.”
올림푸스의 신들이 어수선했다. 아테나가 점점 가까워지기에 손을 들어 그들을 조용히 만들었다. 나는 따먹지 못한 처녀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니케와 아테나가 내 앞에 내려섰다. 니케는 바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니케와 가졌던 잠자리를 한 번 떠올린 뒤 아테나를 바라봤다.
“그날 이후로 처음이군요. 아버지."
투구를 쓰고 창과 방패를 든 여전사가 당당히 말했다.
“아테나. 지금에서 나타난 이유가 뭐지?”
“아버지!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자살하십시오!"
"......!!"
신들이 놀란 기색이 느껴졌다. 그들과 달리 나는 침묵했다. 아테나의 말을 듣자마자 이해했기 때문이다.
신화를 완성하는 방법. 그것은 비단 혼란한 세계를 정리하는 것만이 아니다.
멸망. 혹은 파멸.
내가 이 세계를 수습하지 않아도, 내가 죽는 순간 신화는 완성될 것이다.
“알고 있나 보군.”
“…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습니다. 하지만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게 된 뒤에야 알게 됐습니다. 아버지의 행보는 지나칠 정도로 파격적이었습니다. 마치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니라는 듯이… 그리하여 깨닫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닌 거겠지요.”
“과연, 지혜의 여신답다.'
"시간이, 시간이 없습니다. 아버지! 자살하십시오! 어서!! 아버지를 향한 제 마지막 조언이자, 부탁입니다! 죽어주십시오!!"
콰직.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위로 올렸다. 하늘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 존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 존재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 파멸은 코 앞이었다.
털썩!
그 존재감을 느낀 신들이 주저앉는다. 몇몇은 인간처럼 구역질을 해댔고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었다. 미친 듯이 폭소하는 신들도 있었다. 신들의 정신이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건 주신급의 신들뿐.
“아버지!!"
아테나가 재촉한다. 나는 헤라를 비롯한 여신들을 훑어봤다. 그녀들이 미치는 꼴을, 저 존재에게 농락당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저 존재가 관심을 가진 건 나뿐이겠지만.
“알았다. 끝내자.”
나는 아스트라페를 내부에서 터트렸다. 스스로의 근원을 흩트리며 소멸을 시작한다.
「신화의 끝! 모든 것이 엉망진창인 혼돈의 신화가 완성되었습니다!」
「시련을 종」
-안 되지.
-이 기회를 놓칠 것 같으냐?
「시련을 종료, 종… ■■■■■■■■」
「종■불■ ■■■■■■■■■」
「■■■■■■■■■■■■■■■■■■■■■■■■■■」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무언가가 나를 보고 있다.
무언가가 내게 다가온다.
무언가가 내 안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
「회복하십시오!!」
「당장!」
「■■■■■■■■■■■■■■■■■■■■■■■■■」
[완전 회복을 사용합니다.]
소멸의 끝에서 돌아온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늘은 부서지고 땅은 뒤집혔다.
“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위대한, 위, 위, 위대한 분이시여, 아, 아, 아, 나를 먹어주소서!!”
“나는벌레입니다나는벌레입니다나는벌레입니다.”
"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주세요제발."
신들이 미쳤다. 그 원인은 부서진 하늘 너머에 있었다. 거대한 존재가. 거품과도 같은 촉수와 기생신들에게 감싸여 있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며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헤라는 그 자랑하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고, 아프로디테는 스스로의 눈을 손가락으로 연신찔러댔다. 헤스티아는 자기를 범해달라며 알몸으로 천박한 자세를 취했고, 아르테미스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있었다.
멀쩡한 건 아테나 정도다.
‘……아니. 멀쩡하지 않군.'
웃늘 얼굴로 눈과 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뿌드득, 빠드득. 이빨이 부서지고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아테나의 눈동자는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의 입에서 내장이 튀어나오려는 걸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트라페.”
번개를 휘둘러 미쳐버린 신들에게 끝을 선사했다.
내 여자들을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것이 아주 좆같았지만, 미쳐버리다 못해 뒤틀리고 타락해 괴물로 거듭나려는 그녀들을 보는 건 더 괴로웠다.
‘잘했다. 네 행동이 옳다. 너는 신들에게 안식을 주었다.'
내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우스입니까?’
‘그래.’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 원래 시련이 이거였습니까?’
'아니다. 배신자들이 있었다. 그 배신자들을 조종한 건 저놈이다. 놈은 네가 목표다.’
'왜 접니까.'
‘글쎄. 모든 것을 아는 존재니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겠지.'
‘……다른 신들은 미치는데 당신은 안 미칩니까?'
'오염을 막기 위해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나는 지금 어둠 속에서 오직 너의 감각만을 의지하고 있다. 지금의 네가 내 몸을 하고 있기에, 이 세상이 시련 속 세상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왜 제 안으로 오신 겁니까? 솔직히 말해서 좀 많이 불쾌합니다만.’
'저놈에게 한 방 먹이고 싶지 않나?’
‘제 마음을 잘 아시는군요. 근데 시스템은 어떻게 된 겁니까?'
‘일부가 파괴되었고 복구 중이다. 저 존재는 규격 외의 존재다. 모든 신격이 힘을 합쳐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존재이니…. 시스템이 감당하면 오히려 이상하지.'
