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7화 > 2077. 몰락한 제국
대화 중에 끼어든 중재자들.
상황만 보자면 제국과 공화국의 중재자들은 모두 박수호를 옹호하는 모양새다.
‘박수호가 저 둘에게 뇌물이라도 먹였나?’
가능성은 상당히 있었다. 박수호는 해야 하는 일이라 판단되면 하는 놈이었다. 모르크 백작의 장남을 죽이고 그 노예들을 해방했듯이. 몇 년 전이라면 어리바리하게 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박수호는 베로프린의 시장으로서 이 세계의 영향을 적잖게 받은 상태였다.
모르크 백작은 제국 측 중재자를 바라봤다. 최대한 기세를 죽였으나 분위기가 사나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보르기아 자작. 그대는 누구 편이오?”
“난 그 누구의 편도 아니오. 중재자로서 누구 한 명의 편을 들지 않소. 다만 나는 합리적일 뿐이오.”
“내가 정말 베로프린의 우물에 독을 풀었다고 확신하는 것이오?”
“정황이 그러합니다. 설마 베로프린이 자기 도시에 독을 풀었다고 보십니까?”
“당연히 그 가능성이 크지 않나? 내가 알기로는 베로프린에는 제국 출신이 적지 않다고 들었소만? 그들이 제국을 위한다는 이유로 독을 풀었을 수도 있소!”
“헛소리하지 마십시오!!”
박수호가 소리치며 끼어들었다. 상당히 만감하게 반응했다. 도시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는 민감한 주제라 그렇다.
‘지금 베로프린에는 제국 출신이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지. 딱히 내가 나서서 소문을 낸 건 아닌데도 말이야.’
평화로운 베로프린에도 보이지 않는 차별과 갈등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잘 수습하지 않으면 베로프린은 좆될 것이다. 미래가 없어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박수호의 몫이기도 했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 박수호도 인식하고 있나 보네. 시민들에게 어중간한 자유를 주니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제국을 봐라.
평민과 노예의 차별이 있을지언정 서로 싸우지 않는다. 평민은 평민답게. 노예는 노예답게. 제국에선 당연한 상식이고 법칙이었으니까.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모르크 백작과 박수호는 대화를 이어 나갔다. 대부분 서로를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되니 결국 중재자들이 다시 끼어들었다.
“영지전은 3주 뒤로 미루도록 합시다. 물론 그 원인이 베로프린에 있는 만큼 모르크 백작령에는 적절한 배상이 있을 겁니다.”
공화국의 중재자가 배상을 언급했다. 길길이 날뛰던 모르크 백작은 헛기침과 함께 진정했다.
“배상이라. 일단 들어보지. 내가 이번 전쟁을 위해 쏟아부은 돈이 적지 않아서… 최소 3천만 골드와 1만 명이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은 줘야 하네.”
“3천만 골드? 1천만 골드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박수호. 내 영지의 상황도 모르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나는 이번 영지전을 위해 귀족 6명과 상인 8명에게 돈을 빌렸다. 3천만 골드가 있어야 버틸 수 있다! 3천만 골드를 배상하지 않는다면 협상이고 뭐고 없다! 영지전은 원래의 일정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영지전은 여타의 전쟁과 달랐다.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서 전쟁을 벌인다. 그 과정에서 상대를 향한 약탈은 일절 없다. 일반적인 전쟁보다 리스크가 훨씬 적은 것이다. 허나 모르크 백작은 이번 전쟁에 모든 걸 걸었다.
‘그런 주제에 최근에 연회를 열었지. 씀씀이가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박수호는 있는 대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중재자들과 대화를 나누고는 한숨을 내쉰다.
“…좋습니다. 3천만 골드와 일주일 치의 식량을 제공하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내가 잘못 말했군. 일주일 치가 아니라 3주 치의 식량이 필요하다.”
“헛수작 부리지 마라, 모르크 백작!!”
모르크 백작의 개소리는 통하지 않았다. 어쨌든 협상은 잘 마무리되었고 박수호는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박수호의 태도를 보니 모르크 백작의 전력을 자세히 모르는 게 확실했다. 현재 상황에서 영지전을 벌여도 박수호가 승리할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하하하. 베로프린의 시장 놈이 똥줄이 탄 모양이군!”
모르크 백작은 기뻐했고 기사들은 앞다투어 축하의 말을 건넸다.
“맞습니다. 직접 찾아와서 하소연한 것과 다름없지 않습니까. 똥개가 짖는 꼴이었습니다.”
“각하. 이 좋은 날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연회를 여시죠.”
“으음. 각하. 전쟁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연회를 여는 건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몇몇은 제정신이 박혀 있는 기사들은 우려를 표했다.
모르크 백작은 당당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 이 좋은 날에 연회를 열지 않을 수 없지. 돈은 걱정마시오. 원래 2,000만 골드면 충분한데 3,000만 골드를 불렀으니. 연회 2~3번 정도 열 여유는 있소.”
