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3화 > 2073. 몰락한 제국
점주의 말을 더 들어봤다.
제국의 대귀족 모르크 백작과 영지전을 벌이기까지 여차저차 한 일이 추가로 있었던 모양이지만, 결과적으로 제국과 공화국의 중재하에 영지전을 벌이게 됐다.
이번 영지전에서 걸린 건 영토가 아니다. 영토를 걸기에는 모르크 백작령과 베로프린의 거리가 멀었다. 영토를 얻게 된다고 하더라도 통치가 불가능하게 된다.
모르크 백작이 원하는 건 인구와 식량과 무기, 방어구 등의 전쟁 물자다.
박수호가 원하는 건 인구수였다. 승리하면 5만의 인구를 얻는다고 한다. 반대로 영지전에서 패하면 5만의 인구를 잃으며 전쟁 물자를 넘겨줘야 하는 상황이다. 명분이 모르크 백작에게 있기에 박수호가 잃을 게 더 많았다.
‘박수호의 능력은 도시 크기에 따라 강해진다. 지금 베로프린의 인구수가 15만이니… 인구수 5만이 한 번에 유입되면 박수호가 어마어마하게 강해지겠군.’
박수호가 나보다 빨리 S급 헌터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살짝 위기감이 들었다. 박수호가 나보다 강해진다?
‘잠깐 상상했을 뿐인데 기분 나빠지네.’
나보다 강한 박수호의 눈치를 보고 싶진 않았다.
‘박수호 이 새끼 어딘가 음습한 기질이 있단 말이야. 사람이 권력을 쥐게되면 본성이 나온다고 하던데… 나보다 강해지면 더러운 본성을 드러낼지도 몰라.’
그리고 배도 아팠다.
나는 유희 속 세계에 들어가서 뺑이치며 포인트를 벌어 강해지는데, 이 새끼는 미개한 놈들을 선동하고 김치랑 삼겹살을 베풀어서 쉽게 강해지지 않나.
‘개날먹이잖아.’
딱히 부럽지는 않지만, 배알이 꼬이니 방해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용병. 전쟁에 참전할 거냐? 참전할 거라면 신뢰할 수 있는 고용주를 소개해 주지.”
“믿을 만한 고용주란 게 존재하나?”
“우리 시장님이 있지. 이번에 대대적으로 용병들을 고용한다더군. 실력에 자신 있다면 너도 지원해 봐라.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을 거다.”
“……당장 여기서 결정하기는 어렵군. 전쟁. 그것도 남의 도시 전쟁에 끼어들었다가 좋은 꼴을 볼 것 같진 않거든.”
“다른 용병들보다 훨씬 신중하군.”
“칭찬이냐?”
“당연하지. 하지만 너무 신중했다가 후회하는 사람도 여럿 봤지.”
“그래. 충고 고맙군.”
나는 맥주를 드리킹하고 주점 밖으로 나갔다. 모르크 백작령의 분위기도 살펴보고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정보가 있어야 어떻게 개입해야 할지 각이 보이지.’
모르크 백작령은 베로프린에서 일주일 거리에 있었다. 마차가 아닌 보행 기준이다. 남서쪽으로 쭉 가면 된다고 한다.
‘모르크 백작령 쪽으로 향하는 상단이나 용병은 없군. 전쟁이니 당연한가.’
가려면 혼자서 가야 한다. 바이크를 꺼내서 달리면 3일 내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랬다간 박수호가 100% 알아차린다. 내 존재를 박수호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현지인 코스프레를 해야 했다.
‘용병은 아니야. 은연중에 무시당하는 느낌이야.’
듣기로는 제국에서는 용병의 대우가 더 좋지 않다고 한다. 제국의 무력으로서 손꼽히는 기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사 코스프레나 좀 해야겠군.’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스톰 브레이커나 화련비도와는 다른 장비를 착용하고 눈에 잘 띄는 뇌전 능력도 자제해야 한다.
‘드워프가 만든 명품 갑옷이나 검은 썩어날 정도로 많아. 말이나 한 마리 구하자.’
