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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속으로-2079화 (1,859/2,000)

< 2079화 > 2079. 몰락한 제국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카를라를 방으로 데려다주었다.

하인들이 아침 일찍 성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으나, 귀신 망토로 몸을 감춘 나와 카를라를 꿰뚫어 볼 수 없었다. 혹시 몰라 카를라의 몸은 대충이나마 깨끗한 천으로 닦아 놓았다. 정액이 가득 차 있는 보지를 제외하고. 몸에 남아 있는 흔적들은 옷을 입으면 가려지는 것들이다.

이후에 나도 내 방으로 돌아가 늦은 잠을 청했다. 잠에서 깬 건 오후 2시쯤이었다. 감히 하인이 방문을 두들기며 나를 깨운 것이다.

똑똑똑!

“데이커트 경! 안에 계십니까?! 백작 각하께서 경을 부르십니다!”

비몽사몽이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르크 백작이 나를 부른다? 카를라과의 외도가 들통난 것인가?

‘백작을 죽여야 하나? 그렇게 되면 박수호가 이기게 되잖아. 도망치는 편이 낫나? 내가 도망치면 카를라도 처형당할 가능성이 크니 데려가야겠어.’

순식간에 계획을 짜냈다. 박수호의 베로프린 도시를 약화시키는 건 굳이 모르크 백작을 돕지 않더라도 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예전처럼 적광이 되어 베로프린에 깽판을 친다던가. 베로프린의 발전을 막을 방법은 의외로 많았다.

“데이커트 경?!”

“…안에 있다. 목소리를 높이지 마라.”

“죄송합니다. 백작 각하께서 급히 부르고 계신지라….”

“각하가 왜 나를 부르는 거지? 전쟁은 3주 뒤로 미뤄지지 않았나.”

“일개 하인인 제가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만, 백작 각하께서 다른 기사들도 부르셨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를라와의 외도 때문이 아니다.

‘음. 좀 더 냉철히 생각했다면, 아니란 걸 바로 알 수 있었겠지. 외도가 걸렸으면 하인이 아닌 기사와 병사를 보내 날 잡으려 했을 테니까. 자다 일어나서 정신이 없었어.’

기사들을 부른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마음이 편해졌다.

“알겠다. 옷을 갈아입고 가도록 하지.”

“백작 각하의 표정이 꽤 심각해 보였습니다. 늦지 않으셔야 합니다. 데이커트 경.”

“쓸데없는 걱정이다.”

***

모르크 백작에게 불린 건 나를 비롯한 기사 5명이었다. 하인의 말대로 모르크 백작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장 높으신 분의 표정이 안 좋으니 분위기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찰떡처럼 잘 어울리는 기사들도 모르크 백작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경들을 부른 건 주제도 모르는 도적놈들을 토벌하기 위해서요.”

기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봤다. 결국 기사 중에서 가장 짬이 높은 코튼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감히 모르크 백작령을 공격하는 도적놈들이 있단 말입니까? 이전에 대대적으로 토벌하지 않았습니까.”

“새로이 나타난 놈들 같소. 그놈들이 영지로 운송되던 전쟁 물자를 강도질했소. 살아남은 상인의 말에 따르면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이라 하오. 전쟁 물자의 양이 적지 않으니 바로 처분하진 못했을 터. 경들이 나서서 직접 도적들을 토벌하고 전쟁 물자를 되찾아 주시오.”

모르크 백작의 말투는 부탁하는 것처럼 보였다. 허나 그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기사들 또한 모두 알고 있었다.

“각하! 저희만 믿으십시오! 도적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어리석은 죄악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명예를 모르는 무도한 놈들은 각하께서 내려주신 이 검으로 쓸어버리겠나이다!”

“모르크를 위하여!”

기사들은 차례대로 아부를 떨 듯이 말했다. 나 또한 적당히 편승해서 포부를 내비쳤다. 대충 도적들을 싹 다 죽여버리겠다는 말이었다.

모르크 백작의 굳은 표정이 그제야 풀렸다.

“경들을 보니 안심이 되는군. 도적놈들의 규모는 60명 정도라 들었소. 급한 일이니 병사들 없이 경들이 직접 말을 몰고 처리해 주었으면 하오. 도적들의 토벌이 끝나면 물자를 운송할 병사들을 보내겠소.”

