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5화 > 2055. 아카데미의 구원자
문화제 3일째.
마지막 세 번째 교류전이 있는 날이었기에 마음대로 놀러 다닐 수 없었다.
‘귀찮네.’
아카데미 학생의 수준은 대부분 다 거기서 거기다. 교류전에 내가 나가는 건 양들이 모여 노는데 늑대가 끼어드는 거나 다를 바 없다.
그나마 상대가 되는 건 아라시 아카데미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효도 유우키지만… 그것도 옛말이다. 아무리 효도 유우키라도 지금의 날 감당할 수 없다.
『이름: 성유진
근력: A 체력: A 민첩: A+ 내구: A 마나: S-
특성: 정령안(S) 악마 사냥꾼(S) 폭풍의 신(A)
스킬: 정령계약(A+) 정령강령(A) 역장(C+) 검술(A-)
카르마: 선(善) 120』
지금 내 능력치다. 신체 능력은 영약 등으로 한계까지 높아졌다. 신체 능력만 따져도 A급 히어로 평균 이상이다. 그런데 여기에 내 경험과 기술까지 더해진다?
까놓고 말해 웬만한 A급 히어로와 싸워서 질 자신이 없다. 조금 이질적인 능력을 가진 A급 히어로나 특별한 아이템을 가진 자들을 제외하고.
‘아카데미 교류전은 학생들만 나갈 수 있고 아이템이 제한되지. 내가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어.’
내 상대가 될 건 효도 유우키가 확실하고, 효도 유우키와 싸워서 얻을 것이 있을까?
없다. 반대로 효도 유우키는 나라는 강자랑 싸우니 나름의 경험을 얻겠지.
텁.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유진아. 도망갈 생각은 아니지?”
성하리가 웃으며 물었다. 그녀는 오늘 오전부터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도망칠까 봐. 최근에 땡땡이를 너무 많이 쳐서 신용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마테라스 건도 있었고.
“당연히 안 도망치지.”
첫 번째와 두 번째 교류전에 참가하지 않았었다. 같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나올 것이다. 내 평판이 걸려있는 만큼 세 번째 교류전만큼은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
“교류전이 열릴 때까지 문화제나 둘러볼까.”
교류전은 오후에 열린다. 그전까지는 한가하다는 말이었다. 성하리와 엘레나, 유리아들과 함께 문화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아라시 아카데미는 일본답게 동아리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상식적인 동아리도 많았지만, 상식적이지 않은 동아리도 많았다. 이상한 동아리의 대표적으로 야끼소바를 숭배하는 동아리가 있었다. 대체 왜 야끼소바를 숭배하는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보지를 숭배하던가.’
우리는 사진 촬영 동아리를 찾았다. 사진 기사가 열과 성을 다해 화보처럼 촬영해 주기도 하고, 스티커 사진 기계를 이용할 수 있는 곳도 있었다. 우리는 가볍게 스티커 사진을 찍기로 했다.
“으윽.”
엘레나가 갑자기 머리를 잡고 비틀거렸다. 아까부터 말이 없었던 그녀는 내가 준 스마트폰을 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왜 그래? 게임이라도 하는 거야?”
“파란색이다…. 파란색이… 내 차트를 점령하고 있다!”
옆으로 가니 수직 낙하 중인 주식 차트가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르고 있었는데 오늘 갑자기 떡락하고 있었다.
“벌써 10%가 날아갔다. 2억…. 2억 원이 날아갔어….”
“……20억을 주식에 박았다고? 그럴 돈은 어디에 있었고?”
“가지고 있던 금화를 전부 처분했다. 발데르트 가문과는 관계없는, 내 용돈으로 쓰던 돈이다. 몇 달을 꼬박 모은 용돈이었다고 할까. 그 용돈의 10%가 날아갔다.”
“투자 종목은… 하이프로그? 뭐 하는 회사야.”
엘레나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며 성하리를 노려봤다.
“요즘 잘 나간다는 벤처 기업이다. 성하리의 말을 믿고 투자했지. 결과는 보시다시피 이렇다. 24시간도 안 지났는데 2억이 증발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조작이. 조작이 있다.”
“아니, 그렇게 말해도 나도 500만 정도 잃었거든? 원래 주식이란 이런 거야. 겨우 존버라는 말 모르니? 좀 기다려 봐. 분명 반등할 거니까. 이 회사는 정부가 밀어주고 있는 회사라고. 망할 리가 없어.”
흥분한 성하리가 말을 쏟아냈다.
씀씀이가 큰 그녀가 요새 잠잠한 것 같긴 했는데 설마 주식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녀는 S급 히어로이니 주식 관련 정보도 얻기 쉬웠을 것이다.
“네년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전문가처럼 말하기에 믿었거늘…. 저번에 한 주식도 망했다고 했었나? 넌 주식에서 손을 떼라.”
