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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2059화 (1,839/2,000)

< 2059화 > 2059. 아카데미의 구원자

“인어로 정했다.”

물의 최상급 정령인 인어의 외모는 내 기준으로 봤을 때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이었다. 하반신이 물고기라 보지가 없다는 점이 큰 감점 요인이다. 그래도 젖탱이에는 볼륨이 있는 편이라 나름 괜찮았다.

그리고 다른 정령들의 외모는 죄다 인간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

인어를 비롯한 물의 정령들이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획 돌려 유리아를 바라본다. 그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뭘 원하시나요?”

“연주를 또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친구 하자, 친구!”

“목마르지 않아?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물을 줄게!”

“바다 깊숙한 곳, 보물이 있는 곳을 알아. 인간들은 반짝이는 걸 좋아하지? 가져와 줄까?”

자발적으로 유리아의 노예가 되기를 원하는 물의 정령들을 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나처럼 뛰어난 정령 친화력을 가지고 있어도 저렇게 호의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데 유리아에게 저렇게까지 나올 줄이야.

물론 유리아도 정령 쵠화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천재인 그녀에겐 정령사의 재능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건 다른 종류로 타고나는 것이다 보니 일반인들보다 뛰어난 수준에 불과하다.

“당신은 이름이 뭔가요?”

유리아가 인어에게 물었다. 인어는 기뻐하며 대답했다.

“저 말인가요? 저는 데일리아. 이 근처 바다를 지배하고 있어요, 바다의 보물을 원하시나요?”

“제 주인님과 계약해 주십시오.”

정령안을 발동했다. 황금색 눈동자로 정령사로서의 재능을 어필한다.

“…저 남자랑요? 확실히 친숙한 기분이 드네요. 하지만 너무 뜨거운 느낌이 들어서 좀…. 계약하기 싫어요. 저는 약간이지만 앞날을 느낄 수 있는데… 남자와 계약하면 기분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아요.”

인어가 몸서리치며 거부했다.

물고기 따위가 나를 거부하다니. 기분이 확 나빠져 얼굴을 구겼다. 옆에서 엘레나가 낄낄 웃었다.

“나도 너 필요 없어. 꺼져.”

“들으셨습니까? 주인님께서 당신은 필요 없다고 하시는군요. 꺼지십시오.”

“어? 보, 보물을 원하지 않으시나요?!”

“꺼지십시오.”

“흐아아아아아앙!”

인어는 울면서 바다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다가 약간 후회했다. 뒤늦게 정령옥을 사용해 희유할 방법을 떠올랐으니까.

‘아니지. 저것에겐 안 통했으려나.’

아쉬움을 털어냈다. 어차피 보지도 없는 반 물고기 년이 아닌가. 다른 2명의 물의 최상급 정령 중 하나 데려가기로 했다.

정령옥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유리아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단번에 내게 향한다. 특히 하급 이하의 정령들이 이끌리듯 슬금슬금 다가왔다.

“자연이… 자연의 힘이 느껴져.”

“저거만 있으면….”

“뭐든 할게! 뭐든 할 테니 그거 나 줘!”

마나를 움직였다. 바람과 함께 푸른 전격이 일어나 주변을 휩쓸었다. 하급 정령들은 그것만으로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정령은 기본적으로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지만… 정령의 힘이 담기거나, 자연에 가까운 힘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금 같은 경우는 둘 다 해당된다.

“약해빠진 너희는 필요 없으니 전부 꺼져라.”

몇 번 더 위협하자 하급 정령들이 겁에 질려 사라졌다. 남은 것은 중급 이상의 물의 정령들. 절반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중급 정령은 있으나 마나고 상급 정령들은 눈여겨 봐둔다. 남은 최상급 정령과 계역하지 못하면 상급 정령이라도 계약해야 하니.

돌고래와 소용돌이 공에게 다가갔다. 최상급 정령들도 정령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와 계약하면 이걸 줄게. 누가 나와 계약할래?”