“각하의 기대를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지금 당장 움직여 주시오! 도적놈들이 영지를 떠나기 전에!”

“예스, 마이 로드!”

***

기사들만 말을 타고 움직인 건 아니었다. 기사들의 종자 8명도 함께 움직였다. 종자들은 병사 취급이 아니라 개인 하인 취급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일반 병사들보다 훨씬 강한 건 확실했다.

나를 비롯한 5명의 기사가 갑옷을 갖춰 입은 채로 앞서서 내달렸고, 말을 탄 종자들이 짐을 들고 그 뒤를 따르는 형태였다.

기사들은 여유로웠다. 달리는 와중에도 잡담을 할 정도로.

“쯧. 오늘 오후에는 케밀 마담과 약속이 있었거늘…. 도적놈들은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구려.”

“도적이 괜히 도적이겠습니까. 가서 골통을 부숴버리지요. 그게 이 세상을 위한 일입니다.”

“하하. 엘마이어 경은 적의 골통을 부수는 걸 너무 좋아하는구려. 그 메이스로 몇 명의 골통을 부수셨소?”

“음. 이 메이스로만 80명의 골통을 부순 것 같군요. 아마 100명 정도는 더 죽일 수 있을 겁니다. 그 후에는 메이스를 바꾸는 게 좋겠지요. 케밀 마담과는 어디까지 가셨습니까?”

“경도 케밀 마담이 쉬운 여자가 아니란 건 알 테지. 아직 케밀 마담과 몸을 섞지는 못했지만… 이제 곧이라네. 마담이 날 보는 눈에는 사랑이 가득하다네.”

기사들은 시답잖은 잡담을 이어갔다. 그중 절반 이상이 여자 이야기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데이커트 경. 경은 도적들을 토벌한 적이 있으시오?”

내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던 락구스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귀찮긴 해도 겉으로는 동료기사이니 대답해 줬다.

“당연히 있소. 도적 토벌이야 특별한 일도 아니지 않소?”

“그렇긴 하오. 근데 방심하진 말아야 하오. 도적놈들은 대부분 별 볼 일 없는 놈들이지만… 간혹 진짜배기가 껴있는 경우도 있소. 명예를 잃은 기사들 말이오. 나는 2년 전에 도적이 된 기사를 만난 적 있소. 아니, 글쎄 도적놈이 내 검격을 받아내는 게 아니겠소? 그때의 놀란 감정은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오.”

‘이 새끼 또 시작이네.’

락구스는 말이 많았다. 그것도 자기 자랑을 하는 이야기에 특히나. 나는 그의 말을 듣기 싫어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락구스 경. 이번 사건은 좀 이상하지 않소?”

“음? 뭐가 말이오? 도적들이야 항상 제국 곳곳에 있는 놈들 아니오.”

“도적놈들이 나타난 시기가 교묘하지 않소?”

“시기?”

“모르크는 전쟁을 앞두고 있소. 그를 위해 전쟁 물자를 여기저기서 구매했지. 그 사실을 도적놈들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니 전쟁 물자를 도적질하지 않았겠소.”

“그 전쟁 물자의 주인이 모르크 백작 각하인 걸 뻔히 아는데도 말이오. 당연히 그걸 건드리면 모르크 백작 각하께서 분노하여 토벌대를 보내리란 걸 짐작하지 않겠소?”

“……듣고 보니 이상하군. 도적놈들이 대놓고 모르크에 선전포고를 한 꼴이 아닌가. 놈들이 그 정도로 대담하지 않을 텐데….”

락구스가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도 뒤늦게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주제를 바꾸기 위해 그냥 지껄인 말이 꽤 그럴싸했다.

도적은 평민이나 노예 놈들이 살아남기 위한 생계형 범죄일 가능성이 크다. 모르크 백작 같은 거물을 건드릴 배짱이나 있을까? 머리가 있다면 자기들이 좆된다는 걸 알 텐데.

“…도적이 도적이 아닐 수도 있소.”

“데이커트 경. 그 말은… 웬 놈들이 도적인 척한다는 뜻이오?!”

락구스의 목소리가 컸다. 기사와 종자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오. 놈들은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용병들일지도 모르오.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용병 말이오.”