“윽. 나라고 망하기만 하는 건 아니야. 지난달에는 3,000만 원 수익을 얻은 걸 보여줬잖아. 주식은 존버야.”
“집이 불타고 있는데 존버 소리하고 자빠졌군.”
성하리와 엘레나가 서로를 쏘아봤다.
그 모습을 보다가 주식이 궁금해졌다.
‘적당한 항목에 투자하면 되나? 막상 하려니 귀찮네.’
생각해 보니 주식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돈이야 이미 넘쳐난다. 정말로 돈이 필요하다면 다른 세계에서 금과 보석들을 가져와 팔면 됐다. 정 급하다면 범죄 조직이나 은행을 털고.
‘은행을 털면 되는데 주식을 왜 해.’
소리 높여 싸우는 그녀들과 달리 유리아는 조용했다.
“유리아는 주식 안 해?”
“할 필요는 못 느꼈던지라…. 주인님이 명령하신다면 한 번 해보겠습니다. 주식에 관해선 어느 정도 공부했습니다.”
“주식을 공부했다고? 백환에는 주식이 없잖아.”
“메이드 아카데미에서 주식에 관해 알려주더군요. 정확히는 재산을 관리하는 방법 중에 주식이 있었습니다.”
“메이드 아카데미…. 거긴 도대체 뭐 하는 곳이야?”
“모든 걸 배우는 곳입니다. 물론 정말로 모든 걸 배우는 건 아닙니다만,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과목이 몇 개 있습니다. 행정과 전투가 그렇지요.”
이전에도 느낀 거지만 메이드 아카데미는 초인 양성소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네오 런던에서 자격증을 가진 메이드를 최고급 인력으로 인정하는 거겠지만.
나는 아직까지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 엘레나와 성하리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엄지로 등 뒤의 스티커 사진 스튜디오를 가리키며 유리아에게 물었다.
“먼저 가서 찍을까?”
“네!”
유리아가 자연스레 내 팔에 팔짱을 꼈다.
“그 교복 굉장히 잘 어울려.”
“그런가요? 조금 걱정했었는데 다행이네요.”
스튜디오에는 선글라스, 동물 머리띠, 공주 드레스 등 코스프레 용품들이 있었다.
“포즈부터 정해야 하나?”
“저기 벽에 붙어 있는 사진을 참고하면 어떨까요?”
포스터에는 커플 사진의 예시를 보여주듯 남녀가 포즈를 잡고 찍은 사진이 있었다. 뽀뽀를 하고 손가락 하트에 V까지. 알콩달콩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커플 사진이었다.
“…안 될까요?”
“안 될 것 없지.”
이미 물고 빨고 다 한 사이가 아닌가. 이런 것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사진기 앞에 선 우리는 리허설 겸 포즈를 잡아봤다. 유리아는 시종일관 미소를 띄었다. 그녀의 뺨은 복숭아색으로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전문적으로 찍는 것도 아니었기에 바로 실전을 시작했다. 최신 기기라 그런지 카드 결제가 가능했기에 거칠 것도 없었다. 기계를 설정하다 보니 커플 포즈 모드가 있었다. 기계에서 커플 포즈를 알려주는 거였다.
-촬영을 시작합니다.
우선은 가볍게 손하트.
나는 왼손으로 하트 반쪽을, 유리아가 오른손으로 하트 반쪽을 만들어 합쳤다. 서로의 어깨가 닿는 건 당연했다. 웃는 얼굴은 잊지 않았다. 이런 사진에서는 웃어야 보기 좋은 법이니까.
-3. 2. 1. 찰칵.
다음 포즈는 뺨을 맞대고 팔 전체를 이용해 하트를 만드는 포즈.
-3. 2. 1. 찰칵.
윙크하며 V 하는 포즈.
-3. 2. 1. 찰칵.
서로를 꽉 끌어안는 포즈, 윙크하며 손가락 하트 포즈, 유리아가 내 얼굴에 뽀뽀하는 포즈, 백허그 포즈, 일부러 화난 표정을 짓는 포즈 등 온갖 포즈를 찍다가 마지막까지 왔다. 마지막은 딱히 정해진 게 없는 자유였다.
무슨 포즈를 취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유리아가 달려들어 내 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입을 맞춰온다.
-3. 2. 1. 찰칵.
끝나고 유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붉어진 얼굴의 유리아가 행복하게 웃었다.
곧 기계에서 스티커 사진이 나왔다. 나와 유리아는 하나씩 나눠 가졌다. 유리아는 스티커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웃었다.
철컥!
갑자기 문이 열리고 엘레나와 성하리가 들이닥쳤다. 팔짱을 낀 그녀들은 매섭게 나와 유리아를 노려봤다.
