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화 > 2005. 신의 아틀란티스
헤파이스토스는 내 몸을 통해 망치를 계속해서 휘둘렀다. 그가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별 조각들이 터지며 반짝이는 빛을냈다. 꽤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지루해졌다. 나는 아까 뜬 알림창을 뒤늦게 확인했다.
「운수대통(EX)이 발동됩니다.」
「당분간 운수대통(EX)이 비활성화됩니다.」
‘헤파이스토스 님. 아까 운수대통이 발동됐는데 원래 유성우가 떨어집니까?'
유성우를 떨어뜨리는 스킬이면 어마어마한 스킬이다. 방금 얻은 아스트라페(EX) 스킬보다 더 좋지 않나.
‘행운과 관련된 능력은 있을 수 없는 일을 일으키는 능력이 아니다. 아주 작은 가능성의 일을 확정하는 것에 가깝지.'
'그것만으로 대단한 것 같은데….'
'유성우는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 네 행운이 그걸 지금으로 바꾼 거지. 아무리 행운이라도 원인을 비틀지 못한다. 행운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신뢰하지도 마라.'
'원인을 비틀지 못한다니? 그럼 유성우의 원인은 뭡니까?”
‘신이라고 해서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짐작하기로는… 우주 어딘가가 부서졌나 보지.'
‘……그런 어마어마한 재앙을 그리 담담히 말해도 됩니까?'
'지루함에 미친 신이 날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여파로 유성우나 해일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날 수 있지.'
'그거 위험한 거 아닙니까?'
‘근처의 다른 신들이 수습하니 걱정 마라. 슬슬 중요한 작업이니 말 걸지 말도록.’
헤파이스토스가 집중하기 시작했다. 망치질 소리가 더 커지고 청명해졌다. 잘은 모르지만 망치질을 할때마다 공간이 일렁이고 용암이 소용돌이치는 걸 보니 보통이 아닌 모양이다.
별 조각이 화련비도에 어떤 도움이 되냐고 물으려는 걸 꾹 참았다. 괜히 질문해서 헤파이스토스의 집중을 방해했다가 실수라도 하면 나만 손해 보는 거 아닌가.
‘슬슬 손이 아파지는데…. 빨리 끝내줬으면 좋겠다.'
깡!
대장장이 신이니 그냥 뚝딱 완성해버리면 되지 않나?
이전과는 다른 망치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화련비도는 마무리되고 있었다. 열기는 줄어들고, 용암은 굳어갔으며 반짝이던 별 조각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화련비도는 완벽히 수리되었다. 겉으로 봤을 땐 크게 변한 건 없었다. 허나, 헤파이스토스가 빙의된 상태인 내 눈에는 화련비도의 안에 서린 기운들이 보였다.
이건 이제 단순한 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일종의 예술 작품 그 자체라고 할까.
유감스럽게 헤파이스토스의 시야로 봤으나 화련비도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헤파이스토스의 경험이 내겐 없으니까.
‘칼을 험하게 쓰더라도 부서질 일은 없을 거다. 설령 부서지더라도 스스로 회복할 테지.'
‘험하게 쓰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험하게 써라. 도구는 쓰라고 존재하는 거다. 도구를 아껴서 무엇하겠느냐.'
‘설마 강화된 화련비도의 능력이 그게 전부입니까?'
‘본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속성 강화 말입니까. 그거 꽤 쓸만했는데 다행이군요.'
화련비도를 통해 뇌전을 사용하면 뇌전이 빨갛게 변한다. 색만 변하는 게 아니라 위력도 강해졌다. 이 능력이 사라지지않아 다행이었다.
‘파프니르의 심장을 사용했기에 탐의 능력도 생겼다.’
'어떤 능력입니까?"
나는 기대감에 가득 차 물었다. 괜히 파프니르의 사냥한 게 아니다. 강력한 능력을 원했기에 파프니르를 죽이고 그 심장을 재료로 사용했다.
‘칼날에 적의 존재를…. 좀 더 쉽게 말하면 피를 묻히면 적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다만 한 번 사용하고 나면 재사용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거다.'
