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작물 속으로-2082화 (1,862/2,000)

< 2082화 > 2082. 몰락한 제국

촌장의 명령과 달리 마을 사람들은 섣불리 나를 덮치지 못하고 집을 포위한 채로 망설였다.

내가 두려워서이기도 했지만, 내 근처에 여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도 내게 범해지고 있는 여자들. 이들은 여기 있는 누군가의 어머니였고, 누군가의 아내였으며, 누군가의 딸이었다.

“뭐 하는 거냐! 저 기사를 죽여! 죽여야 우리가 산다고!!”

촌장이 발악하듯 외쳤다. 그러는 자기는 직접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켜 보고 있다는 게 웃음벨이다. 이 작은 마을에도 권력이 있었다.

나는 여자들을 옆으로 치웠다. 여자들이 휘말리는 건 나도 원하지 않았다.

“나는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는다. 밖으로 나가자. 전부 죽여줄 테니.”

당당하게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꿀꺽 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난다.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예상했던 대로 주위는 이미 남자들에게 포위되었다.

“공격해! 놈은 우리 여자들을 범했다! 겁쟁이처럼 그렇게 계속 빼앗기며 살 거냐!!”

촌장이 발악하듯 외쳤다. 그의 말은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분노로 공포를 이겨내며 살의를 일으켰으니까.

먼저 사냥꾼으로 보이는 남자 셋이 활에 화살을 메겼다. 일제히 쏘지 않고 한 사람씩 내게 화살을 쏜다. 내가 피하는 것까지 예측하는 것이다.

‘나쁘지 않은 전략이군. 내가 평범했다면 말이야.’

옆에 있는 마을 사람을 향해 달려간다. 총구의 방향을 보면 총알도 피할 수 있는데, 대놓고 쏘는 사냥꾼의 화살을 피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확실히 피해야 한다.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피부가 강철로 변하는 건 아니니까. 나도 날붙이에 베이면 피부가 찢어지고 피가 난다.’

퍼억!

남자를 때려죽이고 내게 달려드는 주민들에게 내던졌다. 주민들이 기겁했다. 시체에 부딫쳐 넘어지는 자들도 있었다. 농사 생활로 단련되었기 때문일까. 피지컬은 나름 있는데 전투 방식은 조잡하다.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몰아라! 몰아서 공격해라!”

“그냥 돌격하지 말고 창과 칼을 내밀고 돌격하라고!”

“같이 움직여라! 맹수를 상대할 때는 사냥꾼들의 합이 중요하다!”

촌장과 사냥꾼들이 빽빽 소리 지른다. 자기들은 그나마 전투 경험이 있다고 훈수를 남발하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멈추는 순간 눈먼 창이나 칼에 찔릴 수도 있었다.

‘이 새끼들 무기 하나는 좋단 말이지. 이런 마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닐 텐데. ……도적놈들이 마을을 들려서 주고 갔나? 아니면 이놈들이 사실 도적… 이라고 하기엔 어설프군.’

촌장을 살려두고 심문해야 할 것 같았다.

창이 옆구리를 노리고 찔러 들어 온다. 보법을 밟아 피한다. 옆구리를 지나치는 창대를 잡아 끌어당겼다. 창을 쥐고 있던 남자가 끌려왔다. 주먹으로 놈의 머리를 후려치고 창을 빼앗아 사냥꾼에게 던졌다. 창이 사냥꾼의 몸을 꿰뚫었다. 머리 없는 시체를 잡아 주민들에게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민들이 경악한다.

“무슨 놈의 힘이…!”

“우,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거지?”

“기사는 인간이 아니라고 말했잖아!”

압도적인 광경에 마을 사람들의 사기가 떨어진다. 분노에 가려졌던 공포가 다시 드러난다. 이놈들은 병사가 아니라 평범한 마을의 주민들이다. 무기를 든 것과 잘 싸우는 건 별개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기절한 기사 중 한 명이라도 깨어있었다면 어렵지 않게 이들을 몰살시켰을 것이다.

쐐애애액.

화살이 날아온다.

