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7화 > 2027. 뉴타입
천일 그룹 회장이 손수 가져온 딸기를 입에 넣는 정수연의 표정은 꽤 우울해 보였다.
물론 나는 그녀를 이해한다. 원치 않는 임신이었으니 심경이 복잡하겠지. 하지만 이미 임신을 해버린 걸 어떡하나. 꿋꿋하게 살아야겠지.
“허허.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회장 할배는 할 일도 없는지 정수연의 보며 웃고 있다.
그리고 정수연은 회장을 무시했다. 상대하기 싫다는 티가 팍팍 났다. 아까 정수연이 대놓고 꺼지라 말했는데도 회장은 얼굴에 철면피를 깔았는지 기어코 집안으로 들어 왔다.
그렇게 해서 지금 이 상황이다. 묵묵히 딸기를 먹는 걸 보면 딸기가 먹고 싶었던 건 사실이었던 것 같다.
“집이 좀 허름하구나. 이런 곳보다는 도심 쪽이 더 낫지 않느냐? 내가 한남동에 사는데 거기 분위기가 괜찮은 편이지. 집은 내가 마련해 줄 테니 오지 않겠느냐?”
“필요 없어. 난 이 집이 마음에 들어.”
정수연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역시 정수연이라고 할까.
노인 공경이고 뭐고 없었다.
그러나 회장은 만만하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차분하게 정수연의 속을 긁는 말을 내뱉었다.
“그래. 식은 언제 올릴 것이냐? 5월의 신부가 가장 좋다고는 하나… 5월은 이미 지났으니 너무 늦겠지. 임신도 했으니, 배가 나오기 전에 식을 올리는 게 좋지 않겠느냐? 다음 주에 올리자꾸나. 내가 다 준비해 주마. 너희는 몸만 오면 된다.”
“결혼할 생각은 없어.”
“닌자를 홍길동으로 만들 셈이냐?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회장이 쯧쯧 혀를 찼다. 정수연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다. 그녀는 한 손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고 눈으로는 나를 쳐다봤다.
한 달 넘게 보지와 자지를 맞댄 사이가 아닌가.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 안쪽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느 정도 예상이 간다. 아이를 위해 나와 결혼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고민하는 것 자체만으로 나쁘지 않았다. 아닌 척해도 결국 떡정이 들어버린 것이다. 하기사 매일 질내사정을 몇 번씩이나 당했는데 정이 안 들면 더 이상하지. 그래도 망설이고 있는 걸 보니 방심할 수는 없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해 둔 것이 있었다.
“수연아. 딸기 그만 먹고 나갈 준비해.”
“…나간다고? 어딜?”
정수연이 경계했다. 나에 대한 신뢰가 좀 떨어진 것 같았다. 어쩌면 더 이상 홀몸이 아니니 몸을 챙기는 것일 수도 있었다.
“복수해야지. 장인어른을 배신때리고 연구 자료를 빼돌린 영광회 간부 놈은 따로 빼놓고 감시 중이거든.”
순간적으로 정수연의 눈이 커진다. 눈동자가 잠깐 흔들리는 듯하더니 평소처럼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놈을 찾았다고? 어떻게?”
“설마 조사도 하지 않고 일을 벌였을까 봐. 내 밑에서 일하는 정신 지배 능력자가 있어. 그놈을 시켜서 영광회 놈들 정보를 캐냈지.”
씩 웃으며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운이 좋았다. 붙잡은 영광회 놈중에 정보를 알고 있는 놈이 섞여 있던 것뿐이니까. 내가 한 거라곤 이때를 위해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숨긴 것뿐이다.
“…그놈이 누구고, 어디에 있는데?”
순간적으로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이 정보를 가지고 정수연과 거래를 할까? 그 대가로 결혼해달라고 하면 해줄 것 같기도 한데.
‘아니다. 길게 보자.’