먼저 반응한 것은 돌고래였다. 돌고래는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고는 외쳤다.

“건방진 인간 놈. 겨우 그깟 걸로 감히 나와 계약하려고 해? 그 10배를 내준다면 생각이라도 해보마!”

‘이놈은 안 되겠군.’

하급 이하의 정령들은 힘은 약하지만, 지능이 별로 높지 않아서 다루기 쉽다. 반대로 중급 이상은 지능이 높고 자신의 힘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상급 이상만 되어도 옛날에는 토지신이라 불리며 인간들에게 숭배받았다. 수명의 한계도 없으니 대부분이 인간을 낮잡아 본다. 최상급 정령 쯤 되면 인간 기준으로 성격이 안 좋다.

‘보통 정령사들은 어떻게 구슬려 보려 하겠지. 계약의 우위성을 포기하더라도 최상급 정령의 강력한 힘은 매력적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정령 따위가 내 상전 노릇을 한다? 절대 안 되지.

“넌 탈락이다.”

“예의를 갖춰라 인간 놈아. 너 따위는 내가 힘을 쓰면 여기 일대와 통째로.”

푹.

유리아의 단검이 돌고래의 등을 찌른다. 단검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뇌전이 돌고래의 몸체를 서서히 갉아 먹는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가 묻고 싶은 질문이군요. 주인님께 그딴 망언을 남발하고서도 제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습니까?”

“이이이익! 인간답지 않은 연주 실력을 갖췄기에 대우해 줬더니! 감히!!”

돌고래가 분개하며 힘을 끌어올렸다. 잔잔하던 바다에서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촤르르르륵.

그림자 속에서 검은 사슬이 튀어나와 돌고래를 구속했다. 유리아는 단검을 들고 최상급 정령의 영체를 난도질했다.

“그마아아안! 아파! 아아아악!”

나는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봤다.

검은 번개.

저게 정령력을 억제하고 있다. 돌고래에겐 처음 기습당한 순간부터 치명적이었겠지. 이어서 그림자 사슬이 정령의 힘을 억제하고 단검을 휘둘러 맥을 끊는다.

‘단검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게 아니야. 유리아는 내가 보지 못하는, 느끼지 못하는 걸 느끼는 건가?’

이윽고 돌고래는 끔찍한 비명을 남기고 소멸했다.

중급 물의 정령들이 겁에 질려 도망쳤다. 상급 정령들은 유리아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남은 최상급 정령인 소용돌이치는 공의 소용돌이가 빨라졌다. 유리아를 경계하는 것처럼.

나는 소용돌이치는 공에게 다가갔다.

“계약할래?”

“그, 너, 너는 너무 뜨거워서 우리랑은 맞지 않아. 이미 강대한 존재가 너를 비호하고 있잖아. 너무 강력한 존재들과 계약하는 게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야.”

물의 정령들이 나를 꺼리는 건 인페라 때문인 듯했다. 물과 불은 상극이듯 정령들도 본능적으로 서로를 꺼리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던 거라 놀라울 것도 없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그런 말도 들었던 것 같긴 해. 강대한 존재와의 계약은 강대한 존재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했던가.”

“네 말대로야! 그러니까 계약은 신중히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그래. 네 충고를 받아들여서 신중히 결정하지. 나랑 계약해라.”

정령옥을 내밀며 성큼 다가갔다. 유리아가 소용돌이치는 공의 뒤를 점했다. 엘레나는 옆으로 움직여 압박했다.

“내, 내가 만만해 보여?”

“넌 우리가 만만해 보이고?”

소용돌이치는 공이 본격적으로 힘을 사용하려는 순간 바로 움직일 것이다. 아무리 최상급 정령이라도 자신의 영지가 아닌 곳에서는 제한이 붙을 수밖에 없다.

“계약할 거야? 안 할 거야?”

“하, 할게.”