“헉! 가능성이 있소! 어제 베로프린의 시장이 와서 백작 각하께 시간을 구걸했지! 그놈이 수작을 부린 거요!”

“음…. 베로프린의 시장은 명예를 모르는 놈이오. 게다가 베로프린은 부유하기로 소문난 도시지.”

기사와 종자들은 하나가 되어 베로프린의 시장 박수호를 욕했다.

나도 함께 욕했다.

박수호의 음습한 기질을 생각하면 정말로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이 크니까. 게다가 박수호에겐 동기도 있었다. 병영 우물에 독이 풀어진 사건! 그 범인을 모르크 백작으로 거의 확신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상단이 도적들에게 습격받은 곳에 도착했다.

말과 사람의 시체가 길바닥에 널려 있었다. 피와 내장에서 끔찍한 오물의 악취가 풍겼다. 마차가 부서져 잔해가 버려져 있긴 한데 양이 적었다.

“듣기로는 마차가 여섯 대라더니, 부서진 마차는 한 대뿐이구려. 도적놈들이 나머지 다섯 대를 가져간 게 확실하오.”

코튼은 세심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씩 웃었다.

“대놓고 흔적이 남아 있소. 물건이 워낙 많아서 흔적을 지우지 못한 것이오. 우린 이 흔적을 쫓아가 도적놈들을 죽이면 되오.”

“하하. 내 메이스가 놈들의 골통을 맛보길 원하오! 어서 갑시다!”

기사들은 신이 나 흔적을 따라 내달렸다.

나는 찝찝함을 느꼈다.

정말로 도적으로 위장한 용병들이라면 일을 이따위로 허술하게 처리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용병은 전투의 전문가가 아닌가.

‘감이 안 좋아. 근데 그래봤자 용병 새끼들 아닌가?’

갑자기 찝찝함이 사라졌다. 호랑이가 하룻강아지를 두려워해서야 쓰겠는가.

“정의를 위하여! 아, 경들. 놈들을 전부 죽이진 마시오.”

“데이커트 경. 놈들은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소.”

“자비? 아니오. 놈들은 노예가 되어 봉사해야 할 것이오! 특히 놈들의 두목은 만인이 보는 앞에서 찢어 죽여야 마땅하오! 그래야 무도한 놈들에게 경고가 되지 않겠소?!”

“오오. 데이커트 경은 멀리 볼 줄 아시는구려. 기꺼이 그 뜻에 동참하겠소! 정의를 위하여!”

말이 마차의 흔적을 따라 길을 내달린다.

그리고 저 멀리 도적들의 캠프가 보였다. 도망가기에도 바빠야 할 도적은 어처구니없게도 자기들만의 캠프를 만들었다.

기사인 나는 누구보다 용감하게 말고삐를 흔들며 돌격했다.

“이 빌어먹을 도적놈들! 죗값을 치를 시간이다!!”

내 옆에서 달리던 락구스가 깜작 내게 외쳤다.

“자, 잠깐, 데이커트 경! 진정하시오! 상황이 너무 이상하오! 아마도 함정일….”

락구스의 목소리는 끝까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이미 선두를 내달리고 있었다. 캠프 곳곳에 숨어 있던 도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적치고 지나칠 정도로 좋은 무장을 갖춘 놈들이었다.

“걸렸구나!”

“멍청한 기사 놈! 돌격밖에 모르는군!”

땅이 쑥 꺼지며 말이 구덩이 속으로 떨어진다. 구덩이 안에는 창칼이 돋아나 있었다. 나는 떨어지는 말을 박차고 위로 뛰어올랐다. 번개처럼 뽑은 검에서는 푸른 검기가 줄기줄기 뛰쳐나왔다.

뇌천류(雷天流) 허도(虛道).

허공을 박차고 가까운 도적놈의 머리에 검을 박아넣었다. 검을 뽑는 대신 아래로 내리그었다. 시체에서 피와 내장이 쏟아진다.

피와 철의 냄새가 진득하게 풍겼다. 방금까지 환호하던 도적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꾹 닫았다. 놈들의 눈에 두려움이 엿 보인다.

“정의가 당도했다. 버러지들아. 크크.”

푸른 검기가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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