제국의 기사 하면 말을 빼놓을 수 없었다.
말은 비싼 물건이다. 이 세계에서는 자동차를 대신하는 이동 수단이라 더더욱. 하지만 돈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사이코트 엘프령을 뒤에서 지배하는 남자다. 돈은 말을 구매하고도 남을 정도로 많았다.
“말을 구한다고? 타이밍이 좋지 않군. 현재 말을 판매하지 않소.”
“내가 용병이라 무시하는 거냐?”
“그런 게 아니니 진정하시오. 용병이니 알겠지. 전쟁이 코앞이오. 여기 있는 말들은 시장님이 전부 대여하셨소.”
“대여? 구매가 아니라?”
“전쟁은 돈 싸움이라 하지 않소. 시장님을 위해, 이 아름다운 도시를 위해 말들을 대여해 주기로 했소.”
“전쟁에서 말이 죽으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소. 나는 이 도시가 승리하기를 바라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민인 주제에 지나칠 정도로 충성도가 높았다. 박수호에게 따로 받는 거라도 있나? 아니면 이 도시가 그렇게 특별하나?
이후에도 도시를 돌아다녔다. 말을 꼭 마구간에서만 구매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말을 가진 상인이나 용병에게 웃돈을 주고 구매하면 된다.
‘여기 시민들 좀 이상하네. 시장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전쟁을 준비해?’
적당히 한 명을 붙잡고 왜 그렇게 열심히 전쟁을 준비하냐고 물으니, 이 도시가 좋다고 대답한다.
‘이해할 수 없군. 기분 나쁠 정도야.’
어쨌든 상인을 통해 말을 구했다. 나이가 좀 많다는 걸 제외하면 괜찮은 말이었다. 말을 타고 모르크 백작령으로 향했다. 물론 암말이었다.
가는 도중에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걸 제외하면 별일 없었다. 몬스터는 내 손에 썰려 죽었다.
‘말을 타니 사흘 만에 도착하는군. 슬슬 가까워지니 갈아입을까.’
편한 옷에서 드워프제 갑옷으로 갈아입는다. 누가 봐도 명품이고 새것임을 알 수 있는 갑옷. 말에게도 갑옷을 입힐까 하다가 관뒀다. 이 늙은 말이 마갑을 착용하면 금방 지칠 게 분명했으니까.
나는 누구보다 당당히 모르크 백작 도시로 향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내 앞을 막아섰다.
“자, 잠시 멈춰주십시오.”
“멈춰? 감히 내게 지껄인 말인가?”
살짝 으르렁거려 주자 경비병이 바로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경! 영주님의 지시로 인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신원을 조사해야합니다! 베로프린과의 영지전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니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기사의 권위로 밀어붙여 안으로 들어가는 건 하책이었다. 전쟁이 코앞이니만큼 민감하게 반응할 테니.
“나는 크롬 데이커트의 아들, 에런 데이커트다. 방랑 기사로서 운명의 주군을 찾기 위해 제국을 떠돌고 있다.”
당연히 전부 구라였다. 하지만 경비병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따로 주민등록증 같은 것도 없는 미개한 세상이다. 내 신분은 내가 가진 장비와 말이 보증해 주고 있다.
“방랑 기사! 저희 영지를 돕기 위해 오신 겁니까?!”
“못 도와줄 것도 없지.”
“감사합니다, 데이커트 경! 이 친구가 경을 영주성으로 안내할 겁니다!”
“됐다. 영주성이 저리 큰 데 혼자 가지 못할까. 너희는 여기 입구나 잘 지켜라.”
말에 탄 채로 당당히 영지 안으로 들어간다.
바로 영주성으로 향하지 않고 도시를 둘러봤다.
베로프린과 같은 활기는 없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대부분 어두웠다. 넝마가 된 옷을 입은 노예들이 힘든 노동을 이어 한다. 그들 중에서 내 앞길을 막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 어쩌다 시선이 마주치면 바로 바닥에 무릎 꿇었다.
‘베로프린과는 전혀 다르군. 뭐, 내겐 이쪽이 더 익숙하긴 해.’