‘상대방의 능력을 완벽히 복사하는 능력이군요!’
'아니. 주인인 네 역량에 달렸다.”
'그 말은 제가 약하면… 그 능력을 제대로 이용할 수 없다는 겁니까?'
‘제대로 이해했군.'
'…….'
결국 나한테 달린 능력이었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갑자기 별로 좋은 능력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른 재료…. 유성을 넣지 않았습니까. 다른 능력도 있지요?'
‘권역(權域)을 사용할 수 있다. 자주 사용할 수는 없을 거다.'
'권역이 뭡니까?'
‘주변 일대를 자신의 공간으로 만들어 법칙을 비틀어 유리하게 만드는…. 음.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군. 권역의 경우 신들이 권능 싸움을 할 때 자주 사용한다. 이 권역을 사용해 맞부딪치는 거지. 넌 인간이니 권역을 유지하는 것에 한계가 있을것이다.'
‘대충 알 것 같습니다.’
'네가 이해한다고?!'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권능이 없는 인간이 어떻게 권역을 이해하겠나.’
‘용광로 내부. 거기가 권역 아니었습니까?'
‘…맞다.’
헤파이스토스는 정말로 놀란 듯한 반응이었다. 이 새끼가 평소에 나를 얼마나 무시했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나는 욕설을 내뱉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어떻게 한 번에 알았지?'
‘제가 무슨 시련을 극복했었는지 잊으셨습니까.'
‘아. 그렇군. 잠깐 잊고 있었다. 시련 속에서 아버지가 되어 권능을 마구잡이로 사용했지. 그래. 너는 몇 번이나 권역을 사용했다. 설명은 다 끝난 것 같군. 이만 가보겠다.'
‘아니, 잠시만요. 다른 능력은 없습니까?'
'없다만.'
‘화련비도에 자아가 싹튼다거나… 저번에 화련비도에 의지가 있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습니까.'
‘의지와 자아는 다르다. 화련비도에는 이미 의지가 깃들어 있고, 너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게 자아가 될 가능성은… 아예 없진 않아도 아주 희박한 확률이다.’
‘그렇습니까. 근데 요도나 마검같은 건 사용자에게 말도 걸고 하지 않습니까.’
'그건 자아가 아니라 무기에 잡귀가 들러붙은 것뿐이다.'
'수억, 수천억의 인간을 죽이더라도 불변일 것이다.'
'인간이 아닌 존재는요?'
'……질문을 바꿔서, 앞으로 인간을 죽여도 변질하지 않겠습니까?'
‘모르겠군.’
화련비도의 정보를 확인했다.
「화련비도
???
랭크: ???」
당혹스러웠다. 원래는 화련비도의 정보창은 다른 거였기 때문이다. 아틀란티스 기준으로 SS 랭크의 무기.
'헤파이스토스 님. 이거 정보가 왜 이럽니까?'
'권역때문이겠지.'
헤파이스토스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하고는 가버렸다. 시련 때부터 느낀 거지만 헤파이스토스는 대장장이 일이 아닌 일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헤파이스토스가 사라지자 내 몸은 자연스럽게 대장간 밖으로 밀려 나왔다.
열기가 느껴진다.
"뜨거!"
화들짝 놀란 나는 아직 열려 있는 포탈을 향해 내달렸다.
제 4,000 구역, 올림푸스 산에 입장했습니다.」
느껴지는 열기가 사라졌다. 나는 손등으로 이마를 닦았다. 땀이 흥건했다. 그새 땀이 주르륵 흐른 것이다.
'열기 대책 없이는 저 구역에 못 가겠군.’
미련은 없었다.
신의 대장간이란 듣기 좋은 이름과 달리 사용하기는 영 까다로우니까.
그보다는 수리와 함께 강화된 화련비도를 바라봤다. 금이 간 부분은 없었다. 일자로 쭉 뻗은 붉은색 칼날은 아름답기 까지하다.
“돌아왔구나, 화련비도!”
