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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2069화 (1,849/2,000)

< 2069화 > 2069. 아카데미의 구원자

머리가 반으로 갈라진 악마의 시체가 아래로 늘어지듯 쓰러진다.

나는 방심하지 않고 아나베스를 지켜봤다. 악마는 기본적으로 평범한 생물이 아니었다. 상식에서 벗어난 짓을 일으키는 놈들. 머리가 반으로 갈라져도 무슨 괴상한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철컥.

칼자루를 되잡은 순간이었다. 꿈틀거리던 아나베스의 시체가 완전히 정지했다.

‘죽은 척인가?’

한 번 죽고 부활해서 방심한 적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내가 자주 쓰는 꼼수가 아닌가. 나는 방심하지 않고 확인 사살을 준비했다.

『성공적으로 악마를 사냥했습니다. 악마 사냥꾼(SS)의 효과가 강화됩니다.』

『악마 사냥꾼(SS)이 죽인 악마의 권능 일부를 흡수합니다.』

『현재 흡수한 권능: 괴력의 권능(A-). 미혹의 안개(B), 규율의 저주(A). 진실의 권능(S+), 반사(A)』

『반사

랭크: A

받은 피해 일부를 대상에게 반사한다』

악마 사냥꾼(SS)의 확신과 권능 흡수.

흡수한 권능의 정보를 빠르게 훑으면서 칼을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공격을 반사하는 게 아니라 받은 피해를 반사해? 별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네.’

아마 원래는 공격도 반사할 수 있을 거다.

‘악마 사냥꾼(SS)은 죽인 악마의 권능을 온전히 흡수하는 게 아니야. 흡수하면 원본보다 열화되지.’

아마 아나베스는 공격도 반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귀신 망토를 이용한 기습이 아니었다면 제법 고생했겠지.

‘반사는 큰 도움이 안 될 거야.’

일부러 적의 공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고 반사의 권능을 사용한 뒤 죽는다. 완전 회복을 이용해 부활한 뒤 다시 전투를 이어간다. 반사를 보자마자 바로 떠오른 전투 방식이었다.

‘아쉽게도 권능은 무적의 힘이 아니야.’

악마 사냥꾼(SS)은 권능에 저항했다. 내 가슴팍을 보면 옷에 붉은 피가 스며들어 있는데, 가슴에 얕은 상처가 났기 때문이다. 악마 사냥꾼(SS)이 권능에 저항해서 이 정도로 끝났다. 권능에 저항하지 못했다면 한 번 죽었을지도 모른다.

‘강한 상대로는 안 통할 가능성이 더 크다.’

나는 반사 따위에 의지할 생각이 없었다. 일부러 공격받고 반사를 쓸 바에는 돌격해서 칼을 휘두르는 쪽이 낫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유리아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 가슴팍을 쳐다본다.

“별거 아니야.”

진짜 별거 아니었다. 피만 조금 많이 났을 뿐이지 움직이거나 숨 쉬는 것에 아무 지장 없었다.

“그래도 상처는 치료하는 쪽이 낫겠군.”

엘레나가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유리아는 이미 소독약과 포션을 들고 있었다. 나는 유리아에게 몸을 맡기기로 했다.

“악마의 정체를 알겠나?”

“아나베스. 2군단 소속의 악마 백작. 충분해?”

“자작급만 되어도 성공이다. 백작급? 오히려 더 좋지. 2군단 소속인 것도 좋군.”

“일부러 2군단 소속 악마를 유도했으니 당연히 2군단이 나와야지.”

“유도했을 뿐이지 다른 군단의 악마가 나왔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운이 따라주고 있다. 계획대로 되고 있으니 기분 좋군.”

준비할 것도 있었기에 잠시 쉬기로 했다. 유리아가 끓인 홍차와 디저트를 맛봤다. 가슴팍의 상처는 흉터 하나 없이 회복되었다.

이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엘레나와 유리아는 바닥에 그린 마법진, 악마 소환진을 손봤다. 악마 백작 아나베스의 피로 소환진을 수정하고 그 시체를 토막 쳐 끝부분에 장식했다.

나는 마법진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녀들은 이 세계의 마법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한 것 같았다. 자기들 세계의 마법진과 크게 다르지 않다나 뭐라나.

엘레나는 마지막으로 마법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제 2군단장 사마엘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대로라면 직접 행차할 거다.”

보통은 군단장이 직접 움직이지 않는다.

강력한 악마일수록 제약이 걸리니까. 하지만 고대 악마를 봉인했던 이 던전은 다르다. 군단장이라 하더라도 이곳에서만큼은 부담이 거의 없다.

2군단장 소속의 아나베스가 죽었다. 뿐만이 아니라 아나베스의 시체로 악마 소환을 시도한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도발이자 함정.

하지만 사마엘은 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수천, 수만 마리의 악마를 지배하는 대악마였으니까. 거의 완전에 가까운 힘을 낼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는데 우리가 두려워 소환을 거부한다? 사마엘은 부하들로부터 지도력을 의심받을 것이다. 놈은 자신의 지배력을 증명해야 한다.

인간과 악마의 피로 이루어진 소환진이 음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악마 사냥꾼(SS)이 악마의 존재를 감지했습니다.』

『악마 사냥꾼(SS)이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스으으으으으으.

던전 안인데도 바람이 불었다. 어디서 불어오는 바람인가. 우리들의 시선은 마법진의 중심으로 향했다.

그것은 바람과 함께 나타났다.

중성적인 외모를 가진 그 존재는 꼿꼿이 서 있었다. 금발 장발의 남자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등에는 8장의 검은 날개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를 보고 자유의 여신상을 떠올렸다. 날개의 색이 하얀색이었다면 악마가 아닌 천사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오오. 너희가 감히 나의 사랑을 시험하느냐. 나는 슬프노라.”

