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7화 > 2047. 아카데미의 구원자
유리아와 엘레나가 내 옆으로 소환되었다.
청은발의 메이드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기품 있었다. 공식적으로 메이드 신분이 아님에도 그녀는 메이드복을 고집했다.
반사적으로 그녀의 복부를 확인했다. [백환] 세계에서 그녀는 홀몸이 아니다. 아이를 품고 있어야 할 배는 쏙 들어가 있었다. 뱃속의 아이는 없고 유리아만 소환된 것이다. 뱃속의 아이는 어떻게 된 걸까? 아마 [백환] 세계로 돌아가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청색 단발머리의 귀족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높은 신분 특유의 고귀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헤카테 케이프를 어깨에 걸친 그녀는 은과 반짝이는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지팡이(Cane)를 쥐고 있었다. 뭔지 몰라도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자면 평범한 지팡이는 아닐 것이다. 처음 보는 지팡이니 내가 없을 때 구한 것 같았다.
그녀들은 소환된 순간부터 상황을 파악하고 내가 아닌 사나다 켄시를 바라봤다.
나는 그녀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를 확인했다. 그녀들의 현재 스펙은 현실의 내 능력치다. 즉, 유희 생활 어플의 능력치다. 그녀들이 가진 본래 스펙에 비하면 한참 떨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특히나 신체 능력이 뛰어난 유리아에겐 갑작스러운 너프나 먹은 거나 다를 바 없었다.
‘내 기준이지만, 지금의 나와 비슷하다고 봐야겠지.’
그러니까 신체 능력으로 따지면 좀 부족했다. 그러나 같은 신체 능력이라도 그녀들의 기술과 재능은 격이 다르다.
“주인님의 적을 신속히 배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흐음. 마음에 안 드는 놈이로군.”
유리아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엘레나의 지팡이 끝이 은은히 빛난다.
“텔레포트의 전조는 느끼지 못했다만… 그리 강해 보이는 지원은 아니로군. 설마 그 정도로 날 쓰러뜨릴 수 있다고 보는 거냐?”
사나다 켄시는 오만했다. 그러나 그 오만함이 이해 갔다. 유리아와 엘레나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나와 비슷할 테니까. 놈의 입장에선 고만고만한 놈 셋이 모인 거지.
나는 인벤토리에서 공간 이동 주문서 2장을 꺼내 각각 그녀들에게 건네줬다. 그녀들은 소환되면서 내 상황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거기에 그녀들은 영민했기에 내 의도를 순식간에 파악했다.
“주인님. 저걸 빠르게 처리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내 생각도 그렇다. 너는 완전 회복도 쓰지 않았나.”
“저 새낀 나 혼자서 충분해. 그보다는 츠쿠요미가 문제지. 츠쿠요미를 상대하고 있는 애들이 죽을지도 몰라. 너희 둘이 가서 츠쿠요미를 처리해 줘.”
나는 사나다 켄시를 상대하려고 그녀들을 소환한 게 아니었다.
교토에 소환되어 강제로 하늘을 검게 물들고 달을 띄워버린 츠쿠요미. 놈인지, 년인지 모를 그것을 상대하기 위해 그녀들을 불렀다. 최악의 경우 미에코와 레이카를 따먹지 못하니까.
쯧, 하고 엘레나가 짧게 혀를 찼다.
“뻔하지. 여자 때문이군.”
어떻게 알았지.
“주인님의 뜻이라면 따르겠습니다. 저딴 것에 패배할 리도 없을 테니까요. 엘레나, 움직이죠. 설마 주인님을 못 믿으십니까?”
“솔직히 저건 좀 강하지 않나…? 물론, 유진 네가 이길 거라고 믿는다.”
그녀들이 공간 이동 주문서를 찢을 준비를 했다. 나는 서둘러 그녀들에게 말을 걸었다.
“가기 전에 버프 좀.”
유리아가 내게 강화 마법을 걸었다. 근력과 체력 등이 한순간에 강해졌다.
