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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2074화 (1,854/2,000)

< 2074화 > 2074. 몰락한 제국

“본래 도미닉 자작으로부터 기사 서임을 받기로 했으나, 서임을 받기 전에 도미닉 자작이 전사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받지 못했지요.”

도시를 둘러볼 때 우연히 들은 건데 도미닉 자작은 3개월 전 반란으로 뒤졌다고 한다.

깊이 생각하고 사람을 보내 조사를 한번 해보면 바로 들킬 수도 있는 거짓말이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이런 거짓말이 아니다. 내가 쌓은 경험이 얼마인데 모르크 백작의 사고를 예측하지 못할까.

“…어쩔 수 없이 받지 못했다라. 그럼 그대는 기사가 아니지 않나?”

“비록 서임장이 없어도 이 가슴에 기사도를 품고 있기에 저는 기사입니다.”

“……으음. 그렇군.”

원래라면 통하지 않는 궤변.

하지만 그는 내 힘이 보통이 아니란 걸 알았다. 나를 내쫓기에는 아깝겠지.

“제국을 방랑하며 알게 된 것은 사람들은 물질에 집착한다는 겁니다. 겨우 기사 서임장이 없다는 이유로 기사인 저를 무시하는 자들이 많더군요. 진정한 기사는 기사도를 품은 자를 말하는 것임에도 말입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이 세상에는 그대만큼 빼어난 기사는 드무니. 듣기로는 도적놈들이 기사를 사칭하는 경우도 많다더군.”

“예. 그런 놈들은 모두 찢어 죽여야 마땅합니다. 백작님. 제게 기사 서임장을 써주실 수 있습니까?”

귀족은 기사를 서임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남작은 1년 1번, 자작은 1년에 3번, 백작은 1년에 5번. 후작은 8번, 공작은 제한이 없었다. 제국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 권리를 이용해 장사하는 귀족도 있었다.

“크흠. 조금 무리한 부탁을 하는군. 기사 서임은 마구잡이로 남발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닐세.”

기사 서임의 최소한의 조건은 기사의 무력이 초인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과 공을 세워야 한다는 것.

“당연히 요구만 하는 건 아닙니다. 제 기사도에 어긋나는 일이니까요. 솔리트 공화국의 베로프린과 영지전을 펼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참전하여 도와드리겠습니다.”

“경이 도와준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일세! 하나 정정해주자면 베로프린은 중립 도시일세. 아직 정식으로 솔리트 공화국의 영지가 된 게 아닐세.”

모르크가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정치적인 문제겠지.

“잠깐 의문이 생기는군요. 이번 전쟁에 마도 원수의 개입은 없는 것입니까?”

“없네. 중재를 한 건 솔리트 공화국일세. 그리고 이건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영지전일세. 하지만 공화국이 뒤에서 수작질을 부릴 가능성도 있기에 방심할 수 없네.”

“알겠습니다. 이번 전쟁, 모르크 백작령이 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알겠네. 혹시 필요한 게 있나?”

“별거 없습니다. 오랜 방랑 생활로 인해 몸에 피로가 쌓였으니 미녀 둘과 잡일을 처리할 하인 하나를 주셨으면 합니다. 아, 깨끗하고 햇빛도 잘 드는 방도 내주십시오. 불결한 곳에서는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지라…. 요리는 최고급으로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 혀는 맛없는 음식을 뒤로 넘기지 못하는지라. 개인 저택은 필요 없습니다. 관리만 귀찮을 뿐이죠. 성에서 지내며 각하를 지켜드리겠습니다. 아, 급료도 잘 챙겨주시리라 믿습니다.”

“…….”

모르크 백작이 주위에 있는 기사들에게 눈치를 줬다. 그의 기사들은 필사적으로 못 본척했다. 나서는 이가 없었다. 방금 전의 기세 싸움에서 내가 더 강하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편히 쉬게.”

***

하인에게 안내받은 방의 인테리어는 둘째치고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하인도 기초 교육을 받은 놈인지 똘똘해 보였다.

“미녀 둘은 왜 없지?”

“데려오기 위해 사람을 보냈습니다. 해가 저물기 전에 도착할 것입니다.”

“밖에서 데려온다? 창녀를 데려올 모양이군.”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인이 긴장하며 말했다.

조금 불만족스럽긴 했어도 고개를 끄덕였다. 성안에 미녀가 널려 있을 리 없으니까. 어느 정도 이해해 주기로 했다.

“그만 나가봐라.”

“갑옷은….”

“알아서 한다.”

“네. 제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하인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잠시 방에서 쉬다가 밖으로 나갔다.

감시의 시선이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신경 쓰지 않았다. 모르크 백작이 나에 대해 모르니까 이러는 거다. 모르크 백작은 내가 굉장히 수상할 테니까.

“데이커트 경.”

어쩌다 마주친 기사가 나를 불렀다. 모르크 백작 주위에 있던 기사 중 한 명이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락구스. 락구스라 부르시오. 노예 출신이라 성은 없소.”

“노예 출신이었다고요? 대단하시군요.”

제국은 힘을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 노예로 태어났더라도 강하다면 기사나 귀족이 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기회의 제국이라고도 부른다. 다만 그런 일은 무척 드물다. 신분의 벽은 아주 높았다.

락구스는 작은 칭찬에 흐뭇하게 웃었다. 그의 뺨에 새겨진 흉터 쪽으로 시선이 갔다.

“이 오른쪽 뺨에 있는 흉터가 궁금하시오? 7년 전이었소. 나는 흉악한 암살자 집단인 검은 비의 표적이 됐었소. 이건 검은 비의 암살자 놈과 싸우다 생긴 상처요. 놈의 검에는 독까지 발라져 있었지.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약했더라면 죽는 건 놈이 아니라 나였을 거요. 내가 놈을 어떻게 죽였는지 아시오? 머리에서 사타구니까지 반으로 쪼개 죽여버렸소.”

