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5화 > 2075. 몰락한 제국
박수호는 전쟁 준비로 바쁘게 움직였다.
이번 전쟁은 영지전이다. 패배한다고 해서 도시를 잃는 건 아니다. 패배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기회는 남아 있다. 허나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임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필사의 각오로 이번 전쟁에 임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모아둔 돈을 모조리 사용했다. 지구에서의 돈과 도시 예산 전부를.
그래도 다음 달에는 세금이 들어오니 이기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5만의 인구수가 늘어나는 건 박수호 자신이 강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5만의 인구수가 도시로 들어오면 이전보다 더 빠르게 발전할 테니까.
‘5만 명이 거주할 구역은 이미 준비해 뒀어. 식량이 조금 아슬아슬하긴 해도… 여차하면 지구에서 대출받고 식량을 가져오면 되니까. 정 안 된다면 솔리트 공화국에 빌리면 돼.’
현대 물건들은 이 세계에서 잘 팔리는 편이다. 특히 손목시계 같은 사치품이 상당히 돈이 된다.
‘엘프와 드워프들이 협조를 해주기로 했고… 모르크 백작 휘하에 있던 마법사들의 말에 따르면 드레드 기사단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지. 보니까 제국 출신 시민들은 귀족 이상으로 기사들을 두려워하고 있어. 분명 이유가 있겠지. 마법사들로 하여금 먼저 기사들을 공격하게 하고….’
박수호는 아침도 거르면서 전쟁을 준비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를 돕는 행정 공무원들이 없었다면 머리가 터졌을지도 모른다.
창문을 통해 강렬한 햇빛이 들어와 박수호의 눈을 때렸다. 박수호의 집중력이 끊겼다. 꼬르륵. 공복의 배가 신호를 보내올 때였다. 그의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고 갑옷을 입은 병사가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시장님! 큰일입니다! 벼, 병사들이!”
“진정하고 말해 봐. 무슨 일이야?”
병사 중 일부가 사고 쳤나? 아니면 몬스터가 도시로 들어왔나? 드물진 않아도 가끔 일어나는 사건들이 있었다. 베로프린의 시장으로서 관록을 쌓은 박수호는 당황하지 않고 문제들을 처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병사의 보고를 듣기 전까지는.
“병사들이 사용하는 우물에 독이 퍼졌습니다!”
“어, 음. 뭐라고?”
“병사들이 사용하는 공용 우물에 독이 퍼졌습니다! 현재 320명이 사망했으며 650명이 중독된 상태입니다! 지금도 계속 중독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미친!”
박수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황한 그의 눈동자가 요동친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흐른다.
“사제, 사제를 불러! 아니, 우물부터 폐쇄해! 물을 사용하지 말라고 해!”
“벨리앙 장군님께서 이미 명령하셨습니다. 다른 병사가 사제님이 계시는 신전으로 달려갔고, 병영 내부는 통제된 상황입니다!”
“제길.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직접 피해 상황을 확인해 봐야겠어!”
박수호는 빠른 걸음으로 저택을 벗어나 병영 쪽으로 향했다. 그는 이동하면서 병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 우물이 오염된 거야?!”
“새벽 시간대를 추정하고 있습니다. 어젯밤에 물을 마신 이들은 멀쩡했습니다!”
“중독증상은?”
“증상은 서서히 발현됐습니다. 물을 마시고 3시간 뒤에 몸이 서서히 마비되어 굳어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악랄한 독이잖아. 마치 우물에 독을 퍼뜨리기 위해 만든 독 같아.”
차라리 마시고 바로 죽는 독이 더 나았다. 그럼 먼저 죽은 시체를 보고 우물이 독으로 오염된 걸 바로 알아차렸을 테니까.
“우물에 독을 푼 범인은?”
“모르겠습니다. 우물은 병영 중앙 지하 시설에 있고, 딱히 경계를 세우진 않았습니다. 물을 마시려고 우물가에 직접 갈 필요가 없기에 목격자도 없습니다.”
베로프린의 시장인 박수호는 현대인이었다. 그는 현대의 지식을 활용해 도시를 발전시켰다.
박수호가 생각하기에 살기 좋은 도시는 현대 한국처럼 편한 도시다. 의, 식, 주. 그 모든 게 편한 도시를 추구했다. 현대의 음식을 시민들에게 베풀고, 현대의 옷과 물건들을 팔았다. 물론 주거 환경도 개선했다.
그중 가장 신경 쓴 것 중 하나가 상수도와 하수도다. 그 과정에서 우물은 필요 없게 되었지만… 아직 모든 구역이 개발된 건 아니기에 일부는 남겨뒀다. 그 일부가 병영에 있는 우물이다.
설마 어떤 미친놈이 병영 우물에 독을 풀 줄은 전혀 몰랐지만.
“영주님. 이건 제국 놈들의 짓이 확실합니다. 제국의 끄나풀이 우물에 독을 탄 겁니다! 베로프린 도시에 있는 제국인 출신들을 모두 조사해야 합니다!”
병사가 증오로 소리쳤다.
잔뜩 흥분했던 박수호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이건 위험해.’
베로프린은 오늘날의 다민족 국가랑 비슷했다. 온갖 출신의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도시다. 제국은 솔리트 공화국보다 훨씬 크고 인구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런 만큼 제국 출신 시민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 이 병사의 사상은 위험했다. 제국 출신을 혐오하고 증오하게 되면 도시는 최악의 형태로 끝장날 것이다.
“병사! 닥쳐라! 지금 네 발언은 선량한 시민들을 모욕하는 말이다! 베로프린의 시민들이 그런 추잡한 짓을 저지를 거라고 보는 거냐?!”