모든 행위가 거래로만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 머슴과 화상 통화를 했다. 화면 속에는 산 아래에 있는 어느 건물을 찍고 있었다. 주위에 아무 건물도 없었기에 굉장히 조용했다.
“여기에 있어. 영광회 놈들의 연구소 중에 하나라더라. 영광회는 여러 가지 연구를 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몬스터 인공 배양 연구를 전문적으로 한다던가? 여기 연구소장이 한철손이란 놈이야.”
“…한철손.”
정수연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알고 있는 이름이야?”
“이름은 들어본 적 있던 것 같아.”
인터넷에 한철손이란 이름을 검색했다. 바로 한철손에 대한 이름이 주르륵 떴다. 한철손 박사. 대한민국의 이름 높은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한철손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가 살기를 흘렸다.
“…그래. 그렇게 된 거구나. 이놈이 아버지를 배신하고 영광회에 붙은 거야. 아버지도 몬스터와 관련된 연구를 했던 걸로 기억해. 이놈이 아버지를 죽이고 연구 성과를 전부 가져간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나도 나름 조사했다.
“네 아버지, 정만수는 몬스터 인공 배양이 아닌 몬스터 뇌파 탐색기를 연구 중이었어. 몬스터와 인간의 뇌파가 다르다는 걸 이용한 탐색기. 영광회가 네 아버지를 죽인 건 몬스터 탐색기 연구를 막기 위해서야.”
“…그놈들의 정체가 몬스터니까?”
“그렇지. 몬스터 탐색기로 정체가 들키면 좆되니까. 자, 가서 복수하자고.”
정수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수연은 잠시 내 손을 빤히 바라봤다. 고민하고 경계한 끝에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는 도약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연구소가 있는 산골 아래로 나타났다.
[강화 도약을 사용했습니다.]
[136 포인트를 사용했습니다.]
강화 도약.
내가 이 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3가지 스킬 중 하나.
도약은 공간 이동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스킬이지만, 그 거리가 짧고 일정 수준 이상의 상대는 공간의 흐름을 느끼기에 활용하기가 힘들었다.
‘강화 도약은 포인트를 소모해 도약 거리를 늘릴 수 있지. 소모하는 포인트 1당 300m.’
이 세계에 와서 화련비도를 사용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도약도 연습했다.
그리고 포인트를 소모해 도약 대상도 추가할 수 있다. 추가하는 대상 1명당 100 포인트다. 대상과 접촉할 필요는 딱히 없고, 대상이 저항하지 않고 근처에 있으면 된다. 굳이 정수연의 손을 잡은 건 내가 그러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거리에 100 포인트를 사용하면, 거리 제한 없이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 이동할 위치가 눈에 보인다는 조건하에. 그게 영상을 통해서도 상관없다. 단, 영상이 실시간일 경우에만.
‘도약에 제한이 좀 많아.’
도약 레벨이 오르면 그 제한도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
“잠깐. 바로 여기로 왔다고?!”
“내 세 가지 능력 중 하나지. 이름하여 강화 도약. 공간이동 능력이야. 쩔지?”
“그게 문제가 아니야. 장비를 안 챙겼잖아. 집에 가서 내 장비 가져와.”
“…이게 그냥 막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거든.”
도약에 재사용 대기 시간은 딱히 없다. 마나와 체력이 충분하면 10번이고 100번이고 연속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마나와 체력 소모가 적지 않긴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포인트가 아까웠다.
나는 여길 지켜보고 있는 머슴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머슴이 달려온다. 머슴이 가지고 있던 검을 정수연에게 건넸다. 정수연은 검을 받아 들고 획획 몇 번 휘둘렀다. 이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진 능력만 여러 개잖아. 검은 없어도 되지 않나?’
본인이 쓰고 싶다는데 어쩔 수 없지.
나와 정수연은 연구소 정문으로 걸어갔다.
“…이렇게 대놓고 움직인다고?”
