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0화 > 2060. 아카데미의 구원자
호수 전체가 소용돌이쳤다. 물이 강력하게 회전하며 내부에 있던 수중 생물들이 학살되었다. 관심 밖의 일이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물고기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힘을 사용하는 물의 최상급 정령인 테라도 마찬가지다.
소용돌이는 이윽고 폭발하듯 호수를 뒤집었다. 하늘로 치솟은 호수는 비가 되어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호수 속에 있던 건물이 올라온다. 얼핏 보면 신전처럼 생긴 그것은 상당히 낡아 굉장히 위태로워 보였다.
테라는 호수의 물들을 지하로 보내 다시 솟구치게 만들어 건물을 떠받혔다. 신전이 점점 위로 떠 오르더니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검보라색 빛이 입구에 모이더니 게이트를 형성한 것이다.
‘역시 밖에 나오는 순간부터 활성화되는군. 이건 예측대로라 다행이야.’
다음 문제는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 테라는 내 마나를 사용해 호수를 뒤집고 건물을 위로 떠 올리고 있었다. 유지하기 위해선 지속해서 마나를 공급해 줘야 한다.
‘당연히 이것도 계획을 세웠을 때부터 예측했던 바다.’
인벤토리에서 마나 큐브를 꺼내 신전을 향해 던졌다. 내 의념을 읽은 테라가 신전 위로 나타나 마나 큐브를 자기 몸에 넣었다. 마나 큐브는 테라의 몸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며 가동했다. 영구 동력인 마나 큐브에서 마나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어때? 마나 큐브의 출력으로 유지할 수 있겠어?”
“이 정도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근데 오래 하면 너무 심심할 것 같아.”
“오래 안 걸리니 조금만 수고해라.”
“알겠어.”
나와 유리아, 엘레나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이 던전 게이트 안에 뭐가 있을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
성유진 일행이 던전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고 3분 뒤, 2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가 걸어왔다. 그들은 주변을 둘러봤다. 신전 위에 있는 물의 최상급 정령을 확인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물의 최상급 정령이 있군. 다행히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군.”
“저것에겐 우리가 멧돼지나 사슴처럼 짐승이나 다를 바 없게 느껴지겠지. 우리가 먼저 적대하지 않는다면 공격하지 않을 거다. 계약자가 있을 텐데…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은 모양이군. 멍청한 건지. 아니면 오만한 건지.”
“오만한 거겠지. 최상급 물의 정령의 계약자이니 뭐가 무섭겠어. 이제 슬슬 말해주지 않을래? 왜 여기로 모이라고 한 거야?”
중간에 있는 남자는 던전 게이트를 쳐다봤다. 물에 젖은 발자국이 보였다. 저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간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 대계를 진행한 건 너희도 알 것이다.”
“듣기는 했지. 실패했다며?”
“귀모(鬼母)께서는 성공을 예지하셨다. 알파는 모든 음한 것들의 신이 되어 일본의 절반을 귀신의 땅으로 만들 예정이었다. 귀모께서 직접 확언하셨지.”
“…귀모께서 예지하신 일이었다고?”
그들은 놀랐다. 귀모. 위대한 귀락곡주 아래에 있는 4명의 문주 중 한 명. 방대한 귀락곡의 세력 하나를 담당하는 존재라 할 수 있었다. 귀모는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자. 그녀가 예지한 미래 중에서 틀린 건 없었다. 그랬어야 했다.
“예지가 빗나갔다. 귀모께서 이해할 수 없는 변수가 일어난 것이다.”
“…믿기진 않지만, 귀모께서도 실수하실 수 있는 거지.”
“다른 불안정한 예지와 달리 이번 예지는 확실했었다. 귀모께서도 반드시 성공한다고 장담하셨지. 그러나 실패했다. 귀모께서는 이 세계에 존재해선 안 되는 변수가 나타났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이곳으로 보내셨다.”
“변수 차단을 위해? 저 안에 뭐가 있는데?”
“알 수 없다. 귀모께서는 이상하게 한국 쪽을 예지하지 못하신다. 한국에 운명의 중심이 있다 하시던데… 잘 모르겠군. 어쨌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변수를 확인하고 배제한다. 그것이 첫 번째 목표다.”