박수호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평소 거렁뱅이에게도 친절하던 그가 분노하자 병사는 얼어붙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덜덜 떠는 병사를 본 박수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 지금 상황에서 확실한 건 없어. 섣불리 추측하지 마. 한 번이라도 더 그딴소리가 들리면 더 참지 않겠어.”
“하, 하지만 시장님. 이미 소문이 퍼졌습니다. 저도 소문을 듣고 그렇게 생각한 것뿐입니다….”
“소문이… 퍼졌다고…?”
박수호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뭔가 일이 단단히 틀어지고 있었다.
‘…차별. 그래. 그런 조짐은 있었어.’
알고 있어도 손을 쓰기 힘들었다.
교육 수준이 높은 현대 지구에도 인종 차별이 버젓이 일어나는데 이 세계라고 다를까. 이 세계는 오히려 인종차별은 덜 하다. 대신 출신 지역 차별이 심하다. 특히 공화국 출신과 제국 출신은 사이가 안 좋은 게 상식일 정도다.
‘알고 있어도 손을 쓸 수 없는 문제였어.’
시간이 흘러 융화되어 자연히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언젠가 문제가 터질 거라고 막연히 예상하기도 했지만….
‘설마 지금 터질 줄이야.’
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박수호가 현장에 도착했다. 병영은 멀쩡한 병사들이 통제 중인 상황이었다.
앞머리가 까진 중년 남자가 박수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벨리앙 장군이었다.
“…오셨습니까, 시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방심했습니다. 우물에도 병력을 배치했어야 했습니다. 징계는 달게 받겠습니다.”
“책임소재는 나중에. 지금은 병사들을 살리는 게 먼저야. 상황은 어때?”
“최악입니다. 이미 300명이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독에 의한 심장마비입니다.”
“죽지 않은 병사들과의 차이점은?”
“물을 적게 먹거나, 선천적으로 건강하고 튼튼한 병사들은 독을 극복해 냈습니다. 문제는 물을 한 컵 이상 마신 평범한 병사들입니다. 개인 차이가 있더라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제와 치료사들이 일하고 있어. 희망을 놓지 마. 한 명이라도 살려야지.”
“예. 옳으신 말씀입니다. 정신 차리겠습니다.”
“해독제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독이라고 합니다. 해독제는… 없습니다. 사제의 신성력으로도 해독할 수 없었습니다.”
“…….”
박수호는 이를 악물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으나 사제와 치료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중독자들의 신체를 약과 신성력을 이용해 강화하는 것으로 독을 이겨내도록 하는 중입니다.”
“그 외의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그거라도 해야지.”
박수호의 몸에서 신성력이 흘러나왔다. 도시에 신전이 있으니 그도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
그날, 755명의 병사가 사망했다.
이 참사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졌고, 베로프린의 시민들은 제국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
모르크 백작성에는 저녁 연회가 열렸다. 베로프린의 병사 수백 명이 죽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기사로서 연회에 참석했다. 모르크 백작과 그 휘하의 기사들이 기분 좋다는 듯 포도주를 마셨다.
“껄껄껄! 여신께서 우리를 축복하는 게 틀림없소! 반대로 베로프린에는 저주를 내리셨지! 이 영지전은 우리가 이길 것이오!”
“실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각하!”
“역사와 명예가 없는 도시가 저주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모르크를 위하여!!”
저마다 웃고 떠들고 있다. 나는 모르크 백작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무리를 바라봤다. 젊은 남녀가 6명이고 성숙한 여자가 2명이다. 모두 모르크 백작의 가족들이었다.
‘장남이 뒤졌다면서 왜 슬퍼하지 않는가 했더니 자식이 많아서였군.’
시대가 시대다 보니 사람들은 죽음에 익숙해져 있었다. 아 세계의 사람은 누구나가 한 번쯤은 시체를 본 적 있을 거다.
‘그보다 모르크 백작의 아내들이… 젊고 예쁘군.’
모르크 백작과 나이 차이가 최소 20년은 날 것 같았다. 자세히는 몰라도 최근에 새롭게 들인 부인들이겠지. 제국의 권력자들은 일부다처제가 기본이니까.
금발머리 백작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지금 나는 30대의 잘생긴 남자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여성의 시선을 끌기엔 충분했다. 내가 씩 웃었다. 여자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우리의 눈은 끈적하면서도 뜨겁게 타올랐다.
절대 착각이 아니다. 그 후로도 간간이 서로 시선이 마주쳤으니까.
‘시간이랑 공간만 있으면 바로 섹스 한판 조질 수 있겠는데?’
두 남녀가 눈이 맞았으니, 이젠 배를 맞대는 일만 남았다.
사실 그녀의 미모는 내 방에 찾아온 2명의 창녀와 큰 차이는 없지만, 돈을 내고 언제든 따먹을 수 있는 창녀와 백작 부인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당연히 후자 쪽이 더 꼴린다.
“데이커트 경이라고 했나?”
나보다 10cm 작은 남자였다. 얼굴에는 땟국물이 줄줄 흐른다.
“……음? 처음 보는 기사군. 누구시오?”
“넬 코튼이다. 8년 전부터 모르크 백작 각하를 모신 기사다. 넌 신입인 주제에 예의가 없군. 신입이면 다른 선배 기사들에게 인사를 올리는 게 먼저 아닌가? 8년 선배인 내가 네게 먼저 인사를 하러 와야 했나?”
텃세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놈의 머리를 향해 장갑을 던지며 버럭 소리쳤다.
“감히 나를 모욕해?! 결투를 신청한다, 이 고블린 같은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