날아오는 화살을 그대로 낚아채고 사냥꾼을 향해 던졌다. 훨씬 빠르게 날아간 화살이 사냥꾼의 미간을 꿰뚫었다.

“고, 곰도 저렇게 강하지 않았어!”

주민 중 하나가 오줌을 지리며 말했다.

“곰은 사람을 찢지. 그리고 나는 곰을 찢는다.”

직접 보여줬다. 근처에 있는 놈의 양어깨를 잡아 힘만으로 찢어버렸다. 피와 내장이 쏟아진다. 마을 사람 중 전의를 불태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리치던 촌장마저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 기사님. 살려주십시오. 저, 저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도적놈들이 마을 아이들을 데려가서는 기사님들을 죽이라 협박했습니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수면제와 무기들도 그 도적들이 준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어처구니없었다. 먼저 죽이려 들더니 안될 것 같으니 포기한다. 투항하면 내가 그냥 살려줄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다 죽이려다가 멈칫한다. 죽음은 너무 쉽다.

“너희는 살고 싶으냐? 노예가 되어서라도 살고 싶으냐?”

사람들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제국에서 노예란 인간 이하의 짐승이며 물건이었다. 노예 주인이 노예를 심심풀이로 죽여도 가벼운 벌금만 낸다. 그게 제국의 법이었다. 그만큼 노예의 삶은 비참하다.

“노예가 되지 않겠다면 평민으로서 죽어라.”

떨어져 있는 검을 쥐었다. 검날을 타고 푸른 검기가 질주한다.

땅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기가 벼락처럼 떨어져 땅에 길쭉한 상흔을 남겼다. 마을 사람들은 나와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기사.

펠하임 제국의 무력.

이 몰락한 제국이 간신히 숨을 쉬듯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기사가 있어서다.

“모두 노예가 되겠다고 하니, 노예가 될 기회를 주마. 삶의 기회를 살아서 쟁취해라. 승자는 노예가 되어 살 것이고, 패자는 평민으로서 죽을 것이다.”

물론 촌장은 예외였다. 이 새끼는 주동자다. 끔찍하게 고문받다가 보시 광장에서 처형당해야 한다.

나는 놈들을 데리고 촌장의 집으로 들어갔다. 여자들은 알몸으로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제발 살려달라고 빌 듯이.

“여자들아. 들어라. 너희의 죄를 사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나를 만족시킨다면 너희는 평민으로서 살 수 있을 거다.”

내 아이를 임신할 여자들이었기에 관대한 자비를 내리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데이커트 경이라 불러라. 그럼 시작해 볼까.”

마을 여자들이 적극적으로 변했다. 노예가 되기 어지간히도 싫었는지 거리낌 없이 다리를 벌리고 아양을 떨었다. 내 발가락을 핥고 천박한 춤까지 췄다.

“데, 데이커트 경. 제 남편만은 살려주십시오! 뭐든지 하겠습니다!”

“오. 그래. 네 남편이 누구지?”

“저 사람입니다!”

남편의 가슴에 포크를 박아 죽였다. 여자는 목을 꺾었다.

“늙고 못생긴 년이 주제도 모르는구나. 내 자비는 무한하지 않다는 걸 명심해라.”

꿀꺽.

여자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 본보기는 확실히 하니 나머지가 기어오르지 않는다. 나는 마을 여자들의 보지를 자지로 맛보면서 마을 남자들의 데스매치를 지켜봤다.

데스매치 조건은 1대1. 옷을 입지 않고 주먹만으로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싸운다. 한 명이 죽기 전까지 데스매치는 끝나지 않는다.

***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수면제를 먹어 기절하듯 잠들었던 기사들이 하나, 둘씩 일어났다.

“끄응. 머리가 아프군…. 술을 너무 마셨나?”

“헉! 이게 무슨 꼴입니까? 지난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기사들이 하나 같이 경악했다. 알몸의 여자들은 쓰러져 있고, 알몸의 남자 둘은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으며, 다른 남자들은 무릎 꿇고 있으니까. 한쪽 구석에는 죽은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기사들이 보기에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눈치 빠른 기사는 바로 상황을 알아봤다.