놈은 자애롭게 미소 짓는 얼굴로 피눈물을 흘렸다.

위압감을 느꼈다.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등줄기를 타고 전율이 내달린다. 나는 화련비도를 꽉 쥐고 전투 의지를 불태웠다.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악마에 대한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악마 사냥꾼(SS)이 악마를 간파합니다.』

『사마엘. 제 2 군단, 자애의 군단의 군단장.』

『사마엘의 권능은 부패. 모든 것을 부패시킵니다.』

지독한 썩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바람과 공기는 부패했다. 음식과 시체가 썩는 냄새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끔찍한 냄새.

엘레나는 눈살을 찡그렸고, 유리아는 손을 들어 코를 막았다. 나는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눈앞에 반드시 죽여야 할 적이 없었다면 바닥에 쓰러져 토악질을 해댔겠지.

‘오래 있으면 안 된다.’

공기가 썩는 것 이상으로 내 몸이 썩어버릴 것이다.

뇌천류(雷天流) 뇌섬(雷閃).

사마엘의 반응을 보기 위해 가볍게 검기를 날렸다. 피할까? 아니면 막을까? 벌어진 광경은 내 예상과 달랐다. 날아간 검기는 사마엘의 몸에 닿지도 못하고 부패하여 사라졌다.

‘공기뿐만이 아니라 마나까지 썩어서 사라졌다고?’

헛웃음이 흘렀다.

군단장이란 것들이 터무니없이 강한 놈들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예상 밖이었다. 아마 놈의 부패는 금속이나 바윗덩어리 같은 것도 부패시키리라. 그 권능에 한계를 정해선 안 된다.

“…큰일 났군.”

엘레나가 입을 뗐다. 그녀의 주위로 수십 마리의 푸른 나비가 날아다녔다. 나비는 조금씩 바스러진다. 아마도 사마엘의 권능과 맞닥뜨리고 있는 것이리라.

“내 정신이 썩어가고 있다. 사고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사마엘의 시선이 엘레나에게 향한다.

“그건 사랑이니라. 너의 사랑을 부정하지 말지어다.”

“유리아를 죽이고 유진을 납치해서 감금한 뒤 매일 강간하고 싶다는 게 사랑? 헛소리하지 마라.”

“그것이 너의 본성이리라. 받아들이거라.”

“썩어빠진 주제에 자애로운 척하지 마라. 신의 행세라도 할 모양인데… 불쾌할 뿐이다.”

“네가 어리석어 자비와 사랑을 거부하는구나. 괜찮다. 나는 너를 용서하리라.”

“미친놈. 유진, 유리아. 오래 끌어선 안 된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간다.”

엘레나의 기세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그녀의 존재감이 사방을 뒤덮는다. 한순간이지만 사마엘을 압도했다. 한계 돌파를 사용한 것이다.

사마엘의 자애로운 미소가 사라진다.

그리고 푸른 나비들이 찬란히 빛났다.

눈을 깜빡이는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 세계는 변했다. 칙칙한 어둠은 사라지고 맑은 하늘에서 태양 빛이 내리쬔다. 굳건한 땅과 흐르는 물, 시원하게 부는 바람.

겉으로 봐서는 평범하게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세계로 보인다. 그러나 사마엘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이 세계의 모든 법칙이 사마엘을 적대하고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다니…. 너는 대체 무엇이냐?”

질문을 받은 엘레나가 입을 열었다. 말하는 대신 피를 토하며 다시 쓰러진다. 완전히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그녀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완전 회복을 쓴 것이다.

“네가 누구인지 네가 알 필요는 없다.”

딱.

엘레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스위치를 눌러 불이라도 끈 것처럼 세상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 어두운 세상은 그녀의 영역이다. 엘레나는 판을 깔고 그녀를 도왔다.

유리아는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 사슬 굴러가는 소리가 울린다. 나는 정령안과 천안(天眼)까지 사용했음에도 유리아를 보기 힘들었다. 놀라운 건 사마엘이 유리아의 공격에 대응하고 있다는 거다.

“크으으…. 이 어둠이 언제까지 너를 보호할 것 같으냐!”

사마엘은 자신의 마력을 칼처럼 휘둘렀다. 권능을 쓰지 못하는 건 엘레나의 힘 때문이겠지.

1초가 지날수록 사마엘의 몸에 상처가 생긴다. 10초가 지났을 무렵엔 8장의 날개 중 3장이 찢어졌다.

콰아아아아아앙!

사마엘의 마력이 폭발을 일으킨다.

콰지지지직!

어둠보다 더 어두운 번개가 폭발을 꿰뚫고 사마엘의 어깨를 찢는다.

사마엘은 명백하게 밀리고 있었다.

‘이거, 내가 나설 필요도 없겠어.’

전력을 다하는 그녀 둘만으로 사마엘을 압도하고 있었다. 뭐, 그럴 만도 했다. 엘레나가 자신의 수명을 아낌없이 퍼부으며 환경을 만들고 유리아를 서포트하고 있다. 유리아의 강함은 말할 것도 없다. [백환] 세계의 최종 보스를 죽인 뒤에도 그녀는 조금씩 성장했다. 그 결과가 지금 이거다.

“내가 잘못 생각했느니라! 너희는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로구나!”

사마엘이 억지로 권능을 사용했다. 그 대가로 녹초가 된 것처럼 지쳤지만, 엘레나의 세계가 빠른 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했다.

“15초 남았군.”

엘레나는 썩어가는 세계를 보면서 차분히 말했다.

“원래라면 20초 만에 저걸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린 그러지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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