엘레나의 푸른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와 스며들었다. 환상으로 현실을 비틀어 내 신체 능력을 강제로 끌어올린다. 버프 효과만 보자면 엘레나의 마법이 뛰어났다. 이게 마법이라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끝나고 같이 놀자. 츠쿠요미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지?”
“눈앞에 있는 존재와 비슷한 강함을 가졌다면… 저 혼자서는 한계 돌파 없이 힘들었겠군요. 엘레나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런가? 나는 방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만. 어쩌면 한 번 죽을지도 모르겠군.”
“주인님의 명령이니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하겠습니다.”
“30일간의 현대 생활인가. 대가로 나쁘지 않군.”
찌이이이익.
그녀들은 공간 이동 주문서를 찢었다.
교토로 갈 것이다. 세계 각지의 유명한 도시의 좌표를 찍어둔 공간 이동 주문서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특히 교토는 일본에서도 유명 관광지라 자주 드리는 곳이니까.
“기껏 불렀는데 보낸다라…. 너는 왜 도망치지 않았지?”
“네놈을 죽일 자신이 있으니까. 나는 네가 공격하지 않고 기다려 준 게 의외다.”
“보고 있자니 재밌어서 말이다. 교토의 츠쿠요미를 둘이서 노린다라…. 츠쿠요미는 아주 성가신 종류의 힘을 다루지. 그 둘은 처참하게 농락당해 죽을 거다. ”
“내 생각과는 정반대군.”
어느새 1분이 지났다. 천심의 효과가 사라진다. 이글거리는 불꽃이 내 몸에 달라붙으려고 한다.
가볍게 몸을 털었다. 지금 내 능력치는 S급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이딴 저주 따윈 거슬리는 것도 뭣도 아니다.
“스톰 브레이커.”
스톰 브레이커를 소환한다. 마키나가 역소환되었어도 스톰 브레이커 자체는 멀쩡했다. 그리 쉽게 부서지는 물건도 아니다. 거창의 형태로 소환된 스톰 브레이커는 잘게 부서져 내 몸에 달라붙어 갑옷이 되었다.
‘열기 때문에 좆 같았는데 스톰 브레이커를 입으니 살 것 같군. 다음 준비는….’
[사용 가능 포인트: 11,704]
포인트를 안 쓰고 모아놓길 잘했다.
‘우선 내 공격이 얼마나 먹히나 확인해 볼까.’
[가속을 사용합니다. 10분 동안 유지됩니다. 남은 스택: 7]
뇌천류(雷天流) 질풍신뢰(疾風迅雷).
뇌천류(雷天流) 비뢰신(飛雷神).
한순간에 거리를 좁히고 화련비도를 휘두른다. 사나다 켄시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불타는 칼로 화련비도를 쳐냈다.
‘이 속도를 따라온다고?’
더 빠르게.
붉은 번개를 머금은 칼날은 한층 더 가속하며 그 잔상을 허공에 남겼다.
뇌천류(雷天流) 뇌광(雷光).
사나다 켄시는 칼을 세워 뇌광을 막아냈다. 붉은 번개와 불꽃이 뒤섞이더니 상쇄되어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음속을 뛰어넘은 일격일 텐데도 그 태도는 여유롭기 그지없다.
“대단하군. 그 나이에 달인급의 검술이라…. 내가 네 나이 때는 달인의 경지에도 오르지 못했거늘. 부러운 재능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사나다 켄시. 순수 검술만 따졌을 때 현 일본 최강이라 불리는 인간이 내 재능이 부럽단다.
“평생 부러워해라.”
그 인식을 바로 잡아줄 필요는 없겠지.
나는 계속해서 칼을 휘둘렀다.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계속 울린다. 내 칼은 사나다 켄시의 옷자락 하나 벨 수 없었다. 반면에 놈의 불타는 칼은 내 갑옷을 긁는다. 스톰 브레이커가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뇌광(雷光), 뇌사(雷蛇), 벽계(碧溪), 패월(蔽月), 비뢰신(飛雷神).
모든 검격이 놈에게 막힌다. 유효한 일격이 하나도 없다.
“어떻게 내 공격을 전부 받아칠 수 있는 거지?”