'……어떻게 해야 저놈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습니까.'
'번개다. 너와 나의 힘은 번개이지 않느냐. 내게 몸을 맡겨라. 권능을 쓰는 법을 알려주마.’
제우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는 제우스에게 몸의 주도권을 넘겼다. 솔직히 말해서 저놈과 직접 싸울 자신이 없었다.
분명 내가 던지는 아스트라페는 통하지 않을 테니까.
제우스는 위로 솟구쳤다. 부서진 하늘을 뚫고 우주 공간으로 날아갔다. 슬쩍 본 지구는 거대한 촉수 몇 가닥에 망가지고 있었다. 촉수의 주인은 지구보다 몇십 배는 더 컸다. 그 거대한 존재는 구체로 둘러싸여 있었다. 끊임없이 회전하며 꿈틀거리는 것들은 저 위대한 존재에게 기생하는 것들이었다.
-쓸데없는 것이 섞여 있군.
“아무리 당신이라도 신들의 규칙을 깡그리 무시하는 게 무슨 경우요.”
-너희가 정한 규칙을 감히 내게 들이미느냐?
"……."
제우스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잠깐 말을 섞은 것만으로도 제우스의 존재가 격렬히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제우스는 권능을 사용했다.
번개.
저 너머에 있는 거대한 번개가 느껴진다. 번개의 크기를 느낀 나는 전율했다. 이건 번개였으면서도 번개가 아니었다.
그것이 다가오며 육안으로도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번개 구체.
정확하게는 번개에 휘감겨 끌려온 목성.
제우스는 그것을 번개 삼아 위대한 존재에게 꽂았다. 번개의 구체가 터지며 위대한 존재를 감전시킨다.
그것에 기생하고 있는 것들이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그것뿐이었다.
'…역시 안 되나.'
‘한 방 먹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격의 차이가 너무 난다. 저것은 우리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우주가 탄생하고 우주가 끝날 때까지 이어질 모든것…. 아무튼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나는 제우스의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걸 느꼈다.
‘이러고 그냥 사라진다고?!'
‘저건 네게 흥미를 가지고 있다. 비교적 온건하게 대하고 있지. 그러니 협상만 잘하면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거다. 모든 건 네게 달렸다….'
제우스가 사라졌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것의 기생신들이 비명과 함께 분노를 터트린다. 나를 향해 직접적인 위해까지 가해진다. 촉수 중 하나가 나를 노리고 쏘아진 것이다.
하지만 촉수는 내 몸에 닿기 전에 사라졌다. 위대한 존재가 허락하지 않았기에.
-드디어 둘만 남았군.
“아주 좆같은 기분이야. 죽일 거면 죽여라.”
-나는 널 죽일 생각이 없다. 내가 궁금한 건 너라는 존재다. 내가 알 수 없는 존재여, 너를 내게 알려다오.
"지랄.”
쩌억!
놈의 몸이 갈라진다. 탈피하듯이 촉수를 뜯어낸다. 기생하고 있는 것들이 당황해서 꿈틀거렸다. 놈의 본체는 눈이었다.
거대하고 거대한 눈.
눈이 내게 다가온다.
모든 것이 파헤쳐지는 듯한 기분은 굉장히 불쾌했다.
-열어라.
"뭐?"
-열어라. 열어라. 열어라. 열어라. 열어라.
"……."
아무래도 절대정신을 못 뚫는 것 같았다.
절대정신도 내 능력 중 하나. 내가 원하면 절대 정신의 효과도 없앨 수 있었다.
'절대정신이 없으면 미쳐버리지 않나?'
그렇다고 이대로 버티는 것도 답이 아니었다. 이놈은 몇 년, 몇천, 몇만 년이고 집요하게 날 볼 놈이니까.
'걍 유희를 종료해버려?'
그것도 답은 아니겠지.
‘몰라. 그냥 한 번 미칠까. 일단 간부터 한번 봐볼까.’
■■■■■■■■■■■■■■■■■■■■■■■■■■■■■■■■■■■■■■■■■■■■■■■■■■■■■■■■■■■■■■■■■■■■■■■■■■■■■■■■■■■■■■■■■■■■■■■■■■■■■■■■■■■■■■■■■■■■■■■■■■■■■■■■■■■■■■■■■■■■■■■■■■■■■■■■■■■■
놈에게 내 정신을 허락하자. 아주 잠깐. 0.1초 정도만.
‘…뭐였지?'
방금 우주가 3번 정도 지나가지 않았나?
-꿈인 줄 알았거늘. 꿈도 뭣도 아니었는가….
기생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소멸한다.
흔들리는 정신을 붙잡고 눈앞의 놈을 노려보다가 깜짝 놀랐다. 놈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목숨을 구걸하던 약해빠진 것들의 눈과 비슷했다.
놈이 녹아내린다. 나를 보는 눈동자에는 오직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스스로의 소멸을 선택한 놈은 그저 내게 애원했다.
-부디 나를 가지고 놀지 말아주십시오….
그 어이없는 광경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놈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
「■■■■■의 소멸을 확인했습니다.」
「신화를 완성했습니다.」
「시련을 종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