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3화 > 2083. 몰락한 제국
우우웅.
공기 떨리는 소리와 함께 전신에 압력이 느껴진다.
‘중력은… 아니군. 한하린이 사용하는 중력의 힘과는 좀 달라. 염력인가?’
조금 거슬리긴 해도 몸이 구속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기사들은 나와 다르게 느낀 모양이다.
“이런 사악한 마녀년…. 무슨 마법을 쓴 건지 몰라도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졌소.”
“마녀가 더 많은 마법을 사용하기 전에 처리해야 합니다!”
“제기랄. 마녀는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 거요?!”
기사들이 혀를 찼다.
마녀.
옛날 제국이 흥하던 시절과 달리 지금은 보기 힘든 존재였다. 경력이 10년 넘는 기사도 마녀를 만나기는커녕 싸운 경험도 제대로 없을 정도로.
“뭐해, 등신들아! 저 기사들을 죽여!! 이번 일만 끝나면 우린 팔자 피는 거다! 부자가 돼서 귀족 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자고! 커다란 저택과 쭉쭉빵빵한 미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애꾸눈의 용병 단장, 데릭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 휘하의 용병들이 그의 말을 상상했는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전투에 임한다. 활과 석궁을 든 놈들이 화살을 날렸다.
기사들은 팔을 들어 눈구멍을 가렸다. 전신 갑옷을 입고 있는 그들에게 화살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눈구멍을 통해 우연히 들어오는 화살만 막으면 된다.
용병들은 화살을 통해 기사들의 움직임을 막으면서 자리를 잡는다. 포위를 형성하고 그물을 준비한다. 섣불리 접근하지 않는다. 놈들은 기사들을 천천히 죽이려 하고 있다. 그게 아니면 다른 노림수가 있거나.
‘놈들의 노림수는 마녀겠지. 아까부터 마녀가 중얼거리고 있어. 대형 마법이든 뭐든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거야.’
팅팅팅팅!
화살이 갑옷을 때리고 튕겨 나간다. 아주 의미 없는 공격은 아니었다. 화살 중에는 강력한게 섞여 있어서 갑옷이 약간 찌그러지고 내부로 충격이 퍼지는 것도 있었으니까.
팅팅팅팅!
화살 비를 맞으면서 기사들에게 말했다. 마나를 실은 목소리는 화살 비속에서도 잘 퍼져나갔다.
“경들. 내가 마녀를 상대하겠소. 경들은 저놈들을 죽이시오. 아, 되도록 몇몇은 남겨두시오. 마녀가 이 사건의 배후라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니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소.”
내가 기사들에게 말했다.
“음. 우리 중에 가장 강한 데이커트 경의 말이니 따르겠소.”
“데이커트 경이라면 마녀의 목을 벨 것입니다.”
“오늘 데이커트 경의 무용담이 생기겠구려. 경의 명예에 찬사를.”
이윽고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장전과 보급 부족의 이유로 화살 비의 기세가 팍 죽는 타이밍. 나와 기사들은 적들을 향해 내달렸다. 나는 정면의 마녀로. 다른 기사들은 각 방향의 용병들을 향해.
“명예를 위하여!”
“이런 젠장. 기사들이 달려들고 있잖아! 마녀여! 마법은 아직이오?!”
“낄낄. 이제 곧 완성된다. 조금. 조금이면 된다! 버텨라!”
“씨바알….”
용병 단장 데릭이 욕설과 함께 내 앞을 가로막는다. 검을 쥔 자세와 검날을 타고 흐르는 검기. 검을 제대로 배운 놈이 확실했다.
검을 휘두르며 검기를 날린다. 검기는 데릭이 아닌 마녀에게 향했다. 마법에 집중하던 마녀가 인상을 쓰며 손을 뻗었다. 핏방울을 형상화한 것 같은 붉은 배리어가 검기로부터 마녀를 지켰다.
‘피를 이용한 마법.’
확인했다.
