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2화 > 2072. 몰락한 제국
한하린과 나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몸이 무거워진다. 중력의 영향이다.
[가속을 사용합니다. 10분 동안 유지됩니다. 남은 스택: 11]
가속을 사용해도 가속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되려 느려지고 있다. 몸이 지나치게 무겁다. 늪에 빠져드는 기분일까. 보이지 않는 힘이 내 몸을 바닥으로 당기고 있다.
[찰나(刹那)를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10]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여기까지 와서 뒤로 물러날 수는 없으니까.
한하린이 미간을 좁혔다. 몸에 가해지는 중력이 더 강해졌다. 허리가 눌려 꼿꼿이 설 수 없었다. 천심을 쓴다면 중력의 힘에서 잠시간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이건 대련이었다. 나는 숨을 한 차례 들이키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뇌천류(雷天流) 질풍신뢰(疾風迅雷).
[시간 가속을 사용합니다. 남은 스택: 5]
앞으로 세 발짝. 한하린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나부낀다. 동시에 그녀의 주위로 12개의 검은색 구체, 중력구가 나타났다.
‘유성검.’
허공에 나타난 12개의 유성검이 각각 중력구를 정확히 꿰뚫는다.
나는 그사이에 한하린의 앞에 도달해 그 목에 검을 겨누었다. 한하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졌어.”
서로가 전력을 다하진 않았다. 이건 대련이니까. 그녀와 내가 전력을 다해 능력을 사용한다면 훈련장이 버티지 못한다. 그리고 경상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후우. 누나, 저번에 봤을 때보다 엄청나게 발전했네? 식은땀이 줄줄 흘렸어.”
“검을 소환하는 능력은 뭐야? 설마 새롭게 능력을 각성했다고 말하진 않겠지?”
“그럴 리가. 아티팩트 같은 거야. 아티팩트.”
“그래?”
한하린은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녀에게도 내가 선물한 염원의 반지가 있으니까. 한하린은 일종의 아티팩트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반지는 어때? 쓸만해?”
“쓸만하다는 수준이 아니야. 이 반지를 착용한 뒤로 능력을 제어하는 게 훨씬 편해졌어. 특히 능력을 사용했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아예 없을 정도야.”
아무래도 빠른 성장의 이유가 반지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왼손 약지의 반지를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약지가 예쁘네. 반지가 잘 어울려.”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없어. 반지는 왼손 약지에 끼는 쪽이 더 잘 어울리니까.”
“아, 네.”
“…….”
계속 히죽거리자 그녀는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건 당연했다.
한하린에게 다가갔다. 한하린은 옆으로 이동해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무엇 때문인지 짐작 간다. 땀 때문이겠지. 보지 냄새도 맡아본 사이에 이제와서 이러는 건가 싶지만, 여자는 섬세하니 이해해 주기로 했다.
“저녁 안 먹었지? 밥 먹고 영화 보러 가자. 바다 공주인가 뭔가 이번에 개봉했다더라.”
“알았으니까 좀 기다려. 씻고 올 테니까.”
“같이 씻을까?”
“샤워실 하나 더 있어. 거기 사용해.”
“비누랑 샴푸가 없잖아.”
“여분 있어.”
같이 샤워하는 건 실패했다. 샤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그녀도 알기 때문이겠지. 어쩔 수 없이 각자 샤워를 하고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은 뒤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 때문에 좋았던 분위기가 잠깐 곱창 났었다. 물고기를 전부 죽여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새벽까지 짐승이 되었다.
***
오후 1시.
침대에서 눈을 떴다. 반사적으로 손을 움직여 옆자리를 더듬는다. 침대 시트 감촉만 느껴질 뿐이었다. 한하린은 집으로 돌아갔거나 길드로 출근했을 것이다. 늘상 있는 일이었다. 하품하며 일어나 샤워실로 걸어간다.
씻은 뒤에는 오늘 일정을 확인한다.
‘한가하네.’
나 같은 프리랜서 헌터는 하고 싶을 때 일하면 된다. 오늘은 일하기 싫다. 보통 이럴 때는 여자를 찾거나 게임, 소설, 드라마 등 창작물을 보는 편이다.
‘옛날 드라마나 영화도 챙겨봐야지.’
20년 전 시트콤을 시청했다. 그때 그 감성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런지 별 재미도 없었다.
부르르르르.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보니 박수호였다. 최근에 굉장히 바쁜 것 같았기에 의외였다.
“어, 수호야. 웬일이야?”
-형. 혹시 바쁘세요?
목소리가 심각했다. 딱 감이 왔다. 일이 터진 것이다. 아마 문신 세계와 관련된 일이겠지.