락구스는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기사치고 말이 많았다.

“암살자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을 텐데 대단하시군.”

“성가신 놈들이긴 하오. 허나 놈들은 결국 비겁한 암살자일 뿐이오. 우리 기사들에겐 안 되지.”

“지당한 말이오. 한데 전쟁이 코앞이지 않소. 전쟁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소?”

베로프린은 도시 전체가 전의로 불타고 있었다. 반면에 여긴 조용하고 음울했다. 모르크 백작의 정확한 전력을 알기 힘들었다.

“물론이오. 우리 드레드 기사단은 52명의 기사로 이루어져 있소. 데이커드 경까지 합하면 53명이지. 그리고 1만의 병사가 징집되어 기초적인 훈련을 받고 있소. 노예 3천까지 합하면 총 1만 3천이지. 현재 이 성에 기사들이 없는 이유가 병사들의 훈련을 위해 성을 나가 있어서 그런 것이오.”

지구의 중세 시대에 비하면 일개 영지의 병사 수 치곤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 영지의 인구수가 20만 정도로밖에 되지 않는 데 1만 3천? 미친 짓이다. 사활을 걸었다는 말이 딱 맞다.

‘……아니지. 인구수만 따지면 비슷한 베로프린도 1만 명 정도는 모으고 있잖아.’

박수호의 식량 구매를 도와주면 직접 들은 말이었다. 1만 명을 징집할 거라고.

‘이 세계는 그렇게 많은 인원을 징집하는 게 보통인 건가?’

머리를 굴려봐도 모르겠다.

신이 있고 마법이 판치고 몬스터가 돌아다니는 세계이니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병사들의 무장 상태는 어떠하오?”

“대부분 징집병이라 고만고만하오. 백작 각하께선 무기를 지원해 주기로 했소. 방어구야 따로 구해야겠지만…. 무기를 지원해 주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은 백작 각하께 감사할 것이오.”

“각하는 1만이 넘는 병사들의 무기를 지원할 돈이 있을 정도로 부유한 것이오?”

“…음. 솔직히 말하리다. 각하께서 여기저기 돈을 빌렸소. 이번 영지전에서 이기기만 하면 갚을 수 있소. 5만의 인구수가 한 번에 늘어난다는 건 세금도 늘어난다는 뜻이 아니오?”

인구수 5만을 걸고 하는 영지전이란 걸 다시금 상기한다.

“그 5만 명을 수용할 곳은 있소? 식량은?”

추가로 전쟁 물자를 받더라도 갑자기 늘어난 인구수는 골칫거리 그 자체다.

“알아서 생활할 것이오. 원래 그러니까. 그리고 각하께서는 2만 정도는 노예로 팔아 돈을 번다고 하셨소.”

“……과연. 정규군은 있지 않소? 그들의 훈련 상태와 무장 상태를 보고 싶소.”

“하하. 데이커트 경의 열의가 굉장하구려. 좋소. 기꺼이 보여줄 테니 따라오시오.”

병사들은 훈련장에 모여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도 정규군이라고 갑옷을 입고 방진을 짜서 공격하는 훈련에 집중했다.

“어떻소? 대단하지 않소?”

“훈련이 잘된 정병이로군. 감탄했소.”

쓴웃음을 지었다. 흠집 가득한 갑옷에 때가 잔뜩 탄 낡은 검과 창, 방패까지.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훈련? 대충대충 하는 티가 났다. 징집병보단 낫겠지만 정예라 부르기엔 손색이 있다. 전투 경험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박수호는 용병까지 고용한다고 했어. 훈련 상태가 고만고만하다면 중요한 건 무장 상태랑 고급 전투 인력인데….’

전부 박수호가 앞서고 있다. 드워프 대장장이, 엘프 궁수, 일정 수준 이상의 마법사에 사제들까지. 박수호의 도시엔 고급 인력이 수두룩했다.

“……영지에 마법사는 없소?”

“마법사? 3명 정도 있었소. 우리를 배신하고 베로프린에 달라붙은 명예도 모르는 주문쟁이 놈들! 내 이름을 맹세코 그 주문쟁이들은 반드시 죽여버릴 것이오!”

“배신했다?”

“그렇소. 베로프린의 시장이 우호를 목적으로 영지에 온 적 있었는데… 그놈이 공자님을 죽이고 노예들과 마법사들을 데리고 도망쳤소.”

박수호는 후계자를 죽이고 노예 해방만 시킨 게 아니라 고급 인력도 빼간 모양이다.

“이름이 수오라고 했나? 정말이지 이름도 이상한 시장 놈이 명예의 명도 모르는 악독한 놈이오. 공화국은 그런 놈을 비호하니 아주 갈 데까지 간 거요. 장담하는데 공화국은 앞으로 10년도 못 갈 것이오.”

락구스는 쉬지 않고 입을 움직이며 박수호와 베로프린, 솔리트 공화국을 욕했다.

나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심각하게 생각했다.

‘이건 정면으로 싸워서 못 이긴다.’

초인이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이루어진 전쟁이었다면 할만했을 것이다. 이쪽은 노예병 3천 명이 추가로 있으니까.

‘상식이 안 통하는 판타지잖아. 영지전인데 1만 명씩 모아서 싸우는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상식을 논하기 전에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나는 어두컴컴한 새벽에 귀신 망토를 뒤집어쓰고 공간 이동 주문서를 사용해 베로프린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병사들이 사용하는 우물에 독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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