내 경험에 의하면 마녀를 가장 먼저 죽여야 한다. 이 전장에서 피가 흐를수록 마녀의 마법은 성가셔질 테니까. 그러나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사들이 용병들을 죽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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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속을 통한 빨라진 속도를 통한 돌진. 나는 전차와 다를 바 없었다. 주제도 모르고 내 앞을 가로막던 용병들은 나와 부딪쳐 뭉개졌다.
“말도 없는 돌진인데도 무시무시하구만. 어이, 기사 양반. 데이커트 경이라 했나? 내 정보엔 모르크 백작 휘하에 당신 같은 기사는 없었어. 그 이름도 처음 듣는 이름이고. 대체 정체가 뭐야?”
“내게 스스럼 없이 말 걸지 마라, 천박한 놈.”
“하, 씨발. 바로 그 태도라고. 내가 이 제국과 기사 새끼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깡!
검과 검이 부딪쳤다. 데릭은 이를 악물며 내 검을 막아냈다. 그의 입에서 선혈이 흐른다.
‘그래서? 내 검을 막는 게 고작인 네가 다음 공격을 막아낼 수 있나?’
다음 공격 기회도 내게 있었다.
검을 휘두른다. 겉으로 보기엔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처럼 보여도 놈의 빈틈을 노린 일격들이다. 알아도 막기 힘들고, 막으려면 반격을 포기해야 한다.
데릭은 어떻게든 내 검격을 막아냈다. 허나 그의 근육이 찢어지고, 그 몸에 가벼운 상처가 새겨져 점점 벌어진다.
“하, 하하. 검이 좀 묵직한 걸 빼면 기사도 별거 없구만!”
“멍청한 놈. 놀아주고 있는 것도 모르는 거냐?”
뇌천류와 찰나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완력만을 사용했다. 놈을 무시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뇌천류와 찰나를 사용할 수 없을 때의 실력 점검이기도 했다.
피투성이의 데릭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퉷. 좆같은 맛이군. 마녀는 잘도 이런 걸 먹었단 말이지. 오만한 기사 새끼. 넌 결국 자기들이 이길 거라 생각 했겠지. 넌 날 단번에 죽이고 마녀를 상대해야 했었다! 네가 패배한 요인은 오만함이다!”
“땅을 기는 놈이 멋대로 날 판단하지 마라. 오만? 설령 내가 오만하더라도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
“오케이, 기사 양반. 뒈진 뒤에도 그딴 말을 지껄일 수 있는지 보자고. 마녀! 시간을 끌었다! 애새끼들을 잡아먹고 얻은, 금단의 마법인지 뭔가 한번 보자고!”
데릭의 뒤, 허공에 떠 있는 마녀의 긴 검은색 머리카락이 진홍빛의 촉수로 변한다. 촉수 끝에 핏물이 뚝뚝 흐른다.
“건방진 놈.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내 힘을 보여주마. 기사여 전율하라. 허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너는 날 위한 일용할 양식일 될 테니. 내 이름은 갈레나. 저 공화국의 마도 원수처럼 지고의 마법사가 되어 이 제국을 지배할 것이다!”
마녀에게서 검붉은 마력이 뿜어져 나와 사방으로 뻗어간다. 다크 문의 경험 덕분일까. 대충 어떻게 마법이 펼쳐질지 짐작이 간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진짜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거다.
내가 가만히 있다면 말이다.
“네년의 이름 따윈 상관없다. 네년은 마녀가 아니라 괴물일 뿐이다.”
“뭐?”
“예쁘지 않은 마녀는 용서할 수 없다. 죽어야 마땅하다.”
“흐, 흐흐흐. 미친 기사야!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네게 남은 미래는 내 마법에 죽는 것뿐이다!”
“공화국의 마도 원수의 경지에 오르겠다고? 꿈도 아닌 망상이다. 네년은 마도 원수의 발가락 끝에도 못 미친다.”
“기사 놈이 마법에 대해 뭘 안다고!!!”
“마법에 대해 몰라도 마법사는 안다.”