“두 번째 목표도 있는 거야?”
“변수를 처리할 수 없다 판단이 섰을 때, 돌아가서 변수의 정보를 귀모께 알린다.”
“정치 공작 같은 건 안 해도 되는 거지? 편하네.”
각각 다른 곳에서 온 그들은 임무를 확인하고 던전 게이트를 향해 다가갔다. 두려움 따윈 없었고, 실패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임무 성공률 95%에 육박하는 정예 중 정예니까.
쑤우우우욱.
그들이 던전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테라는 신전 위에서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봤다. 그들을 막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막으라는 명령이 없었으니까.
***
눈앞에 성하리가 나타났다. 그 얼굴은 성하리의 것이 분명하지만, 머리카락은 하얗고 눈동자는 피를 머금은 것처럼 붉었다.
성하리가 아니라 영하리다. 아니, 이제는 바알이라 불리는 존재다.
그녀가 미소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빤히 보다가 화련비도를 소환해 그녀에게 휘둘렀다. 몸이 베인 그녀는 충격받은 표정을 짓고서는 잿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가짜란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앞뒤 맥락도 없이 영하리가 갑자기 나타날 리 없잖아.’
『당신은 거짓을 간파했습니다.』
내가 들어온 이 던전은 고대 악마 던전이라고 불린다.
원작 게임에서는 다섯 종류의 고대 악마 중 하나가 랜덤으로 걸린다. 다섯 마리의 악마들은 제각각 그 특성이 달랐다.
‘개인적으로 천벌의 악마가 나오기를 원했는데.’
천벌의 악마를 죽이면 강력한 천벌의 권능을 얻을 수 있으니까.
‘하필이면 성가신 진실의 악마가 나왔어.’
앞으로 나아갔다.
검은색 웨이브 진 머리에 가슴 풍만한 여인이 나타났다. 눈꼬리가 살짝 처진 그녀가 웃는다.
“유진아.”
손을 벌리더니 나를 그 품속에 끌어안았다. 충분히 성숙해진 여인의 체향이 코를 간질이고 푹신한 가슴 감촉이 점점 빠져들게 한다.
유치원 선생 강수민.
젊었을 적의 모습으로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와 여기서 떡을 치고 싶었다. 허나 그랬다간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이 던전에는 시간제한이 있었다.
푹.
화련비도로 가짜 강수민의 배를 찌른다. 강수민이 잿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당신은 거짓을 간파했습니다.』
앞으로 걸어 나간다.
보이는 것은 내 기억 속에 있는 [아카데미 구원자]의 풍경과 [아카데미 구원자]의 인연들.
영하리나 강수민처럼 꽤 깊은 사이의 인연이 있었고, 어쩌다 마주친 창녀나 아카데미에서 꼬신 적당한 여자도 있었다. 모두가 나를 유혹했다. 그 몸으로, 그 목소리로.
『당신은 거짓을 간파했습니다.』
거짓을 알고 있는데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진실의 악마…. 빨리 만나서 죽여버리고 싶군.’
거짓을 베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피투성이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여자는 어린 여자의 손을 잡고 도망가고 있었다. 그 뒤를 웬 남자가 식칼을 들고 뒤쫓는다.
살인자와 그 피해자.
나는 그걸 보며 미간을 좁혔다. 내 기억에 없는 장면이었다.
‘이 던전이 거짓을 만들어 내는 방식은 언제나 진실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거짓이 아니라 진실 그 자체를 보여줄 수 있어. 그게 더 혼란스럽게 만드니까.’
저 장면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것으로 만들어진 거짓 혹은 진실일 것이다.
‘이 던전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나?’
잠깐 저것에 집중한다. 쫓기는 여자와 쫓는 살인자의 배경은 어두운 시골이었다. 땅에 박힌 표지판이 보였다. 한자가 가득했다.
‘…중국어?’
“이 빌어먹을 년이! 내 동생이라 배를 맞대고 내 뒤통수를 쳐?! 딸이랑 같이 죽어라! 악녀야!”
남자가 중국어로 지껄였다.