“칼은 결국 선이고, 선은 팔에서 시작되지. 내 스승은 칼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했다. 허나 인간이 휘두르는 칼에 자유가 있을 리 없지.”
“내 검술이 다 보인다는 말을 어렵게도 하는군.”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6]
찰나를 통한 갑작스러운 최속의 일격.
사나다 켄시는 아무렇지 않게 찰나의 속도를 따라온다. 그것만으로 놈이 어마어마한 실력의 검사라는 걸 알 수 있다. 찰나의 속도를 따라 오는 건 고수라면 쉽게 해내니까.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5]
칼의 궤도를 억지로 비틀었다. 내 칼을 막으려 드는 놈의 칼을 피해 심장을 노린다.
‘걸렸다.’
캉!
화련비도가 튕겨 나갔다. 오른쪽으로 움직여야 할 칼이 아래로 내려와 화련비도를 쳐낸 것이다.
“너만 잔재주를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
[시간 가속을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0]
시간의 속도를 높이고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단지 놈을 베어 죽이기 위해 무아지경으로 칼을 휘둘렀다. 어느새 몸에 익은 뇌천류의 검술을 마음 가는 대로 휘두른다.
통하지 않았다.
결과는 녹아내린 스톰 브레이커와 절반도 남지 않은 마나.
시간 가속이 끝나자마자 놈과 거리를 벌린 나는 차오르는 숨을 길게 내쉬며 놈을 노려봤다.
“…날 가지고 노는 거냐?”
“네 검술은 훌륭했다. 원래는 단번에 죽여버릴 생각이었는데… 오랜만의 칼싸움에 흥이 나버렸군.”
“사실 네놈을 가지고 논 건 나다. 칼 솜씨가 제법이더군.”
사나다 켄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 끝까지 웃긴 놈이로군. 그렇다고 네놈을 살려주리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태양의 화신이 빛난다.
사나다 켄신의 칼에 불꽃이 압축되어 그 격을 강제로 높인다. 피부를 녹여버릴 듯한 열기가 나를 덮쳐온다.
내 눈앞에 있는 적은 태양이다.
내가 이기려면 전력을 다해야 했다. 놈에게 통하는 힘을 사용해야 했다.
뇌천류, 뇌전, 정령.
내가 가진 힘들 중에서 놈에게 통하는 건 없었다. 허나 위에 있는 3개는 내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건 뇌천류도, 뇌전도, 정령도 아닌 유희 생활 어플이다.
[1,000 포인트를 사용해 오리지널을 구매합니다.]
[오리지널
유희 세계의 물건 중 하나에 사용하면 다른 세계에 가져가도 효과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가격: 1,000 포인트
※주의
평범한 물건에 사용하면 후회하게 될 겁니다.]
오리지널을 사용할 물건은 [신의 아틀란티스]에서 얻은 화살.
「열 번째의 낙일시(落日矢)
태양을 활로 쏘아 떨어뜨린 예의 열 번째의 화살이다.
태양의 성질을 가진 적에게 압도적인 힘을 발휘한다.
랭크: SS」
나는 낄낄 웃으며 화살을 손에 쥐었다. 화살이라 해서 꼭 활로 쏠 필요는 없다. 손에 쥐고 휘두르는 것으로도 충분히 흉기가 된다.
“…!!”
사나다 켄시는 화살을 보자마자 여유를 지우고 불타는 칼을 들어 경계했다.
“섬뜩하군. 대체 뭐냐, 그 빌어먹을 화살은?!”
“크크. 보면 모르냐? 네놈을 죽일 화살이다!”
혀를 내밀어 낙일시의 화살촉을 할짝 핥았다. 철 특유의 비린 맛이 나서 후회했다.
“미친놈. 그런 물건을 잘도 여기까지 숨기고 있었군. 근데 활은 어디에 있지? 설마 화살을 단검처럼 휘두를 셈인가?”
“당연히… 특공이다!!!”
나는 사나다 켄시에게 달려들었다.
보법이고 뭐고 없었다.
그냥 무대포로 달려들었다. 달려가서 놈의 목에 화살을 찔러 넣을 생각뿐이었다.
“크크크크! 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