마도 원수 중 한 명, 겁수(劫水)의 마도사 예카테리나는 도시 하나를 쓸어버릴 수 있는 힘을 갖췄다. 그에 반해 이년은? 작은 마을 하나. 그것도 제물 없이는 마법도 쓰지 못하는 쓰레기.
“이이이이이익!”
발끈한 마녀가 마법을 사용했다. 손바닥 앞에 핏빛 마법진이 그려지고 갈고리 달린 창자 6줄기가 쇄도한다.
앞으로 한 발짝. 촉수를 비스듬히 피하면서 검을 올려 촉수를 베어낸다.
“네가 뭘 하든 이미 늦었다! 마법은 완성된다!!”
마녀는 의기양양하게 외치면서 하늘 위로 올라갔다. 내가 두려운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고도를 높일 이유가 없으니까.
지상을 적신 피들이 마법에 의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주변 온도가 올라갔다. 널브러진 내장과 살점들이 꾸물거리며 무언가의 형태를 취하려 한다. 늦지 않았다. 마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지. 떨어지는 검의 비를 맞아본 적 있나? 없다고? 이번 기회에 맞아 봐라.”
유성검.
10 자루가 넘는 검들이 하늘에서 생성되어 마녀를 향해 떨어진다. 깜짝 놀란 마녀가 핏빛 배리어로 유성검을 막았다.
튕긴 유성검은 허공에서 힘없이 떨어지다가 푸른 마나의 빛을 흔적처럼 남기고 사라졌다. 마나의 빛도 곧 사라진다.
“마, 마법? 아니, 기사의 비기인가! 안 됐구나! 네 최후의 공격조차 내겐 통하지 않는다!”
“최후의 공격은 지랄.”
10자루로 부족하다면 20자루로. 20자루가 부족하다면 50자루로. 50자루마저 부족하다면 100자루로.
하늘에서 유성검이 떨어졌다.
마녀는 시전하던 마법을 멈추고 방어에 집중했다. 배리어에 마력을 주입하는 것이다.
저 떨어지는 유성검은 제대로 된 유성검이 아니다. 검으로 만들어 떨어뜨리는 것뿐이다. 중력에 의한 물리력을 제외하면 특별한 공격력이 없다.
‘제대로 된 유성검을 섞으면 되지.’
낙하하는 수십 자루의 유성검 중 하나가 파란빛을 낸다. 빛은 유성의 꼬리처럼 허공에서 늘어졌다. 그리고 그 종착지인 마녀의 배리어에 닿으며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앙!
유성검이 폭발하고 핏빛 배리어에 금이 간다. 다른 검들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금 간 배리어를 두들겼다.
그리고 마침내. 배리어가 유리창처럼 부서졌다.
퍽!
유성검 한 자루가 마녀의 왼쪽 어깨에 박혔으니까.
“꺄아아아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은 오래 가지 못했다. 무수히 많은 유성검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몸을 꿰뚫었으니까.
어깨, 배, 머리, 허벅지, 다리, 촉수 머리카락…. 전부 가리지 않고 검이 박힌다. 박힌 검은 그대로 원래의 마나로 변해 사라진다.
하늘은 높았다. 마녀는 힘없이 지상으로 추락했고, 수십 자루의 검은 떨어지는 마녀의 시체를 꿰뚫으며 유린한다.
철퍼덕.
지상에 떨어진 건 마녀였었던 고깃덩어리였다.
콰직!
그마저도 유성검이 떨어져 꿰뚫는다.
내가 유성검을 멈췄을 때, 주위는 조용했다. 한 박자 늦게, 기사들의 함성이 터졌다.
“데이커트 경이 마녀를 죽였다!!”
“데이커트 경에게 영광을! 우리에게 승리를!”
“하하하! 죽어라! 너희는 우리르 막을 수 없다!”
기사들이 환호성을 내지른다. 반면 용병들의 사기를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릭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크크. 검이라도 들어줄까.’
두근.
마녀였던 고깃덩어리가 맥동했다.