“키야!! 과연 각하십니다! 멍청한 베로프린의 시장이 각하의 끝없는 지략에 당해버렸군요!”
“베로프린의 시장은 정말 멍청합니다! 적의 수장이 저 모양이니 이번 전쟁의 승리는 보장된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하하하하!”
모르크 백작과 기사들은 자만에 취해 있었다. 나와는 생각이 달랐지만, 구태여 소신 발언을 해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다. 괜한 소리를 했다가 내 평판만 떨어질 테니까.
‘내가 우물에 푼 독은 결국 정화될 거야. 유리아가 만든 독이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독이 약해지는 단점이 있으니까.’
한 번 더 몰래 들어가서 독을 풀까?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가 박수호가 빡쳐서 선을 넘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현대의 물건들을 잔뜩 가져온다던가. 트럭을 개조해서 전투용으로 바꿀 수도 있고, 해외로 나가 총기를 구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간 정말 답이 없어진다. 박수호를 방해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방해해야 해. 몬스터를 도시 쪽으로 유인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후 저녁에 연회는 벌어졌다. 저번 연회에선 결투 때문에 내가 주목받았지만, 이번 연회는 모르크 백작의 뛰어난 협상 능력을 칭찬하면서 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연회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됐기에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놀라운 건 예상외로 여기사가 꽤 있다는 것이다. 제국은 신분 차별을 확실하게 하지만, 강자에게만큼은 예외였다. 노예도, 평민도, 여성도 힘만 있다면 기사가 될 수 있고 대우받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사는 대부분 우락부락해서 내 취향이 아니야.’
저번 연회에서 뜨거운 시선을 교환했던 금발 머리 백작 부인과 이번에도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시녀들과 함께 있었고, 나는 포도주를 삼키며 은근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눈이 맞았으나 보는 눈이 많았기에 함부로 그녀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젊은 기사와 젊은 백작 부인이 둘이서 만난다? 누가 보더라도 그 관계를 의심할 테니까.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점점 취해갔다. 일부는 바닥에 쓰러져 그대로 잠이 들었고, 일부는 행패를 부렸다가 병사들에게 잡혀 끌려 나갔다. 기사들은 연회에 초대된 여자들, 주로 창녀들과 시시덕거리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금발의 백작 부인은 눈치를 보다가 혼자서 연회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나는 속으로 씩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백작 부인은 자신의 침실이 아니라 사람이 보이지 않는 구석 쪽으로 향했다.
이건 하늘이 기회를 주며 말하고 있었다. 따라가서 저 여자를 따먹으라고.
‘못 먹는 건 병신이지.’
나는 기척을 죽인 채로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그녀는 성탑의 위로 향했다. 성의 방어를 위한 성탑인지라 지금 성탑에는 아무도 없었다.
금발 머리의 백작 부인, 카를라는 창문을 통해 밖을 보고 있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새벽 2시쯤 된 지라 도시는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그녀의 눈은 아래가 아니라 위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지상과 달리 밤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카를라는 내 인기척을 느꼈음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데이커트 경. 전 자유를 누리는 당신이 부러워요. 당신이 본 세상은 어땠나요? 저 밤하늘만큼이나 아름다웠나요?”
시발. 뭔 개소리야?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거친 말을 억지로 삼켰다.
고귀한 출신의 백작 부인은 머릿속이 꽃밭인 모양이다. 이해할 수 없어도 여기서 물러날 순 없다. 보지를 따먹어야 하니까.
“…세상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세상에는 어두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세상은 절대 아름답지 않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대해 잘 모른다. 여긴 유희 속 세계가 아니기에 자세한 정보가 없다. 이 세상을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즐겁습니다. 아름답지 않더라도 돌아다니는 보람이 있습니다.”
적당히 지껄이면서 손을 올려 카를라의 어깨를 잡았다. 카를라는 내 손을 쳐내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 성탑에 온 것부터가 이미 반쯤은 몸을 허락한 것이다.
“저도 데이커트 경처럼 세상을 여행하고 싶어요. 경은 제게 세상을 보여주실 수 있나요?”
요컨대 사랑의 도주를 하잔 말인가?
나는 가까운 거리에서 카를라의 미색을 확인했다. 미모가 정말 뛰어나면 책임질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카를라는 미녀이긴 해도 그 정도로 예쁜 건 아니었다. 게다가 처녀도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부인. 세상은 잔혹합니다. 이 도시와 성이 지루할지 몰라도 안전만큼은 확실합니다. 저는 부인께서 안전하게 지냈으면 합니다.”
“……그렇군요. 당신은 제 운명의 상대가 아니었군요.”
밤하늘에서 고개를 돌린 카를라가 아련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그윽한 눈길로 대응했다.
“슬프십니까?”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까요. 데이커트 경. 경의 이야기로 절 위로해 주세요.”
“맡겨주십시오. 부인께서 즐거워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으신지요?”
“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자유로운 사랑을 당신은 해본 적 있나요?”
“자유로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랑을 해본 적 있지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만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부분 개구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