“아까부터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만… 둘이서 아주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져 있더군? 들이닥치고 싶었던 걸 억지로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둘이서만 몰래 들어가서 찍는 건 그렇지 않니?”
유리아는 그녀들을 힐끗 보고는 표정을 관리했다.
“말이 너무 심하시군요. 두 분께서 너무 즐겁게 주식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지라 먼저 움직였을 뿐입니다. 시간을 땅에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저라면 그걸 따질 시간에 다음 순서를 정하겠습니다.”
“…다음 순서. 그렇군. 짬밥으로 보나 나로군.”
“잠깐. 무슨 소리야? 나도 유진이랑 사진 찍고 싶어. 난 유진이의 엄마야.”
“되도 않는 소리를 하는군. 엄마라고 말한 주제에 사진은 커플 포즈로 찍겠지.”
“윽…. 딱히 상관없잖아.”
내버려 두면 서로 싸우며 3분 이상을 잡아먹겠지. 중재자가 필요했다. 나는 끼어들어 그녀들에게 말했다.
“가위바위보로 정해.”
눈빛을 교환한 그녀들은 바로 오른손을 들었다.
“가위바위보.”
엘레나가 가위. 성하리가 보.
엘레나가 씩 웃으며 망연자실한 성하리와 유리아의 등을 떠밀어 내보냈다.
“나가서 대기하도록.”
“자, 잠깐 방금 뭔가 이상했던 것 같은….”
쾅.
문은 닫혔다.
나는 카드로 결제하면서 엘레나에게 물었다.
“환술 쓴 거야?”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들켰나. 수명 10년을 사용해 가능성을 살짝 건드렸다. 익숙하지 않은 사용 방식이다 보니 수명이 지나치게 깎였다.”
“그런 것도 가능해?”
“환접술을 사용하면 대부분의 일을 할 수 있다.”
“죽은 자는 못 살리잖아.”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다르다. 죽은 지 오래되었다면 불가능하지만…. 단순히 칼에 찔려 죽었다면 수명 몇 년을 대가로 살릴 수 있을 테지.”
커플 모드를 선택하고 제시하는 대로 포즈를 정했다. 이제보니 기본적인 포즈는 랜덤으로 정해지는 것 같았다.
-3, 2, 1 찰칵.
여러 사진을 찍었다. 유리아랑 찍었던 포즈도 있었고, 처음 보는 포즈도 있었다.
마지막은 역시 자유 포즈다.
꽉.
엘레나는 내 멱살을 쥐고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야성적인 키스였다. 내 입술을 살짝 깨무니 더욱더.
출력된 스티커 사진을 본 엘레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구나. 액자에 걸어두기에는 조금 민망하니 혼자서 간직해야겠군.”
다음으로 성하리가 들어왔다. 성하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커플 모드를 사용했다. 나는 성하리에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얼굴은 귓불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으니까.
-3, 2, 1. 찰칵.
마지막 자유 사진에서 성하리는 소녀처럼 두 눈을 감고 턱을 치켜 올랐다. 그 행동의 의미는 명확했다.
‘키스 안 하면 한참 삐지겠지.’
장난기는 참기로 하고 그녀의 입에 입을 맞췄다.
-3, 2, 1. 찰칵.
성하리도 스티커 사진을 보며 만족스러워했다.
우리는 바로 떠나지 않고 모처럼이니 넷이서 사진을 찍기로 했다. 이전의 진지함은 없었다. 친구들끼리 사진 찍는 기분이었다.
“아니, 잠깐. 유리아. 그 자리는 내 자리다만?”
“주인님의 오른편은 제 자리입니다.”
“너희 좀 떨어져 줄래? 엄마로서 유진이랑 찍고 싶거든.”
“돌아가면서 찍어.”
-3, 2, 1, 찰칵.
“찍었으니 비키라고.”
“유진아, 엄마랑 손잡자.”
“……머리는 당기지 말아주시죠?”
엘레나의 손이 유리아의 은발을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3, 2, 1, 찰칵.
“유진아, 안 돼! 가슴 만지지 마!”
“주인님 제 가슴은 얼마든지 만져도 됩니다. 아니, 만져주셨으면 합니다.”
성하리와 유리아가 양옆에 있기에 어깨에 팔을 두르고 각각 가슴을 움켜쥐었다. 엘레나는 아쉽게도 뒤로 밀려난 상태였다.
“이 미친년들이 고릴라처럼 힘만 좋아서는…. 유리아. 넌 나랑 같은 신체 능력이 아니었나?”
“힘은 쓰기 나름입니다.”
“에잇.”
엘레나가 뒤로 다가와 점프해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목덜미를 통해 그녀의 가슴 감촉이 느껴진다. 여기가 천국이었다.
-3, 2, 1, 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