여자는 살려달라고 빌다가 살해당했다. 식칼이 여자아이에게 향한 찰나 경찰이 나타나서 살인자를 체포했다.
‘중국에서 온 놈이 던전에 들어왔군. 근처에 사람이 없었던 것 같은데.’.
진실을 무시하고 거짓을 죽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나?”
TV에서 본 적 있는 미국의 S급 히어로가 있었다. 그자의 눈은 내가 아닌 다른 허공에 향해 있었다. 그가 허공을 향해 반문했다.
“…세계의 진실?”
“이 세계에는 악마가 있다. 신이 있다. 그들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너는 생각해 본 적 없나? 정말로 인간이 만물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나?”
‘내 흥미를 끌려고 별짓을 다 하는군.’
검기를 날려 누군가와 대화 중인 S급 히어로를 베었다. 검기에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거짓을 간파했다는 알림창도 떠오르지 않았다.
앞으로 걸어갔다.
식탁에 모여 앉아 잇는 한 가족이 나타났다. 남자와 여자와 쌍둥이 아이들. 그들은 행복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 버섯 싫어.”
“버섯도 먹어야 키가 크지.”
“맛없는 걸 어떡해. 먹기 싫어.”
“하나만 먹어 봐. 엄마가 요리했으니 맛있을 거야. 아빠 믿지?”
중국어였다.
나는 남자가 던전에 들어온 침입자라는 걸 알아차렸다. 남자는 내가 근처에 있음에도 가짜 가족들과 대화하느라 바빴다. 이게 가짜라는 것 자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는 몸 끝에서부터 점점 검게 물들고 있었다.
‘진실의 악마의 먹이로 죽겠군.’
구해줄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죽을 놈이니 직접 죽일 이유도 없었다. 놈들이 이 던전에 들어온 목적도 대충 짐작 간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나치면서 봤거든.
그리고 고개를 돌리면 지금도 보인다.
“정신 차려라! 귀신에게 잡아 먹히지 마라! 한낱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고 싶으냐?! 귀신을 다룰 줄 알아야 진정한 귀락곡의 일원이 될 수 있다!”
귀락곡. 이놈들은 귀락곡에서 온 놈들이었다.
‘슬슬 귀찮아지는군.’
나는 가로막는 것은 죽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무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유진. 네 이름은 성유진이야.”
거침없이 나아가던 발이 멈췄다. 등 뒤에서 들린 성하리의 목소리는 무시하기 힘들었다. 살짝 뒤를 돌아봤다. 성하리가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아기는 탯줄조차 잘리지 않았다. 그 바닥은 양수로 더럽혀져 있었다.
‘내 기억에 없는 장면이군.’
좀 궁금하긴 하지만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 아기의 이름은 성유진으로 하자.”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닮은 남자가 만삭의 성하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저게 내 아버지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정체불명의 나를 닮은 남자와 행복하게 웃고 있는 성하리. 기분이 확 나빠져 남자를 향해 검기를 날렸다. 남자와 성하리가 잿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당신은 거짓을 간파했습니다.』
저 앞에 빛이 보였다.
드디어 이 던전의 끝이 보였다.
“진실이 궁금하지 않나?”
그것이 내게 물었다.
“네가 알려주지 않아도 내 힘으로 알아낼 수 있어.”
“내 취미 중 하나는 진실을 모르는 놈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거다.”
성하리가 있었다.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성하리는 두 눈에 눈물을 맺은 채 누군가에게 울분을 토하듯 말했다.
“더 이상… 더는 외로운 게 싫어! 가족을 원해! 나를, 나만을 봐주는 가족을! 내가 의지할 수 있고, 나를 의지해 주는 가족을…!”
“너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성하리의 배가 순식간에 부풀었다.
성하리는 탑에서 소원을 빌었고, 소원은 이루어졌다.
진실의 악마가 강제로 보여준 진실.
악마는 낄낄 웃었다.
“넌 진실의 편린을 알고 있었지. 진실을 알게 된 소감이 어때? 시시하지?”
“다행이군.”
“엉? 뭐가?”
“결국 성하리의 처녀는 내가 따먹은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