“한가해. 뭐 도와줄까?”
-네. 좀 도와주세요. 어려운 일은 아니고 필요한 물건들이 많아서 그것들 좀 구해주셨으면 해요.
“무슨 물건?”
-참치캔, 과일캔, 감자랑 옥수수, 도시락이랑 전투식량…. 주문해 놓은 게 좀 많아서요. 저 혼자 하기엔 시간이 부족해요.
“죄다 식량이네. 문신 세계로 가져가려고? 문신 세계에 기근이라도 들었어? 아니면 전쟁이라도 터졌거나.”
-네. 전쟁이 터졌어요.
박수호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그래. 도와줄게.”
이럴 때 도와야지 나중에 생색낼 수 있는 법이다.
내가 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필요하다는 식량을 구매하고 경기도에 있는 창고에서 배달오는 물건들을 받아 정리했다. 사람을 고용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지만, 문신 세계와 관련된 일이다 보니 박수호는 사람을 고용하기 꺼렸다.
나흘 정도 박수호를 도왔다. 정작 박수호를 만나지는 못했다. 박수호는 구할 물건이 있다며 전국을 돌아다녔으니까.
오랜만에 만난 그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형. 고마워요. 형이 없었으면 일이 더 힘들었을 거예요.”
“여기 앉아서 물건만 받으면 되는 일이라 어렵지도 않았어. 구하려는 물건은 다 구했고?”
“네. 중고 무기나 방어구를 구했어요. 전부 새 걸로 구매하고 싶지만… 그랬다가 헌터 협회가 이상함을 느끼면 골치 아파지니까요.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요.”
“이렇게 대량의 식량을 구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아?”
“문제가 안 될 정도의 양을 계산해서 구매했으니까요. 당장 있는 것들을 구매하려면 이렇게 종류를 나눌 수밖에 없었고요.”
“전쟁은 어쩌다 일어난 거야?”
“…그게 설명하려면 꽤 복잡해요. 저도 제가 알고 있는 게 맞는지 확신하기 힘들고요.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고마워요, 형.”
“그 전쟁 나도 참전해서 도와줄까?”
“아뇨. 이건 우리가 이겨내야 할 전쟁이에요. 외부인인 형을 끌어들일 순 없어요.”
박수호의 표정은 단호했다. 억지로 밀어붙이더라도 도움을 받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작은 일은 아니잖아. 흥미가 생기네. 따로 문신 세계로 가서 알아봐야겠어.’
박수호는 창고에 있는 대량의 식량들을 문신 세계로 보냈다. 이동 마법 같은 걸로 한 번에 문신 세계로 전송한 것이다. 박수호가 잠깐 비틀거렸다. 그는 굉장히 지쳐 보였다.
“한 번에 다 보낸 거야? 굉장하네.”
“한 번 쓰고 나면 당분간은 못 쓰고 피로에 시달리게 되지만요. 후, 이걸로 식량과 장비 문제는 해결이네요. 오늘 일은 진짜 고마워요.”
“전쟁은… 힘내라.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고.”
“하하. 이 정도는 이겨낼 수 있어요. 저와 베로프린은 이제 약소 도시가 아니니까요.”
박수호와 인사를 한 뒤 떠났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귀신 망토를 쓰고 공간 이동 주문서를 찢어 문신 세계로 이동했다.
골목길에 나타났다. 주위에 거렁뱅이 하나가 앉아 있었으나, 귀신 망토를 쓰고 있었기에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골목길을 나와 베로프린을 돌아다녔다.
전운이 느껴진다.
시민들은 전쟁을 준비하면서도 활기를 잃지 않았다.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감이 엿보인다.
‘사기는 충만하네. 전쟁의 명분은 박수호 쪽에게 있는 건가.’
몰래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는 정보를 모으기 힘들었다. 가면을 쓰는 건 너무 수상하다. 맨얼굴을 드러냈다가 박수호가 내 존재를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박수호에게 의심받는 건 피해야 한다.
‘이럴 때 광명승천도 세계에서 쓰는 게 있지.’
인피면구.
새로운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용병인 척 주점으로 향했다. 용병이 모인 주점은 시끌벅적했다. 바가 있었기에 그쪽으로 갔다.
“못 보던 얼굴이군. 이 근처 출신은 아닌 것 같고… 멀리서 왔나?”
연기 특성은 이럴 때 큰 도움이 된다. 나는 씩 웃으며 태연히 말했다.
“지나가던 용병 나부랭이다. 아주 멀리서 왔지.”
“아, 그러셔? 가끔 있지. 그쪽 같은 방랑 용병이. 정보랑 의뢰를 얻으려고 온 모양이군. 주문은?”