“어차피 들켰어. 정문 앞에 카메라가 있거든. 그리고 저 새끼들은 도망 못 가. 여기 깔려 있는 머슴이 몇 마리인데.”
“사람보고 마리라 하는 거 아니야.”
“머슴이라 부르는 건 괜찮고?”
“머슴이니까.”
나는 가끔 정수연의 머릿속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정수연은 가슴도 크고 엉덩이도 탱탱하고 예쁘니까.
연구소로 다가가는데 무장한 경비원 5명이 튀어나와 일제히 소총을 갈겼다.
정수연이 손에서 와이어 수십 가닥을 뽑아 정면에 휘둘러 회전시켰다. 와이어는 방어막이 되어 총알들을 튕겨냈다.
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썬더볼트.”
콰콰쾅!
벼락이 연속으로 떨어지며 경비원들을 단박에 쓸어버렸다. 풀무장한 경비원이라도 가디언이 아닌 일반인. 벼락을 버티지 못하고 사망했다.
“여긴 영광회의 중요 연구소 아니야? 가디언이 없는 건 그렇다 쳐도 포스 각성자가 없다는 건 이상해.”
“함정 아니니 걱정 마. 원래 가디언 3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영광회 사건 터지자마자 연구원 몇 명이랑 튀었어. 영광회랑 손절한 거지.”
참고로 그놈들의 신상 정보도 인터넷에 뿌렸다. 내 이름으로 뿌려졌으니 인류 배신자로 낙인찍히며 현상금까지 붙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어디로 가든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나는 천천히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취이이이이익.
천장에서 가스가 뿜어져 나온다. 보자마자 화련비도를 휘둘렀다. 날아간 검기가 가스 분출구를 박살 냈다.
‘독가스? 아니면 수면 가스?’
가스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지만, 이 안에는 더 많은 함정이 있을 게 분명했다.
뇌천류(雷天流) 전자기파(電磁氣波).
포스 섞인 전자파를 뿌려 연구소의 구조를 확인한다. 연구소의 숨겨져 있는 공간과 연구소에 있는 생물들의 기척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거 진짜 쓸만하네.’
전자기파의 거리는 50m에 불과하지만, 그것만으로 연구소 내부를 대부분 파악할 수 있었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함정 대부분은 벽 속에 숨어 있는 포탑 같은 거였고, 함정이 발동하기도 전에 화련비도를 휘둘러 박살 냈다.
나는 정수연이 옆방으로 들어가려 하는 걸 막았다.
“그 방엔 아무것도 없어.”
“…그때 침식 현상에서 사용한 기술이네.”
고개를 끄덕여 주고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몬스터 배양 시설이 있었다. 인큐베이터에 들어 있는 작은 몬스터들.
인큐베이터가 열리고 작은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
몬스터라고 해도 새끼.
그 어느 때보다 약해진 상태였다.
‘실험해볼게 있었는데 잘 됐군.’
나는 새끼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몬스터마다 종류가 달랐다. 그 중에는 새끼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드러내는 포악한 놈도 있었다.
“인류를 위하여 싸커 킥!”
싸커 킥 한 방에 벽과 부딫쳐 곤죽이 된 몬스터 새끼! 나는 만족스럽게 끄덕이며 몬스터 새끼들을 한곳에 모았다. 새끼들을 적당히 거리를 벌려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체인 라이트닝!”
중지 끝에서 시퍼런 번개가 새끼 몬스터들에게 뻗어나갔다. 체인 라이트닝은 가장 먼저 맞은 새끼 몬스터를 감전시킨 뒤에 그 옆으로 이동했다. 그런 식으로 7번 연쇄하다가 사라졌다.
‘으음. 마법이 아니라 진짜 체인 라이트닝에 비하면 별로군.’
몇 번 더 시도해 봤다. 결론적으로 말해 체인 라이트닝을 구현하는 건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