우우웅.
내 말에 화답하듯 칼날이 떨렸다.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허공에 화련비도를 휘둘렀다. 칼의 무게와 중심은 변하지 않았으나 칼날의 예리함은 더 살벌해졌다.
몇 번 더 칼을 휘둘러본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 손맛이다. 이 손맛이 그리웠지.'
뇌전.
파지지직.
화련비도의 칼날을 타고 붉은 전류가 번뜩였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화련비도를 통해 한층 더 강화된 뇌전이다.
‘화련비도의 능력들은 여기서 사용하기 어렵겠군.’
올림푸스의 신전 밖으로 나갔다. 신전 내에서 힘을 마구잡이로 썼다가 신들의 저주를 받을지도 모른다. 나는 올림푸스의 신들은 의외로 속이 좁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역시 그래도 올림푸스의 산을 지배권을 얻는 건 힘들겠지.’
발키리의 날개로 하늘을 날아 올림푸스의 산을 벗어난다. 그러면서 눈에 힘을 주어 지상을 훑어봤다. 화련비도를 사용하기 위해선 대상이 필요했다. 적당히 강한 몬스터면 괜찮을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귀찮게 하던 놈들이 정작 필요할 때는 안 보이네.'
호숫가에 있는 몬스터를 발견했다. 9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 뱀이었다.
‘히드라잖아.’
시련 속에서 죽여봤기에 잘 알았다.
‘지금 내가 상대할 수 있나?'
시련 속의 히드라와 지금 눈앞에 보이는 히드라를 비교해 본다.
잘 모르겠다. 시련 속에서는 땅을 기어 다니는 버러지 같았는데, 지금 보니 무시할 수 없는 강적으로 느껴졌다.
'히드라도 위신이겠지. 시련 속 히드라보다는 약할 거다.'
히드라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몸을 일으켰다. 잠깐 고민했던 나는 놈을 상대하기로 했다.
‘여차하면 도망친다.'
완전 회복은 아직 쿨타임이라 사용할 수 없었다. 천심은 사용할 수 있었기에 독은 두렵지 않았다.
히드라는 나를 향해 입을 쩍 벌렸다. 9개의 입에서 일제히 독이 분사되어 날아온다.
'여기까지 닿는다고?!'
깜짝 놀라 황급히 독을 피해 옆으로 날았다.
'젠장. 내가 제우스였으면 독이 든 뭐든 무시하고 맨손으로 대가리 전부를 찢어버렸을 텐데!’
힘이 없다는 것에 한탄하며 마나를 움직였다.
‘아스트라페!'
하늘에서 굵은 벼락 한 줄기가 히드라에게 떨어졌다. 히드라의 머리 두 개가 그대로 잘려나가고 불탔다.
‘히드라 머리통 2개를 단숨에 끝내버리는 걸 보니 EX 랭크답게 위력은 뛰어나다. 빠르기도 빨라서 웬만한 놈이 아니고서야 반응하기도 힘들겠어.'
단점은 마나 소모가 극심하다는 것이다. 아스트라페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다른 방식을 생각해야했다.
히드라가 비명을 지르며 무차별적으로 독액을 쏘아낸다.
'발키리의 방패.'
발키리의 방패를 앞세워 놈에게 접근했다.
치이익!
독액이 방패 표면을 녹이기 시작했다. 경악스러웠다. S랭크 방패가 이렇게 쉽게 녹아내린다니!
‘화련비도도 녹아내리는 거 아니야?! 아니, 난 헤파이스토스의 실력을 믿는다!’
히드라의 독액 따위에 녹아내릴 거라면 그냥 녹아내리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칼끝으로 날아오는 히드라 독액을 베어 갈랐다. 히드라 독액이 칼날에 묻었으나 녹지 않았다.
호수 위로 내려섰다. [물의 축복] 덕분에 물 위에 설 수 있었다.
히드라를 향해 내달리던 나는 다리를 삐끗했다. 다행히 쓰러지기 전에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제우스의 몸에 너무 익숙해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