“맥주.”
“시원하게 한 잔 주지. 후회 안 할 거야.”
시원한 맥주 한 잔이 눈앞에 나타났다. 바로 입에 가져갔다. 나쁘지 않았다.
“……일부러 자제하는 건가?”
“뭐?”
“보통 우리 가게 맥주를 처음 마시는 용병들은 전부 원샷을 때리고 시작하지. 그런데 너는… 반도 비우지 않았군.”
“단순히 취향 문제잖아. 그보다 이 도시에서 전쟁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대체 무슨 일인 거지? 베로프린은 솔리트 공화국 소속이 아니었나?”
“어허. 베로프린은 엄연한 중립 도시다. 솔리트 공화국과 동맹 관계이긴 하나 입장이 바뀐 건 아니지.”
“이번 전쟁에 솔리트 공화국이 참여하는 건 아닌 모양이군.”
“영지전이니까. 상대가 펠하임 제국의 대귀족이긴 해도 영지전에 불과하니 공화국이 나설 명분이 부족하지.”
“……제국의 대귀족과 영지전? 그게 맞나?”
“원래는 말이 안 되지. 하지만 지금 제국의 상태를 보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지.”
“제국의 상태가 어떤데?”
“용병이 그것도 모르나?”
“내가 그딴 것도 알아야 하나?”
“너희 용병들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 게 바로 그 태도 때문이다. 뭐든지 알아두면 도움이 되는 법이다.”
“맥주 사줄 테니 알려주라.”
“…음. 별로 바쁘지도 않으니 괜찮겠지.”
펠하임 제국.
20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국가. 그러나 지금은 몰락한 제국이라 불리는 국가다.
현 황제는 15살짜리로 실권이 없다. 황제의 외척인 코르디 후작이 실권을 쥐고 있다.
“코르디 후작에게 뇌물을 주면 누구나가 귀족이 될 수 있다고 하더군. 우습게도 지금 제국은 몰락했으면서도 가장 많은 귀족들이 존재하는 시대라 하지.”
“몰락했는데 국가는 유지된다?”
“그놈들은 제국이란 이름을 놓기 싫어하니까. 게다가 유능한 귀족들이 제국을 받치고 있지. 영지전으로 땅따먹기하면서 말이야.”
즉, 지금 제국은 군웅할거의 시대였다. 귀족들이 저마다 영지전을 벌이며 세력을 키우고 있다.
“제국은 울타리다. 제국이 완전히 무너지면 솔리트 공화국에 흡수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다 해도 영지전이 성립된 이유가 될 순 없잖나. 베로프린은 제국에 속해있지 않을 텐데.”
“명분이 문제다. 전쟁의 명분은 모르크 백작이 쥐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영지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더군.”
“명분이 뭐지?”
“박수호 시장님께서 모르크 백작의 장남을 죽이고 모르크 백작의 노예들을 데려와 해방시켰다.”
“…….”
박수호가 100% 잘못했다.
점주는 그걸 알고 있음에도 박수호를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도리어 이 전쟁을 반기는 것처럼.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군. 뭐, 외부인이니 당연한가. 하나 말하지. 명분은 저쪽에 있어도 정의로운 건 우리다. 모든 인간은 자유를 누려야 하고, 제국놈들은 언젠가 이 일이 없었어도 언젠가 우리에게 이를 드러낼 놈들이다. 그놈들은 신의가 없거든.”
“그래서 전쟁을 반긴다고? 너희가 정의라서?”
“모르크 백작의 장남이 얼마나 썩은 놈인지 아나? 아녀자를 강간하는 건 기본이고, 놈의 방에선 매일밤 어린 남자아이의 비명이 아침까지 울린다더군.”
“역겨운 놈이네. 너희는 박수호 시장을 믿는 건가?”
“당연하지. 박수호 시장님은 옳다. 그분은 여신님의 선택을 받은 용사시다.”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한다.
박수호를 향한 충성도가 어마어마했다.
다만 눈앞의 남자는 그것뿐만이 아닌 것 같다.
“제국을 싫어하나?”
“베로프린의 시민 중 30%는 모두 제국 노예 혹은 평민 출신이지. 제국이 얼마나 개 같은 놈들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지.”
“……당신도 제국 노예 출신인가?”
“그래. 내 아버지는 세금을 내지 못했고 우리 가족은 노예가 되었다. 그렇게 20년 동안 하급 귀족에게 착취당하다 겨우 베로프린에 자리 잡았지. 아버지는 채찍에 맞아 죽었고, 어머니는 매독에 걸려 죽었지만… 드디어 복수할 때가 왔지.”
점주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