정령이라고 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계약의 대가로 정령옥을 주마. 내 말을 잘 들으면 가끔 정령옥을 추가로 주지. 너는 내가 부르면 언제든지 와야 한다. 안 오면 계약 위반으로 타격을 받을 거다. 어느 정도의 타격을 받을지는 내 알 바 아니고…. 나 이외의 다른 인간과 계약하지 마라. 인간과 계약해 본 적 있나?”

“계약은 이번이 처음이야. 다른 인간과 계약하려고 했는데… 인간들이 못 버텼어.”

“못 버텼다라.”

같은 등급의 정령이라고 하더라도 객체마다 힘이 다르다. 소용돌이치는 공이 다른 정령들보다 특출나게 힘이 강할지도 모른다.

나는 계약을 앞두고 긴장했다.

‘아레스트와 계약했을 때와는 다르다. 아레스트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나와 계약했으니까. 반면 이놈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있어.’

반동이 올 수 있었다.

천천히 소용돌이치는 공을 향해 정령옥을 내밀었다. 소용돌이치는 공은 느릿하게 정령옥을 받아들였다. 내 손아귀의 정령옥이 떠오르더니 소용돌이치는 공의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공이 흠칫 놀라더니 외쳤다.

“맛있다!”

계약이 진행되었다.

소용돌이치는 공으로부터 패스가 뻗어 나와 내게 연결된다. 반동. 즉, 반발을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의외로 반발은 전혀 없었다.

대신 이미지가 그려졌다.

하얀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수면. 나는 알몸으로 수면 위에 서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곳이었다. 느껴지는 것이라곤 발바닥에 닿는 물의 감촉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투명하다고 생각했던 물은 점점 아래로 내려갈수록 어두웠다. 그리고 그 안에 소용돌이가 있었다. 거세게 회전하는 그것은 하나의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그 거대한 존재가 나를 인식한다.

소용돌이치는 공이 왜 인간들과의 계약에 실패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이건 아레스트나 인페라보다 더 강할지 모른다.

피식 웃었다.

“내가 너의 주인이다. 눈 깔아라.”

그것의 이름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테라.”

이미지가 깨졌다.

내 앞에는 소용돌이치는 공, 테라가 허공에 떠 있었다.

“서, 성공했어!”

테라가 외쳤다. 묘하게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쩐지 여자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정령에게 성별은 아무 의미 없지만.

나도 기분이 좋았다. 물, 바람, 불. 최상급 정령 셋을 계약했다. 천둥부엉이인 모카는 상급 정령이다. 마키나는 논외로 치더라도 이 정도면 대정령사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정령술은 못 쓰지만.

“시작이 좋아. 나머지는 꺼져라.”

테라는 고분고분했다. 내 의념대로 힘을 살짝 일으켜 다른 물의 정령들을 위협했다. 물의 정령들이 기겁하며 사라졌다. 좀 얼빵해 보여도 테라는 최상급 정령이었다.

목적을 달성했기에 바로 다음 계획을 위해 움직였다.

찌이이익!

공간 이동 주문서를 사용해 평안도에 있는 어느 호수로 이동했다. 달빛을 반짝이는 호수는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테라를 소환했다. 물로 이루어진 소용돌이치는 공이 허공에 나타났다. 눈도 입도 없었으나 신기하다는 듯이 주위를 천천히 날아다닌다.

“여긴 어디야? 이상한 힘이 느껴져.”

“다 둘러봤지? 그럼 이제 호수를 뒤집어라.”

“응?”

원작 [아카데미의 구원자]에서는 서브 퀘스트를 통해 올 수 있는 곳이었다. 원래는 이런저런 아이템이나, 의식 등의 조건을 충족해야하지만 너무 귀찮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 물의 최상급 정령의 힘을 사용하기로 계약했다.

“호수 안에 특이한 구조의 건축물이 있을 거다. 호수의 물들을 모조리 뒤집어서 그걸 끄집어내라. 이런저런 기믹이 있겠지만 어떻게든 해서 끄집어내라.”

“…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하라면 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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