“…어제 음식에 수면제를 탄 건가. 데이커트 경은 술과 음식을 먹지 않았으니 통하지 않은 거로군. 데이커트 경. 경에게 신세를 졌소.”

“신세랄 것까지야. 일단 좀 즐기시는 게 어떻소?”

“으음. 머리가 아파서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소. 한데 저 남자 둘은 왜 싸우는 거요?”

“저 둘은 형제요. 노예가 되기 위해 싸우고 있소. 크크.”

나는 깨어난 기사들과 그 종자들에게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알려줬다. 모두가 분개했다. 남녀 할 것 없이 전부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워워. 진정하시오. 여자들은 용서해 주기로 했소. 이 가녀린 여자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소?”

내게 안겨 있는 여자가 기뻤는지 허리를 더 힘차게 아래위로 움직였다.

“…데이커트 경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가만 보면 데이커트 경은 너무 자비로운 것 같소. 이것들은 모두 찢어 죽여야 마땅하거늘. 하다못해 노예로 팔지 그러시오?”

“나는 여자들에게 자비를 내리기로 했소.”

“알겠소. 데이커트 경이 없었으면 우린 모두 죽었을 목숨이니…. 데이커트 경의 의견에 따르겠소. 다들 동의하오?”

“데이커트 경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협력해야겠지요. 다만, 남자 노예들 몇 명은 내가 구매하겠습니다. 화풀이라도 해야겠습니다.”

기사들은 일어나서 종자들이 가져온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경들. 종자인 제가 말씀 올리겠습니다. 촌장을 심문해야 합니다.”

심문은 빠르게 끝났다. 이미 의지가 꺾인 촌장은 묻는 말에 전부 대답했다.

도적들은 마을 아이들을 납치하고 언덕 쪽으로 향했다. 언덕 너머에 버려진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서 쉰다고 한다. 그리고 수면제와 무기를 주며 기사들을 죽일 것을 명령했다.

“놈들도 마을이 실패한 걸 알았을 테니 서둘러 움직여야 하오.”

코튼의 말에 따라 갑옷을 갖춰 입고 움직였다. 마을을 관리하기 위해서 종자들을 남겼다.

언덕을 넘으니 버려진 마을이 나왔다. 가까이 가지 않더라도 도적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허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멍청한 도적들이 도망치지 않은 건 그렇다 쳐도… 마을이 뭔가 이상하지 않소?”

“확실히 뭔가 불길합니다.”

“떨어져 있는 이곳에서도 피 냄새가 나오. 이 정도면 한둘이 아닌데…. 도적들 사이에서 내분이라도 일어난 것이오?”

“가보면 알겠지요.”

나를 비롯한 기사들이 이상함을 느꼈다.

마을로 들어가자마자 무장한 도적들이 튀어나왔다. 이젠 용병이란 사실도 숨길 생각이 없는지 완전 무장한 상태였다.

그들 중심에는 애꾸눈의 남자, 가시 날개 용병단의 단장인 데릭 칼루안이 있었다.

“쓸모없는 마을 새끼들. 수면제까지 줬는데 기사를 하나도 못 죽였군.”

기사들은 놈의 발칙한 말투에 반응하지 못했다. 데릭의 뒤, 허공에 떠 있는 여자에게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2M가 넘는 머리카락은 사방팔방으로 뻗쳐서 촉수처럼 꾸물거렸고,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잿빛이었다. 두 눈은 피처럼 붉었으며, 혈관은 피부 위로 드러나 꿈틀거렸다. 걸치고 있는 하얀 드레스는 피로 얼룩져 있었다.

마녀가 입을 벌리며 낄낄 웃는다.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에 기사들이 하나 같이 긴장했다. 마녀의 입에는 살점과 내장 조각이 붙어 있었다.

락구스 경이 신음성을 흘렸다.

“…마녀. 마을에서 데려간 아이들을 먹은 건가. 꼴을 보아하니 금단의 마법에 손을 댄 모양이오. 경들. 조심하시오. 이 전투는 쉽지 않을 것이오.”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