[백환] 세계의 영지와 비슷했다. 평민은 평민답게. 노예는 노예답게.
공화국과 달리 제국은 어두웠다. 하지만 마냥 어둡지는 않다. 펠하임 제국은 평민과 노예에게도 출세할 기회를 준다. 힘. 다시 말해 무력을 증명하면 된다. 어떻게 해서든 기사가 되기만 하면 팔자가 고쳐지는 것이다.
도시를 둘러봤다. 베로프린에 비하면 초라하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베로프린의 영주인 박수호가 현대의 지식과 물건으로 발전시킨 도시가 베로프린이니까. 하지만 나는 이 도시가 마음에 들었다.
‘미개한 새끼들이 미개하게 살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 박수호도 이해는 가. 도시가 발전해야 강해지니까. 근데 이놈들은 잘해주면 기어오른단 말이야.’
머리가 좀 굵어졌다고 반란. 살만해졌으면 만족할 것이지 더 잘 살고 싶다고 반란. 세금 좀 올렸다고 반란.
‘개돼지는 개돼지처럼 사육해야 관리가 편하지.’
따각따각.
영주성으로 향하는데 골목길에서 불순한 시선이 느껴진다.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이다.
‘내가 외부인이라서? 아니면 기사라서?’
어느 쪽이든 당장 뭔가를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나는 간단하게 모르크 백작을 만날 수 있었다. 보통 귀족이라 하면 탐욕 가득한 인상으로 그려지기 마련이지만, 모르크 백작은 2m에 달하는 근육질 거구의 중년 남성으로 귀족보다 전사에 가까웠다. 그 외형에서 귀족적이라 할 수 있는 건 하얀 수염 정도가 전부다.
“내 영지에 어서 오게. 나는 기사를 환영하네. 데이커트 경은 제국을 떠도는 방랑 기사라지? 떠돌이 기사의 생활이 얼마나 고단한지 알고 있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나의 기사가 되지 않겠나?”
“백작님. 저는 평온한 생활을 위해 제국을 방랑하는 게 아닙니다. 언젠간 진정한 운명의 주군을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운명의 주군? 내가 자네의 운명의 주군이 될 수 있지 않나.”
“죄송합니다만, 백작님으로부터 운명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모르크 백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발끈한 건 그의 주위에 있는 4명의 기사였다.
“이런 건방진 것! 떠돌이 주제에 각하를 모욕하는 것이냐?”
“데이커트.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명성이 없는 기사 주제에 너무 뻣뻣하군.”
“각하. 허락해 주신다면 저 떠돌이에게 드레드 기사단의 저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각하! 결투는 제게 맡겨주십시오!”
기사들이 앞다투어 적의를 내비친다. 저것들이 진정으로 나를 죽이고 싶어서일까? 아니다. 이놈들은 충성 경쟁 중이었다. 모르크 백작은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즐기고 있다.
아랫놈들의 충성 경쟁이 재밌긴 하지.
“모두 조용히 하게. 데이커트 경. 궁금한 게 있네. 경의 갑옷과 검은 명품 중의 명품인데 반해 경의 이름은 처음 들어보네. 누구에게 기사 서임을 받았는가?”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시대가 시대이지 않나. 확실히 하자는 걸세.”
귀족이 많은 시대라고 해도 함부로 귀족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가 내 신분이 부정되는 건 시간문제다. 이럴 때는 더욱 뻔뻔하게 나가야 한다.
“불쾌하군요.”
분위기를 잡는다.
전신에 힘을 주고 마나를 주변으로 방출한다. 모르크 백작의 얼굴이 굳어지고, 근처 기사들이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그들 또한 내게 대항하듯 기세를 올렸다.
이 정도면 내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걸 알았을 거다. 마나를 갈무리하며 긴장을 풀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욱하는 성질이 있어서 무례를 저질렀군요.”
“…아닐세. 무례는 내가 더 저질렀지. 내가 무지하여 그대 같은 기사를 모욕했네.”
“용서하겠습니다. 근데 제가 정식 기사가 아니긴 합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